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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티서 Sep 08. 2021

담임 쌤 좋음. 체육은 싫음.

2p. 12살의 태티서

2002년 09월 08일

체육 들은 날. 제발 비와라.



 초등학교 5학년 중에 제일 재미있는 선생님을 만났다. 어쩌면 내가 좀 커서 그렇게 느끼는 지도 모른다. 이번 선생님은 우리를 대신 봐주는 애 취급 하지 않는다. 말할 때마다 “너희 이제 고학년이야. 애 아냐.”라고 강조하기도 하고. 좀 친구 같다.


 하지만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는 데 어떤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냥 선생님이 날 예뻐해 준다. 그래서 나도 선생님이 좋다. 한 번은 반애들 몇 명을 자기 집에 초대하기도 했다. 물론 나도 그 안에 껴있었다. 같이 떡볶이도 만들어 먹고, 시츄 데리고 호수공원도 산책했다. 선생님은 일하면서도 우리랑 보는데 왜 주말에도 우리랑 보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선생님도 무척 심심한가 보다.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선생님이 이유 없이 날 편애하는 건 아니다. 나도 예쁨 받을 짓을 한다. 실은 내가 우리 반의 이벤트 부장이다. 한 달에 한 번 반 행사를 계획하는 부인데, 1학기 때 라이벌 같은 내 친구가 하기에 나도 따라했다. 막상 이벤트부가 되니까 좋은 일이 정말 많다. 같이 학교 활동이라며 이집 저집 놀러 다니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 별명이 ‘여자’에서 ‘이벤트 부장’으로 바뀌었다. 훗, 이제 내가 하리수 같은 건 다 이벤트 부장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원래 하려던 얘기는 내가 상표를 엄청 잘 만든다는 사실이다. 상표는 선생님이 뭔가 모범적인 일을 한 아이에게 주는 꽃 모양 종이다. 빨간 다섯 개의 꽃잎 안에 노랑 동그라미가 들어간 모양이다. 그 안에 “상”이라고 네임 펜으로 써야 한다. 그냥 대충 만들어도 되지만 나는 상표를 엄청 정성스레 만든다. 거의 공장에서 찍어낸 수준으로.


 그만큼 나는 선생님이 좋다. 선생님도 나를 좋아한다. 한 가지 의문은 그런 선생님도 결국엔 나를 체육 시간에 내보낸다는 사실이다. 체육 시간엔 우리 담임 쌤과는 전혀 딴판인 체육선생님을 만나야 한다. 학년 몇 번 바뀌었지만 체육 선생님은 맨날 남자다. 이상한 비닐 추리닝 같은 거 입고, 어린이를 대하는 사람 치고 말투도 너무 무섭다. 그리고 교실에선 꽤나 이쁨 받는 나를 너무 너무 너무 싫어한다.


 난 축구 정말 싫은데. 공 사람한테 맞는 거 생각 안하고 뻥뻥 차는 분위기도 싫고. 남자애들끼리만 모여서 욕도 더 많이 하는 상황도 안 맞는데. 그래서 내가 스탠드에 앉아 있으면 꾀부린다고 애들 다 보는 데서 욕한다. 하루는 그래서 여자애들이랑 나도 발야구 하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걔네들이 평소 내 친구들이니까. 그냥 안 된다고 하면 될 걸 체육은 또 눈을 부라린다. 내가 뭐 사람이라도 죽였나. 도대체 나를 왜 그렇게 미워하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체육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고. 가끔 체육 시간이 끝나고 오면 체육보다도 담임 쌤이 원망스럽다. 선생님도 내가 체육 싫어하는 거 다 알면서. 내가 체육 때문에 우는 것도 봤으면서. 왜 그래도 체육시간에 날 내보낼까? 끝까지 옷 안 갈아입고 뭉그적거리는 나를 왜 못 본 척할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쩌면 내가 선생님 이름을 팔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사실 저번에 롯데월드 갔을 때 내가 한 번 그랬다. 나는 이벤트 부 애들이랑 몰려 다녔는데, 빅 쓰리인가 그걸 끊어서 놀이기구를 세 개밖에 못 타는 날이었다. 다이나믹 씨어터 기다리는데 거기 남자 알바가 단체소풍 온 거냐고 물었다. 어쩌다 보니 우리 선생님이 여자인 것까지 말했다. 그 사람이 우리 선생님 예쁘냐 그래서 우리가 다 웃었다. 선생님 사실 안 예쁜데, 그냥 예쁘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빅 쓰리 체크하는 칸 말고 그 옆에 빈칸에 펀치를 찍었다. 그날 우리는 놀이기구 네 개씩 탔다. 좀 기분이 찝찝하긴 했지만,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데.


 오늘도 이대로 끝까지 날이 맑으면 체육에 나가야 했다. 아예 체육복 색깔만 봐도 토 나온다. 온통 그 걱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반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김효민 너 끝까지 거짓말 할래?” 선생님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듣다 보니 김효민이란 애가 반 물건을 도둑질 했다고 했다. 김효민은 학습부였나? 아무튼 나랑은 잘 안 친하고, 반 애들이랑도 다 안 친한 애였다. 애들이 걔는 머리를 안 감아서 싫다고 했다. 아무튼 김효민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그래도 김효민은 끝까지 아니라고 했다. 선생님이 보란 듯이 교실 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선생님이 김효민의 자물쇠를 따고 사물함을 뒤졌다. 과연 누가 옛날에 잃어버렸다는 책이랑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그거 말고도 신문 뭉치가 엄청 많이 들어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선생님이 그 신문을 막 찢었다. 선생님이 김효민한테 소리쳤다. “너는, 너는 진짜 구제 불능이야.”


 그 뒤로 김효민은 복도에 나가서 반성문 쓰게 됐다. 교실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방금까지 체육에 대해 하던 걱정이 싹 가셨다. 아무도 소리 내지 않았지만, 모두들 방금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와, 선생님 저렇게 소리 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체육은 같은 남자니까 나를 더 싫어해. 담임 쌤은 같은 여자니까 김효민을 더 싫어해. 그냥 말로 설명 안 해도 그게 딱 느껴졌다. 선생님 말처럼 우리가 고학년이라 그런 건지도 모른다. 이제는 어른들의 속마음을 우리도 다 안다. 창밖에선 내가 바라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교실의 정적에 빗소리가 침투한다.




본 프로젝트는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추진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1 아동·청소년 대상 예술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된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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