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여행 둘째 날, 오전에는 어제 사 온 용과에 요거트로 아침을 먹었다. 그런데 용과를 먹으려고 자른 순간 당황했다. 내가 좋아하는 용과는 빨간색 용과라서 분명 빨간색이라고 표기된 걸 사 왔는데, 하얀색인 것이다. 빨간색 용과는 조금 더 크고 하얀색은 작은 편인 것 빼고 차이점이 없어 직원이 분류를 실수한 건가? 빨간 용과가 훨씬 달고 맛있는데! 아쉬웠지만, 그냥 하얀색 용과라도 먹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는 Lane 카페에 가서 브라우니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여기 브라우니는 형태가 자주 바뀐다. 어떨 때는 위에 아이스크림을 얹어 주고, 어떨 때는 캐러멜을 부어 준다. 또 크기도 언제는 작고 언제는 큰데 가격은 같다. 똑같은 가격에 다르게 제공되어 불만을 가지는 손님도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오늘은 어떻게 나올까' 하는 기대감이 들어 은근 이런 서비스를 즐겼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아이스크림은 안 나왔지만, 대신 원래 브라우니가 네모 모양에서 조각케이크 모양으로 바뀌었고 식감이 훨씬 부드러워졌다. 달달한 브라우니에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책을 읽으니 참 좋았다.
점심에는 작년에 가르치던 학생 린을 만났다. 린은 세종학당 학생은 아니고, 어학연수 때부터 약 7개월 간 줌으로 과외를 하던 학생이었다. 린과 같이 하노이의 유명한 쌀국숫집 퍼틴(Pho thin)에서 쌀국수를 먹었다. 역시, 한국에서 먹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국물이 진하고 감칠맛이 있었다. 린과는 항상 줌으로 수업을 했기 때문에 실제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하노이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났다. 린은 과외 수업을 할 때 이직 문제 때문에 고민이 많았었는데, 하노이에서 만났을 때는 좋은 한국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회사는 아직 스타트업이지만, 사장님이 좋은 분이라고 한다. 표정이 밝아 보여서 다행이었다.
린을 만나고 난 후에는 저녁 약속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발마사지를 받았는데, 그동안의 피로가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 하노이에 살 때는 마사지를 많이 받지 않았는데, 이번 마사지가 너무 시원해서 여행 기간 내에 최대한 마사지를 많이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사지를 받고 난 후에는 옛날에 살던 집에 갔다. 나는 아파트(라고는 하지만 사실 빌라) 1층 입구에 앉아 계신 아저씨를 불렀다.
"Bắc ơi!"(아저씨!)
"....?"
"Bắc nhớ cháu không ạ?"(아저씨 저 기억해요?)
"A, Cô giáo!"(아, 선생님!)
나를 알아보자 아저씨는 웃으며 반겨 줬다. 집주인 아주머니도 나를 환대해 주며 어떻게 지냈는지, 하노이에서는 뭐 하는지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그리고 나한테 이렇게 다시 봐서 좋고, 앞으로 또 오면 꼭 연락 주라고 하셨다. 나는 아주머니께 준비한 만년필과 아주머니 아이들을 위한 한국 과자를 드렸다. 그리고 내가 살던 집을 다시 구경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아쉽게도 내가 살던 곳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어 구경은 못 했고, 옥상에만 올라갔다. 옥상에 올라가니 청소 언니가 빨래를 걷고 있었다.
"Lâu rồi mới gặp bạn! Nhưng mà sao lại giảm cân thế này?"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요?)
"Vì em làm việc nhiều ở Hàn Quốc"(한국에서 일을 많이 해서 그래요.)
사실 갑상선기능항진증 때문에 살이 빠진 지만, 적당히 둘러 댔다. 그러자 옆에서 경비 아저씨와 주인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Hàn Quốc không hợp với em nha. Có lẽ Việt Nam rất phù hợp với em. Em phải sống ở Việt Nam chứ? (한국이 안 맞나 봐요. 베트남이 너무 잘 맞는 것 같은데 베트남에서 살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đúng rồi đúng rồi. Nếu em sống ở Việt Nam lại thì em có thể trở nên khỏe."(맞아요 맞아요. 저 다시 베트남에서 살면 건강해질 거예요.)
이렇게 짧게 대화를 나누고 옛날 집을 나서는데 그때 우산을 잃어버린 걸 알았다. 어디에서 잊어버렸을까? 버스? 아까 갔던 식당? 마사지샵? 모르겠다. 밖에 비가 오고 있어 더 난감했다. 그때 주인 아주머니가 남는 우산이라며 하나 챙겨 주셨다. 나는 내일 들러서 돌려주겠다고 했지만 감사하게도 그냥 가지라고 하셨다. 선물을 주러 와서 되려 선물을 받고 나가 죄송했다. 내가 좋아하던 껌빙전에 가서 식사도 하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아침에는 문을 안 열고 점심과 저녁은 모두 약속이 잡혀 있어 식사를 못 하고 그냥 주인 아주머니께 짧은 인사만 했다.
저녁에는 문화원 세종학당 학생들을 만났다. 1년 만에 보는 거지만 엊그제 만났던 것 같았다. 예전에 세종학당에서 근무할 때, 학기가 끝나면 학생들과 맛집에 모여 화기애애하게 회식을 했던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이번에 만난 학생들은 지금도 문화원 세종학당에서 계속 공부하고 있는데, 덕분에 요즘 세종학당 수업과 문화원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웠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직도 내가 문화원 세종학당 선생님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을 다시 하노이에서 볼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저도요. 여러분을 꼭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요즘도 문화원 세종학당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네. 저희는 고급 수업도 듣고 문화 수업도 듣고 있어요. 여기 썸 씨는 7권 수업을 듣고 있어요. 선생님이 가르친 학생은 아닌데 기억하세요?"
"그럼요. 지난번에 프엉 씨하고 농 씨하고 같이 저녁 먹은 적 있잖아요."
"와, 선생님, 기억력이 좋으세요! 선생님 오신다는 말 듣고 같이 저녁 먹고 싶어서 왔어요!"
"정말요? 너무 고마워요!"
"선생님, 저는 지금 고급 수업을 공부하고 있는데 너무 어려워요."
"무이 씨는 지난번에도 고급을 세 번 들었는데, 아직도 계속 공부해요?"
"네. 전 한국어를 잘하고 싶은데 잘 못해서 계속계속 공부해요."
"대단하네요. 그런데 무이 씨 지금도 한국어 잘해요. 자신감을 가지세요!"
"아니요, 저는 잘 못해요. 정말요."
"그래요? 그럼 테스트해 볼까요? 우리 지난번에 고급 수업 공부할 때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이득을 얻는다'라는 뜻의 사자성어 배운 거 기억나요? 어떤 단어였죠?"
"음... 아 그거.... 이?? 아니 일, 일석이조!"
"정답! 그거 봐요! 잘하잖아요. 그럼 내가 좋은 말을 해야 다른 사람도 좋은 말을 한다는 뜻의 속담은?"
"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우와, 언니 한국어 진짜 잘하네요!"
"맞아요. 이렇게 잘하고 지난번에는 문화수업 때 한국어 통역도 도와줬잖아요. 한국어 잘하니까 자신감 가지세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음식도 맛있었다. 우리는 러우(Lâu. 베트남식 샤부샤부)를 먹었는데, 예전에 학생들과 회식할 때 80% 정도는 러우를 먹었었기 때문에 내가 이번에도 먹고 싶다고 하여 먹었다. 그런데 이번 러우는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새우 내장을 넣어서 먹는 러우인데, 약간 고급스러운 새우탕 라면 국물 맛이 나는 것이 정말 맛있었다. 거기에다가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라이스페이퍼에 고기와 채소를 싸서 먹는 것까지 배부르고 맛있게 먹었다.
음식은 당연히 내가 사려고 했다. 예전에 내가 계산하려고 할 때마다 학생들이 합심해서 계산을 못하게 막는 바람에 못 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학생들이 나를 꼭 붙잡고 돈을 내지 못하게 했다. 음식 값이 꽤 나왔을 텐데... 학생들이 모두 직장인들이긴 하지만 매번 이렇게 학생들이 밥을 사 주는 게 미안해서 부담이다. 결국 나는 카페에서 쏘는 것으로 합의했다. 학생들을 위해 작은 노리개와 한국 전통 그림이 있는 엽서를 준비해 갔는데 짐 문제 때문에 더 많은 선물을 준비해 오지 못한 게 미안했다.
하노이 마지막 날에는 세종학당 파견교원 선생님들을 만났다. 현재 문화원 세종학당에서 근무하시는 파견교원 선생님 세 분과, 나와 같이 문화원 세종학당에서 일했는데 다시 파견교원에 재지원해서 하노이 1 세종학당으로 오신 김 선생님(하노이에는 세종학당이 1,2,3, 문화원 세종학당 총 네 개가 있다.), 역시 같이 파견교원 생활을 했는데 다시 재지원해서 오신 이 선생님과 같이 베트남 채식 뷔페 레스토랑인 사두(Sadhu)에서 점심을 먹었다. 문화원 선생님 중 두 분은 처음 뵙는 분들이었는데, 모두 파견 오시기 전 내 브런치 글을 정독했다고, 나를 만나 보고 싶었다고 하셔서 영광이었다. 후에 세종학당에 파견 가는 분들도, 베트남 문화원 세종학당에 파견 가는 분들도 모두 내 글을 읽고 오신다. 뿌듯하면서도, 글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부끄럽다. 아무튼 새로운 분과, 오랜만에 보는 분들과 점심을 먹고도 카페에서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저녁에는 또 학생을 만나 하노이의 대표 쌀국수인 분탕(Bun thang)을 먹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점심을 많이 먹어 배가 부른 상태였지만, 분탕이 너무 맛있어서 국물을 모두 먹었다. 하노이에 와서 계속계속 맛있는 것만 먹는다. 음식도 맛있고, 만나는 사람들도 좋고. 그 무엇보다 나를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