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퀸에서 출판하고 브런치 작가인 김연수 작가님이 번역에 참여하신 <알렉시아드>를 읽었다.
<알렉시아드>(안나 콤니니 저. 장인식 외 번역. 히스토리 퀸)의 표지는 보라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표지가 예쁘다고만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 보니 보라색으로 꾸민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보라색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봤다.
보라색은 바로 <알렉시아드>의 전체를 관통하는 색이었다. <알렉시아드>는 동로마 제국의 황녀인 안나 콤니니가 저술한 그녀의 아버지인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일대기이다. 안나 콤니니는 자줏빛으로 장식된 산실에서 태어난 동로마 제국의 고귀한 황녀이다. 알렉시오스 1세는 동로마 제국 역사에서 명군으로 꼽히는 황제이다. 그는 황제가 되기 전 여러 전공을 세우며 황제와 동로마 시민들의 신임을 얻었고, 전임 황제 가문인 두카스 가문의 이리니 두케나와 혼인하여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자리와 이름 뒤에는 수많은 고초가 있었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사령관으로서 전쟁에 참여했고, 황제가 된 후에는 즉위하자마자 이민족들의 침공에 맞서야 했다. 즉위 15년 차에는 그 유명한 제1차 십자군 전쟁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 속에서 그는 쇠퇴하던 동로마 제국을 번영으로 이끈 황제가 되었다. 그러한 그도 인간이기에 마지막에는 황제로서의 영광을 뒤로 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저자인 안나 콤니니는 어머니와 공조하여 알렉시오스 사후 남동생인 요안니스 2세 대신 남편인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나, 남편의 거부로 수도에서 추방당하여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칩거하며 무려 15권에 달하는 <알렉시아드>를 집필했다.
로마 제국의 역사, 그리고 황녀라는 고귀한 신분의 안나 콤니니, 예술과 문학에 대한 안나 콤니니의 지성을 보여 주는 유려한 수사구들, 그러한 그녀의 손에서 묘사되는 로마 제국의 화려함, 그리고 전쟁 속의 광기와 죽음, 혼돈, 책의 마지막에 존경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의 슬퍼하는 심정과 찬란했던 영광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야 하는 심정을 꾹꾹 눌러 담은 문장들, 수녀원에 유폐되어 책을 쓰고 있는 저자의 한탄. 이 모든 것을 책의 표지에 '보라색'으로 함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보랏빛 역사서'라고 부르고 싶다.
이 책은 서문 첫 문단부터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시간은 저항할 수 없이 쉼 없이 움직여, 빛 아래 창조된 모든 것을 쓸어 버리고 집어삼켜, 완전한 어둠 속으로 빠뜨린다. 가치가 없는 것이든, 강력하고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는 행동이든 가리지 않는다. 극작가의 말처럼, *'가려져 있던 것에 빛을 가져오고, 드러나 있던 것을 우리에게서 가린다'.- 작가의 말. p.2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고 강렬한 문장으로 서문을 시작할 수 있을까? 책의 소개 글에 안나 콤니니는 그리스어, 기하학, 음악, 천문학, 역사, 지리, 그리스 철학을 공부했다고 했는데, 첫 문장부터 그런 작가의 지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안나 콤니니가 책을 쓴 이유가 이 첫 문단에 함축적으로 들어 있었다. 위대하고 강대하고 찬란한 역사와 이름도 결국 시간 앞에서는 감춰지거나 가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안나 콤니니는 남기고 싶었던 그녀의 아버지의 기록을 역사로 남기기 위해 <알렉시아드>를 쓴 것이다. 비록 말년에는 수녀원에 유폐되어 외롭게 시간을 보냈을지언정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니, 그녀가 부러우면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역사서 같지 않은 역사서이다. 보통 역사서라고 하면 저자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쓰지만, 이 책에는 안나 콤니니의 주관적인 평가와 감정이 가득 들어가 있다. 그리고 역자들이 코멘트한 것처럼 안나는 이 책을 문학 작품처럼 집필했으며 소포클레스의 비극과 로마 신화 등 여러 고전과 성경을 인용하였고, 대화체 서술이 많아 역사서가 아닌 비극 연극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의 여성스럽고 공주다운 기품으로는, 그 사절들에게 가해진 분노의 처벌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다. 그런 행동은 비단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뿐만이 아닌 기독교인의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나는 이 야만인의 생각, 더 나아가 행위 자체를 묘사하는 것이 혐오스럽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그 외설스러운 짓을 명시적으로 이 글에 묘사한다면, 그것은 내 펜과 저작을 오염시키는 행위가 될 것이다. - p. 47
... 그러나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는 이에 짜증을 내고 못 견뎌하며 (인간의 본성이 이러하다) 말했다. -p. 252
... 그러나 지금 나는 내 불운에 대해 비탄하고 세 황제, 즉 황제인 내 아버지와 황후인 어머니, 그리고 아아! 케사르인 내 남편의 죽음에 대해 통곡하고 있다. 그리하여 몸을 숨기고 책과 하느님께 정신을 쏟고 있다. - p.478
"미련한 것, 무슨 짓을 하려 여기 온 게냐."
그러자 아들이 답했다.
"아버지께서 질문하시니, 아무 말도!"
이에 아버지가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황제 폐하께서 내 조언을 따르신다면, 바로 답을 들려주마." - p.93
또 이 책은 전체적으로 묘사도 뛰어나다. 장소에 대한 묘사도 마치 설명을 읽으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데, 안나 콤니니의 감성까지 곁들여져 보이지도 않는 장소에 대한 느낌도 느껴지는 듯하다. 전쟁에 대한 묘사도 실감이 난다.
이 자줏빛 방은 궁전의 한 건물로서 바닥은 완벽한 사각형이고 천장은 피라미드 꼴이다. 이곳은 돌로 된 황소와 사자가 서 있는 항구와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벽은 평범한 재료도 아니고, 쉽게 조달할 수 있거나 단순히 좀 더 비싼 재로도 아닌, 옛 황제들이 로마에서 실어 온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이 대리석은 한 마디로, 흰 모래를 뿌려놓은 것 같은 지점을 제외하고는 전부 다 자줏빛이었다. 내 생각에 바로 이 때문에, 우리 조상들이 이 방을 '포르피라'라고 부른 것이다. - p. 217-218
탑은 보기만 해도 두려운 모습이었으며, 움직일 때는 더욱 무서웠다. 탑의 맨 아랫부분은 수많은 바퀴 위에 올려놓고, 군인들이 탑 안에 들어가 지렛대를 돌려 움직이게 해 구경꾼들을 놀라게 했는데, 누가 탑을 움직이는지 뵈지 않았기에 탑 모양의 거인이 스스로 움직이는 듯했다.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완전히 덮개를 씌우고, 몇몇 층으로 나눈 채 화살을 쏘는 구멍을 만들어 사방에 틈을 만들었다. 꼭대기층에는 기운 좋은 사람들이 단단히 무장하고 손에 검을 쥔 채 서서, 방어할 준비를 했다. -p.418
안나 콤니니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실감 나는 묘사가 가능하며, 그 많은 장수와 병사들의 대화를 어떻게 알고 썼는지 신기하다. 저자는 자신의 기억뿐만 아니라 황제와 원정을 다닌 이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 자신에게 전쟁에 대한 소식을 전해온 자들에게서도 정보를 얻었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손수 모은 자료로 책을 썼다고 한다. 이 시기에 자료를 모으는 건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라도 어려웠을 텐데 정말 안나 콤니니는 작가로서 대단한 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안나 콤니니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던 포인트는, 그녀의 문장 수사 능력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장면과 자신의 생각, 감정을 문학적으로 꾸미는 안나 콤니니가 작가로서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이러한 그녀의 필력은 마지막에 알렉시오스 황제가 서거할 때 그녀의 슬픔과 비탄의 감정과 함께 터져 나온다.
그러나 이런 급박한 위험 속에서도 황후는 강한 정신을 지키고 위기 속에서도 가장 용기를 내보였으니, 애달픈 슬픔은 넣어두고 올림피아의 게임에서 승리한 사람처럼 서서 끔찍하게 잔인한 고통과 맞섰다....(중략)... 그렇지만 눈물은 파도처럼 흘렀고 아름다웠던 얼굴도 사그라들었으며, 영혼이 실에 매달린 것만 같았다. -p.527
얼마간 불운이 퍼지고 재주가 먹히지 않아 나는 절망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으며, 내 영혼이 아직도 육신에 머무르고 있음에 흐느낄 뿐이었다. 내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지 않았거나, 다른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거나... 스스로 괴리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곧장 죽어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아서 수천 번도 더 넘게 죽어가고 있다. - p. 531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Ted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역사도 결국 기록이라는 증거로 남아야 대화가 가능하다. 안나 콤니니는 책을 통해 자기 시대의 역사와 자신의 감정을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독자인 나는 책을 읽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부분에서는 비판도 하고 공감도 하며,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번역한 번역가 분들(장인식, 여지현, 유동수, 김연수)에게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히스토리 퀸에서 출판한 <알렉시아드>는 번역을 원서가 아닌 1928년에 엘리자베스 도스(Elizabeth Dawes)가 영어로 번역한 영어 번역본에 기반하고 있는데, 원서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려 한 영문판과는 달리 한국인 독자들이 최대한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번역하였다. 그래도 번역서이고 중세 시대적 표현이 있기 때문에 읽기에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스키타이인들이 도착했으며, 로마군이 '나가떨어진' 것을 보고 곧바로 뒤를 쫓았다'(p.215-216)라는 문장에서 처럼 최대한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표현을 쓰려고 한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무리 이미 영문판으로 나왔던 책을 기반으로 번역했다고 해도 그것도 거의 100년 전에 나온 책이라 현대식 표현과 맞지 않은 부분도 있었을 것이고 원서를 최대한 살렸기 때문에, 이 책을 보고 번역하기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그럼에도 이렇게 번역하여 <알렉시아드>를 한국인 독자들에게도 소개해 준 것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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