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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ema Jun 22. 2022

동화_무지개빛 고양이와 털뭉치

<무지개빛 고양이와 털뭉치>


작은 발등 위에 내려앉은 꽃잎을 툭 털어내고 고양이는 한껏 기지개를 폈다. 먼저 앞발을 허공으로 뻗어 쭈욱 늘리고, 그다음에는 뒷발을 늘리며 부르르 떨었다.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내리쬐는 따스한 햇볕을 온몸으로 느끼며 고양이는 꼬리를 말고 자리에 앉아 조용히 마을을 바라보았다. 곧 온몸이 따뜻해지자 기분이 좋아져서는 땅바닥에 뒹굴 한 번 구르고 느긋하게 일어나 정성껏 고양이 세수를 했다. 그리고 몸단장을 마치자 살금살금 마을로 들어갔다. 


아무도 모르게 살금살금.


무지개빛 고양이는 봄바람만큼이나 살금살금 걸었다. 보드라운 발바닥은 아무 소리도 없이 땅을 밟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무지개빛 고양이의 방문을 눈치 채지 못했다.


좁은 골목 사이를 걸어가던 고양이는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한 아이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조심히 쪼그리고 앉아 유심히 고양이를 바라보던 그 아이는 망설이듯 쭈뼛쭈뼛 손을 들어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무지개빛 고양이는 자리를 잡고 앉아서 따스한 쓰다듬을 마음껏 누렸다.

한참이나 고양이를 쓰다듬던 아이는 왠지 마음이 포근해졌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고양이 뒤통수를 간질이다 말고는, 넌 참 보드라운 털을 가졌구나. 네 덕에 오늘 처음 웃었어. 사실 내 마음에 구멍이 하나 생겼거든. 어떤 날은 보라색인 듯싶다가도 짙은 갈색인 것 같기도 하고. 이 마음 구멍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알 수가 없어…….라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낯선 아이의 쓰다듬을 마음껏 누리던 무지개빛 고양이는 이 얘기를 듣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오른손으로 엉덩이를 긁으며 보라색 털을 모았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 어깨를 한껏 늘리고는 등 뒤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서 짙은 갈색의 털을 조금 긁어모았다.

봄바람이 불고 새가 지저귀는 좁은 골목길 한가운데서 고양이는 긁어모은 털을 돌돌 뭉쳐 보라색 같기도 하고 짙은 갈색 같기도 한 털뭉치를 하나 만들어냈다.

고양이는 다 만들어낸 털뭉치를 땅에 고이 내려놓고 오른팔로 툭 밀어 굴려주었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아이는 고양이와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갑자기 이해했다는 듯이 털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난 구멍에 쏙 집어넣었다. 털뭉치는 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 구멍에 쏘옥 들어가 구멍을 메워주었다.

아이는 벌떡 일어났다. 귀밑을 스치는 봄바람이 느껴지고 바람 따라 흘러가던 라일락 향기가 코에 와닿았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아이는 주변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더니 고양이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골목 끝에 있는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지개빛 고양이는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조용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다음 날부터였다. 아이의 집 대문 옆 한 구석에는 고양이가 먹을 만한 음식들이 조금씩 놓이기 시작했다. 생선 한 조각, 우유 한 대접 어떤 날에는 고양이를 위한 참치캔. 무지개빛 고양이는 아무도 몰래 살금살금 와서는 아이가 준 선물로 배를 채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 때문에 햇살이 고개를 들지 못하던 아주 이른 아침, 무지개빛 고양이가 아이의 집 앞에서 새로 놓인 참치캔의 바닥을 열심히 핥고 있을 때였다. 샛노란 운동화를 신고 눈을 비비며 나온 아이는 고양이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잠자코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있잖아. 내 마음에, 구멍이 또 하나 생겼어. 식사를 다 마치고 기분 좋게 몸단장을 하던 고양이는 궁금하다는 듯이 아이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파란색도 아니고 초록색도 아니고 사진에서나 보던 짙은 바다에다가 초록 물감을 부어 만든 색 같아. 어제 집에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던 아이는 울 것 같은 기분에 입을 꾹 닫았다.

무지개빛 고양이는 아이의 무릎 옆을 스치듯 지나가며 위로를 건넸다. 그러더니 왼쪽 다리에 있는 파란색 털과 옆구리에 있는 초록색 털을 살살 긁어모으고, 턱 아래에 있는 투명한 색 몇 가닥을 더 모았다.

파란색과 초록색, 그리고 투명한 색 고양이 털은 한데 뭉쳐 아름다운 색이 되었다. 사진에서나 보던 짙고 오묘한 바다색의 털뭉치. 투명한 털은 털뭉치를 마치 수채화 물감에 물을 머금은 색처럼 만들어주었다. 무지개빛 고양이는 정성스럽게 털을 뭉쳤다. 그리고 얌전히 아이의 발 앞에 굴려주었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한참이나 털뭉치를 보던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고양이의 털뭉치를 집어 들어서 파란색 같기도 하고 초록색 같기도 한 마음 구멍에 쏘옥 집어넣었다. 눈을 가득 채웠던 눈물이 또록 하고 떨어지자, 아이는 더 이상 울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무지개빛 고양이는 아이를 위해 털을 모았고 색이 잘 어우러지도록 동그랗게 뭉쳐 아이의 발 앞에 굴려주었다. 엄마에게 혼이 났을 때는 새빨간 털에 검은색과 갈색을 섞어서, 학교에서 오해를 받아 억울했을 때에는 주황색에 검은색과 분홍색 털을 섞어서. 고양이에게는 이름 모를 색깔의 털이 가득했고 아이의 마음에 난 구멍 하나하나에는 꼭 맞는 털뭉치가 하나씩 생겨났다. 그렇게 아이가 웃는 날이 늘어갔다.


구름 한 점 없는 어느 날의 이른 아침 자꾸만 숨을 들이쉬고 싶은 맑은 날이었다. 골목 끝에 있는 아이의 집 대문 앞에서 무지개빛 고양이를 쓰다듬던 아이가 속삭였다. 그동안 고마웠어. 이제는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네 덕분이야. 고양이는 이른 아침을 먹다 말고는 아이의 눈을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계단에 쪼그려 앉은 아이의 무릎 위로 훌쩍 뛰어올라 아이의 목에 연신 얼굴을 비벼댔다. 아이는 무지개빛 고양이를 한껏 껴안고는 다시 한번 속삭였다. 고마워.

고양이는 한참이나 안겨 있다가 다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아이의 정강이에 얼굴을 비비고 무릎을 살짝 핥아주었다. 그러더니 무지개빛 털을 날리며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아무도 모르게 살금살금


무지개빛 고양이는 봄바람만큼이나 살금살금 걸었다. 보드라운 발바닥은 아무 소리도 없이 땅을 밟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무지개빛 고양이가 떠난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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