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3차 대전이 시작됐다. 일본 반도체 현장 르포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일본 언론들은 TSMC의 구마모토 제1공장을 레이와의 구로 부테라고 했다.
알다시피 레이와는 2019년부터 쓰고 있는 일본 국왕의 연호이고 구로부테는 1853년 도쿄 만에 도착해 개항을 요구한 페리 제독이 이끌었던 미 해군 함정을 말한다.
흑선은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일본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룬 계기로 이끌었다.
TSMC 1 공장을 흑선이라고 부를 정도이니 일본인들이 여기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대만은 일본 지배를 받았지만 우리처럼 일본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한다.
이런 양국의 감정은 오랜 시간을 지나며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우리에겐 과연 누가 있는가.
현장 취재를 통해 일본 반도체가 왜, 어떻게 해서 한국과 대만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본 반도체를 결정적으로 무릎 꿇린 미일반도체협정은 반도체가 단지 비즈니스 품목이 아니라 안보 자산이었음을 몰랐던 일본 정부의 패착이었다는 말이 제일 가슴에 다가왔다.
그렇다, 지금 반도체 전쟁은 단지 미래 먹거리 혹은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한 비즈니스 전쟁 이전에 국가 안보와 관련한 사활을 건 게임이기에 미국과 일본은 서둘러 반도체 제조 전쟁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일본은 어떤 형태로 반도체 부활을 꿈꾸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Ⅰ. 2 나노를 넘어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라피더스를 미래 차세대 반도체 양산 거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자민당 반도체 전략 추진 의원 연맹 회장을 맡고 있는 아마리 아키라 의원은 왜 지금 일본이 첨단 반도체를 하려 하는가.
대만 해협이 봉쇄되면 최첨단 로직 반도체 공급이 70~80% 멈춘다.
중국과는 연계할 수 없다. 기업과 정부 레벨에서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미국 유럽과 제호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같은 날 저녁 열린 만찬장에는 일본의 주요 장비 재료 업체들의 주요 경영 간부들은 물론 반도체 관련 정재계, 학계 관계자 등 400명이 모였다.
행사에 참여한 업계 관계자는 이들이 한꺼번에 만찬 자리에 총출동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경제 산업성이 참석을 독려했다는 뒷이야기도 있었다고 전했다.
라피더스의 영어표기 Rapidus는 라틴어로 빠르다는 뜻이다. 우리말로 치면 회사 이름을 빨리빨리로 지은 것이다. 그만큼 절박감과 의욕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라피더스 설립에 이어 기술과 인재 육성에 관한 빅뉴스 두 개를 연속으로 발표했다.
첫 번째는 미국 IBM으로부터 IP 도입이었고, 두 번째는 유럽 최대 종합반도체 연구소 아이멕과의 협업이다.
IBM으로부터의 기술이전은 일본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IBM은 2021년 2 나노 반도체 시제품 생산에 성공한 회사다.
라피더스와 IBM 경영진은 새해 벽두인 1월 5일 미국 워싱턴에서 미일 정부 관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2 나노 첨단 반도체를 공동 연구 개발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라피더스가 IBM에 직원을 파견하고 필요한 기초 기술의 숙련을 진행시킨다는 계획이다.
고이케 사장은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IBM으로부터 기술 공여가 없으면 일본과 세계적인 기술 격차를 메울 수 없다고 했다.
또 라피더스가 지난해 12월 6일 기술협력을 추진하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IMEC은 현재 반도체 기술에 관한 한 세계 최대 싱크탱크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유럽, 아시아, 북미 전역 7개 지역에 연구소를 두고 있으며 100여 개 국가에서 온 수천 명의 연구진이 반도체 기술을 연구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6월 본부가 있는 벨기에를 방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IMB, IMEC 과의 협업은 40 나노를 건너뛰어 2 나노로 나가겠다는 일본 정부의 구상이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단지 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현지에서는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서포트? 미국이 엔저를 용인하고 있다는 건가.
그렇다. 사실 긴 시간 동안 지속된 엔고로 일본의 제조업 경쟁력은 지속적으로 낮아져 왔다.
그러다가 2014년부터 평탄하게 엔저가 되면서 완만한 성장이 가속을 받는 모습이다.
달러당 130엔을 장기간 유지한다면 일본 제조업은 완전히 부활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일본 정부와 일본 은행의 전략이며, 이를 미국이 서포트하고 있다고 본다.
일본 정부는 제조업을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특히 반도체를 키우려 하는데 미국이 이를 유도하고 있다.
환율문제는 복작해 보인다. 우선 일본 내 반도체 부활 움직임에 대해 묻고 싶다. 라피더스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라피더스 자체의 성공 여부가 중요하다기보다 일단 기업을 만들어놓아야 엔지니어를 모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IBM, IMEC과의 협업으로 일본 엔지니어들이 최첨단 기술을 배우고 시스템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
라피더스 설립은 당장의 이익보다는 인재를 키울 장소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히가시 회장이나 고이케 사장은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다. 많은 사람은 당장의 현실을 생각하라며 부정적 반응을 보이지만 중요한 건 일본이 뭔가를 시작했다는 것이고 이는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서 진행된다는 거다.
지금 일본 정부는 반도체 기술이 없으면 국가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국제 정세가 변하더라도 반도체 육성을 지속할 것이다.
라피더스가 당장 일본 반도체를 살리는 데는 역부족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나는 2022년부터 고이케 사장과 다양한 논의를 해왔다. 처음에는 제품 양산이 아니라 연구개발만 할 것도 생각해 봤다.
그러나 앞으로 반도체 수요는 점점 늘어날 것이므로 생산 공장이 꼭 필요하다는 데 의견일치를 봤다.
공장이 없다면 인재 육성도 할 수 없고 소재 장비 업체와의 협력도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지속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Ⅱ. TSMC는 갑이다.
미국과 일본은 TSMC 유치경쟁을 벌였다. 왜 TSMC인가.
주문생산에 관한 한 최고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TSMC는 한 마디로 기술력과 규모 면에서 괴물 같은 파운드리 거대 기업이다.
엔비디아, 퀄컴 등 미국 대기업을 비롯해 세계 대부분의 주요 반도체 업체가 제조를 맡기고 있다.
한마디로 TSMC 없이는 제품을 못 만든다. 미세가공기술은 이 회사의 독무대다.
TSMC가 독자 개발한 실리콘 웨이퍼 운반 상자는 하나에 수천만 엔에 달한다.
일본 엔지니어들 말을 들어보면 양산은 절대 힘들다는 어떤 설계도 TSMC는 만들어준다. 어떻게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설계도만 넘기면 작동하는 물건이 나온다고 한다.
TSMC는 지난해 2 나노 신공장 건설도 시작한 상태다. 병원체 바이러스보다 더 작은 극소 세계에서 계속 왕좌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공장은 극비에 부쳐진 기술과 노하우가 뭉쳐진 결정체다. 겉으로는 하청업체인 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갑이다.
TSMC는 고객을 더 강하게 만든다. 단적인 에피소드가 PC의 두뇌에 해당하는 CPU 시장에서 세계 최대 점유율을 가진 최강자 인텔을 뒤쫓던 AMD가 2018년 기존의 파운드리 업체에 위약금까지 물고 계약을 해지한 뒤 TSMC에 일을 맡겨 인텔을 따돌리는 데 성공한다.
Ⅲ. 일본은 서서히 끓는 냄비 속 개구리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10년 후, 20년 후 내가 지금의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지 비관적이다.
기회가 된다면 외국에서 살고 싶다. 일본 사람들은 무엇보다 변화를 싫어한다.
일을 하는 사람이나 하지 않는 사람이나 월급이 똑같다. 일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겠는가.
일본에 살고 있으면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다. 물이 천천히 끓고 있는 냄비에 들어 있는 개구리처럼 말이다.
뒤늦게 반도체를 해보겠다고 하지만 비관적이다. 지금 할 수 있다면 옛날에는 왜 하지 못했나.
반도체도 삼성에 밀렸는데 이제는 유일한 희망인 도요타 자동차까지 밀리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크다.
5년 뒤 세계는 전기차 세상으로 갈 텐데 과연 도요타가 지금처럼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회사가 될 수 있을까.
반도체도 기존 질서와 기득권에 머물다가 혁신하지 못했다. 도요타도 마찬가지다.
엔진 자동차가 워낙 잘나가니까 협력업체 등 굳건한 생태계를 깨기가 힘든 거다.
1등에게 혁신은 손해 보는 게 더 많다. 그래서 어려운 거다.
일본의 가장 큰 문제가 정치다. 한국은 그래도 5년마다 정권이 바뀌면서 아직도 뭔가 해보려는 변화의 에너지가 사회 전체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일본은 자민당 정권이 바뀌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이 엄살이 아니라는 것은 실제 경제지표에서도 드러난다.
환율 물가를 고려한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일본의 1인당 국민총생산은 2018년 한국에 추월당했다.
수년 내 명목 달러 기준으로도 뒤처질 전망이다. 한때 세계 2위였던 일본 경제는 중국, 독일에 역전 당해 4위로 밀려날 처지다.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 글을 마치며 ]
반도체에 대한 관심도가 이렇게까지 높아진 적은 없었던 듯하다.
가장 큰 이유는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도가 반도체까지 연결이 된 것이라고 보인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서비스가 가능해지고 있고 실제 생활에서 사용성이 높아지면서 앞으로는 또 어떤 인공지능이 나오게 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도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공지능의 핵심이 반도체 칩에서 나온다는 것과 투자 심리가 맞물리게 되면서 많은 이들이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반도체의 공정이나 칩에 대해서도 이해도가 높아지고 있는 상태이다.
여기에 미래 산업의 새로운 기회 요소로서 확실하게 자리 잡아 감으로써 일본은 다시 반도체 산업에서 중요한 지위를 갖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고 보인다.
현재 일본은 반도체 산업 사이클에서 소부장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지만 그 외의 분야에서는 영향력이 전무한 상태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전략은 현재 소부장의 강점을 활용해서 반도체 제조 산업으로의 편입을 노리고 있다고 보인다.
일차적으로는 TSMC를 통해서 일본 자국 내에서의 반도체 생산 기지를 만들고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한다.
TSMC는 최첨단의 제조 공정을 보유한 회사로서 일본은 이를 통해 순식간에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패키징 기술까지 협력하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반도체 가치 사슬에서 제조 역량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흐름이 계속될 경우 더 먼 미래에는 일본에 반도체 인재도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되고 궁극적으로 인재 육성도 가능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일본이 자체적으로 보유하고자 하는 반도체 파운드리 회사인 라피더스도 비현실적인 꿈이라고 치부하지는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형태가 되었던 앞으로의 세계는 반도체 제조 역량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반도체 설계나 지적 재산권도 중요하지만 최종적으로 물리적인 반도체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제조 역량을 갖추고 있는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가 구분되는 세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도체와 관련된 기사들을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읽어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
참고 도서 : 일본 반도체 부활 현장을 가다 ( 허문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