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를 따라잡던 일본인들은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을 깔보는 경향을 갖게 됐다. 1885년 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 나라들이 가망 없이 뒤떨어진 데다가 약함으로 일본은 “아시아를 탈출”해서 “서구의 문명국들 "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당대 이론 엘리트들 사이에 지배적인 분위기였다. 1902년 일본과 영국의 군사협정은 유럽의 기준에서 본 국제관계에서 일본이 유럽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섰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부러운 것은 메이지 당시 일본이 서구와 맺은 불평등 조약을 근본적으로 개정하려고 노력했고, 성공했다는 거다. 아직도 SOFA(한미행정협정)에서 불평등한 상황인 현재 우리를 보면 더 부러운 거다.
1895년 37세 캉유웨이와 제자인 22세 량치차오가 과거시험 보러 베이징으로 가던 기선이 동중국해에서 일본군으로부터 수색을 받는다. 이 기이한 우연으로 량치차오는 현대 중국에서 우상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한다. 당대의 주요 관심사와 미래의 많은 관심사를 예측한 명료한 글로 마오쩌둥을 비롯한 몇 세대 중국 사상가들을 자극한다. 중국 고전에 대한 학식과 서구의 사상과 동향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능력을 다 가지고 있었다. 량치차오는 옌푸(염복, 천연론)의 번역서로 서구 철학자들을 만난다.
량치차오는 파리강화회의에 중국 대표로 참석해중국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하고 참담한 상태로 귀국한다. 인도와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은 파리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1차 대전에서 인도 병사 8만 명이 중동과 유럽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고매한 이상이었을 뿐이다.(프랑스 총리 클레망소는 하느님도 10개 조뿐이었다고 농담했다고 한다) 파리강화회의는 서구의 현실정치가 아시아의 지식인들과 활동가에게 가르쳐준 교훈 가운데 가장 뼈저린 일이다.
“1917년에 권력을 장악한 레닌은 프랑스, 영국, 제정러시아가 체결한 중동 분할에 관한 비밀협약을 폭로했고, 중국에서 누리던 특수이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이러니 일제에 고통받던 조선 지식인들의 마음이 움직일 방향은 뻔했던 것이다. 공산주의가 좋아서가 아니라 현실을 타개, 개혁할 대안, 세력, 이념이 없었기에 선택한 것이다. 파리강화회의에서 명국, 프랑스, 미국이란 제국주의의 이익추구가 월슨의 배반과 러시아의 불평등 조약파기와 함께 아시아 민족들에게 공산주의에 눈을 돌리게 하는 원인이었다.
량치차오는 민족의 힘이란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에서 비롯되는데, 민주주의란 군주제의 이기심과 반대되는 “그저 공공심(公共心)”일뿐이라고 본다
제4장 1919년, 역동하는 세계사
이탈리아-터키 전쟁의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의 활동은 쓰시마 해전과 같은 충격을 아시아와 서구에 주었다. 서구의 몰락에 내재한 물질주의는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자연을 정복하고 개인과 계급, 국민들이 서로 충돌하는 다원주의적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끊임없이 새것을 원하고 끊임없이 좌절하는 서구의 물질주의적인 사람들은 전쟁에 지치고, 불안정한 현실에 괴로워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유럽이 자랑하던 위대한 진보를 스스로 엄정하게 성찰하고 회의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유럽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눈에는 별안간 유럽이 멸망할 운명으로 보였고, 량치차오는 이를 감지한다.
량치차오는 “유럽인은 과학의 전능을 고대해 왔다. 이제 그들은 과학의 파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근대적 사유의 대전환기다.” 서구인이 보기에도 도덕적 질서를 강조한 공자와 맹자가 더는 부적절해 보이지 않았다. 신문화 운동의 급진주의자들이 옹호하는 과학은 더 이상 사회복지 문제에 대한 만능 해결책이 아니었다. 량치차오는 “물질적 삶은 정신적 삶을 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목표에 이르는 수단으로 목표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문제는 어떻게 유교의 이상인 중용을 적용해서 모든 사람이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느냐는 것이다.”라고 결론짓는다. 버틀란트 러셀도 “우리 문명의 뚜렷한 장점은 과학적 방법이고, 중국 문명의 뚜렷한 장점은 삶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라고 역설했다. 량수밍(1893~1988)도 “중국 문화의 근본정신은 중용에 의거한 사상과 욕구의 조화다.”라고 말한다.
제5장 아시아의 타고르, 망국에서 온 사람
타고르는 인도의 유럽화를 냉철하게 관찰하고 맹렬하게 비판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러일전쟁의 승리에 환호했던 타고르는 일본의 침략주의, 제국주의 팽창 의도를 알게 되자 “신일본은 서구의 모조품일 뿐입니다.”“당신네는 유럽 제국주의라는 병균에 감염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193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참석한 뉴욕 만찬회에서 “지금은 서구의 시대이고 인류는 여러분의 과학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여러분은 이 유감스러운 선물 때문에 무력해진 사람들과 굴욕을 당한 사람들을 착취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제6장 아시아의 재형성
일본의 이익은 아시아의 이익이라던 궤변은 역풍을 맞아 탈탈 털렸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에게 깨진 프랑스 대신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5년 사이공 미대사과 옥상에서 미군헬기가 철수해야만 했다. 1965년 싱가포르 리콴유는 아시아 전쟁세대가 더 이상 제국주의 국가에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웠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량치차오가 이루지 못한, 국민이 공유하는 윤리를 중심에 두고 중국을 되살리는 일을 시작했고, 오늘날 중국 정부는 세계 곳곳에 공자학원을 설립하는 방법으로 노력하고 있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정통 공산주의 보다 자유무역과 결합한 맹자의 공적 소유라는 경제적 이상에 기댄 듯한 원칙에 입각해 새롭게 출발하고 있다.
내부가 약했던 이슬람 세계는 외부 위협에 시달렸으나 신이 사회를 인도하고 공동선의 개념을 규정한다는 이슬람의 믿음은, 개인의 이익에 입각한 사회경제 질서와의 대결에서 살아남았다. 이슬람주의 세계관에 따르면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이 이데올로기를 만든 서구 자체도 실패한 것으로 본다. 오르한 파묵은 “서구 세계는 세계 인구의 대부분이 느끼는 이 압도적인 굴욕감을 거의 모른다며 테러리스트를 찾는 일뿐만 아니라 서구 세계에 속하지 않는 가난하고 멸시받고 ‘그릇된’ 다수를 이해하는 것이 서구가 직면한 문제 다라.”라고 일갈한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슬람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서구에 대한 적의를 강화했다.
“유럽의 인종들은 대개 지독한 불한당이지만, 적어도 신의 의지와 힘을 부여하고, 한동안 인류의 우두머리 자리에 앉도록 예정해 둔 듯한 불한당이다. 지구상의 그 무엇도 그들의 영향력에 저항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1855년 알렉시스 토크빌의 예측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사실이다.
아시아인들은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훼손한 과거의 종교적, 정치적 위엄을 잊지 않고 있다. 더불어 21세기 위싱턴 컨센서스(미국식 시장경제 체제의 대외 확산 전략, 외국 자본에 대한 규제 철폐, 무역 자유화와 시장 경제 국가 기간산업 민영화 등)도 무너지니 신뢰를 잃고 있다. “분명 서구의 지배는 이미 제국과 문명의 기나긴 역사에서 놀랄 만큼 단명한 또 하나의 단계로 보이기 시작했다.”
<제국의 폐허에서>를 읽고 공부하면서 1920년대에 사상가와 활동가들이 세계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