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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쓸모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by 노충덕 Mar 19. 2025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철학의 쓸모

2025. 3. 16(일요일)


   흔히 보는 철학책과 다른 제목이다. 아마도 기획자가 TV 프로그램 ‘알뜰신잡’에서 ‘쓸모’를 가져왔을 수도 있다. 온라인 서점에서 잘 팔리는 철학책이지만, 감동을 준다거나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에는 아쉽다. 쉽게 쓰려고 노력하고 번역도 껄끄럽지 않지만, 단문이지만  벌려 놓아 만연체의 글이란 느낌이다. 『철학의 쓸모』는 반복되는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문제에 관하여 어떤 태도와 자세로 풀어가는 것이 좋을까라는 문제의식에 대해 답하려고 시도한다.   


   인간은 육체적 고통, 영혼의 고통, 사회적 고통을 겪는 존재라는 전제와 범주에서 벗어난 흥미로운 고통들도 마주한다고 전제한다. “고통 없는 삶은 없다”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 삶의 대부분은 본질적이면서도 무상하고 무엇도 예측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 무상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이다. 이는 서양철학이든 동양철학이든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불교의 연기론은 스피노자의 인과율과도 다르지 않다. 『철학의 쓸모』는 이런 전제를 두고, 철학이란 우리의 고통을 진정시켜 주는 진통제와 연고를 처방해 주는 일종의 의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키르케고르는 철학의 역할을 정신의 가장 큰 불행, 즉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망에 빠져 고통을 겪는 우리를 치유하는 것이라고 한다.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대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 바꾸거나 위임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실패하더라도, 길을 잃더라도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같은 교훈을 이끌어낸 이들은 스토아학파다. 스토아 철학이 제시하는 치료의 원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시몬 드 보봐르의 시선을 말하며 자크 데리다의 ‘고양이의 시선’이라는 낯선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고 말한다.

   에피쿠로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몽테뉴 같은 이들은 삶이란 사소한 것이며 중요한 것은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인문학이 출발한다고 본다. “병에 걸렸을 때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는 병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일 뿐이다”라는 문장에서 현대의학의 역할을 기대하지 못했던 시대의 말이라고 제처 둘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다.

   늙음에 대한 처방으로 한나 아렌트가 소개하는 ‘내면의 힘을 기르면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 즉 탄생성(natality)의 실천에 귀를 기울인다.


   ‘열정에 대하여’ 소개하는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이야기한다. 두려움에는 용기, 쾌락과 고통에는 절제, 분노에는 온유함이 중용이다. 이에 견주어 스토아학파는 중용이란 치명적 열정의 치료법이 될 수 없으니 열정을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본다. 어떤 것에도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정신의 의연함인 ‘아파테이아(apatheia)’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은 토론의 기술도, 감정의 공유도 아닌 이성으로 개념을 생산하는 일종의 ‘개념 제작소’다.(p. 109)

‘산다는 것에 대하여’는 나는 어떤 삶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삶에서 실패나 좌절을 겪을 때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 이 문장도 인문학의 출발점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다.      

   헤겔은 “자기 하인에게도 영웅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며 영웅은 일상에서 벗어나 있을 때만 영웅이 될 수 있다. 성경에서 선지자는 가족과 이웃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삶은 매일 반복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건조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문학과 예술, 철학이라는 향미제와 조미료가 필요한 것이다.      


   p. 142에서 ‘세이렌의 노래에 유혹당하지 않기 위해 범선의 돛대에 자신을 결박한 오디세우스의 방법, 즉 거부함이 의지박약을 극복하는 방법이란 점에 끄덕이기 쉽지 않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한 후회,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슬픔, 하지 말아야 했던 일의 상처에 빠져 무기력해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오직 행동하는 것뿐이다. 누가 뭐라해도 권태나 우울에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는 육체노동이다.      


   실패를 배움과 성장의 기회로 여기고 이상화하면서 경험에 지나치게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고 보며, 현실에서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은 더 멋있게 실패하는 법 뿐이라는데 가능한 일인가 의문이다. 아둔한 칠면조가 되고 싶지 않다면, 경험의 힘을 믿지 말라고 한다.     

우리가 원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대신,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고독을 그저 외롭고 부정적인 상태로 여기지 말고 진정한 자유를 체득하고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받아들여라.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정치인이든 상인이든 관리든 학자든 노예에 불과하다”는 니체의 말이다.(p.241) 우리를 구별 짓는 것은 직업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사용한 시간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위에 있다가 퇴임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귀 기울여야 할 문장이다.     

투머치토커, 잘난 체하며 여성들을 가르치려 드는 ’맨스플레이너(mansplainer), 혼잣말하는 사람들을 사회악으로 보는(p.269) 관점은 새롭다. 침묵은 우리를 더욱 현명한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서로 다른 원칙에 따라 자녀를 교육하는 것이야말로 불화와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국가를 약화시키니 어린이들의 교육을 공동체에 위탁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플라톤은 p.277에서 “전사들의 아내는 모두가 공유해야 하고, 어떤 여인도 특정한 남성과 함께 살아서는 안 되며, 아이들 역시 아버지는 자식을, 자식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게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현재는 수용할 수 없는 플라톤의 의식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와 함께하면서도 홀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감정을 독일어로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고 부른다.(p.194)는 사실을 엊그제 브런치에서 읽고, 오늘 다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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