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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용 Feb 10. 2024

내장을 꺼내 보이는 글쓰기

 진정 재미있는 글쓰기

11월 2일

내장 사실주의에 동참하지 않겠느냐는 친절한 제안을 받았다. 통과의례는 없었다. 그게 더 낫다.


11월 3일

내장 사실주의가 뭔지 잘 모르겠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야만스러운 탐정들>의 도입부다. 열일곱의 대학생 후안 가르시아 마데로는 내장 사실주의라는 해괴한 이름의 시/문학 운동 그룹의 일원이 된다. 이 내장 사실주의는 로베르토 볼라뇨가 젊은 시절 주도하고 참여한 시 운동 ‘밑바닥 사실주의’를 패러디한 이름이다. 그런데 왜 하필 내장일까?


재즈 음악을 다룬 일본의 극장 애니메이션 <블루 자이언트>에도 ‘내장’이 나온다.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온 천재 피아니스트 유키노리는 꿈에 그리던 재즈클럽 So Blue에서의 공연을 앞둔 하루 전 날, 교통사고를 당해 내장이 쏟아져 나온다… 는 거짓말이다. 그는 So Blue에서 연주하기 위해 담당자에게 자신이 속한 밴드의 공연을 보러 와달라고 요청한다. 공연이 끝난 후, 담당자는 유키노리에게 이렇게 얘기해준다. “자넨 글러먹었어, 손가락 테크닉만 남발하는 피아노, 재미라곤 없는 연주, 자넨 겁쟁이인가? 내장을 까 보일 정도로 전력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솔로 연주인데” 냉정한 평가를 듣고 절치부심한 유키노리는 다음 연주에서 진실되게, 즉 내장을 까 보일 정도로 연주한다. 실제 영화 속 대사다. “내장까지 꺼내 보여주겠어!” 그런데 여기도, 왜 하필 내장일까?


두 작품 모두에서 내장은 예술적 진실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중요한 건 영혼과 달리 내장은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영혼은 존재 여부가 불분명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당연히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적이라고 본다. 영혼이 어쩌고 말하면 궤도가 물을 것이다. “그래서 지평좌표계에 어떻게 고정하셨어요?” 영혼은 은유로서만 존재한다. 반면, 우리는 모두 내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안다는 걸 넘어서 ‘실제로’ 존재한다. 다만 내과 의사나 응급 의사가 아닌 이상, 실제로 내장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정신적’ 내장을 꺼내보이는 방법이 하나 있다. 글쓰기다. 스위스 극작가 막스 프리쉬는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 기회조차 갖지 못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 내장의 생김새를 알 기회를 갖는다.”


내장을 꺼내 쓴 글은, 내장을 꺼내 만든 요리와 고스란히 같은 특성을 가진다. 바로 내장탕이다. 내장탕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얼마나 잘 만들었든 극명한 호불호를 갖는다. 둘째, 신선한 내장을 사용하지 않거나, 잘못 요리하게 되면 잡내가 너무 심해 먹을 수 없다. 다루기 힘들다는 것이다. 셋째, 잘만 조리되면 일반적인 해장국과 다른,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선 웬만한 소머리해장국, 콩나물국밥, 선지해장국, 뼈다귀해장국, 순대국 보다 맛있을 수 있다. 부드러운 면과 쫄깃한 면, 단단한 면을 모두 갖고 있어서 다채로운 식감을 맛볼 수도 있다. 고기만 넣고 끓인 국물과는 또 다른 깊은 맛이 난다는 점, 색다른 향도 특징적이다.


내장을 꺼내 쓴 글도 마찬가지다. 아주 진실된 글은 모두가 좋아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열광하는 이들이 있다. 늘 신선한 내장을 써야하듯, 신선한 생각과 통찰이 담겨야 한다. 자신이 지닌 생각과 철학, 살아온 삶이 썩었으면, 썩은 글이 나오는 것이다. 또한 잘 요리해야 하는 것처럼, 자신의 솔직함을 정확한 논리나 날카로운 통찰로 담아내지 않으면, 소위 양산형 에세이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뻔한 글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반전이 있다.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오직 자기만이 포착해낸 세상과 삶의 면면을 담아낸 ‘입체적인’ 글이 탄생할 수 있다. 그런 글은 부드럽고 쫄깃하고 단단하며 깊다. 그런 글에선 고유한 향이 난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에세이 <재미의 본질>에서 글쓰기의 재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맨 처음 글쓰기에서 느끼는 재미는 자기 자신을 떨쳐내는 데 있다.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 자기만의 환상과 괴상한 논리를 현실화한다. 이로써 스스로가 좋아하지 않는 자신의 면모에서 벗어난다. 이를테면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 천하무적에, 재색을 겸비했지만 여러 비밀을 품은 웹소설 주인공으로 환생한다. 이때 글쓰기는 엄청나게 재미있다. 그리고 자신의 글이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한동안은 글쓰기가 더 재밌어진다. 하지만 이내 문제가 발생한다. 이 시점부터 우리는 남들이 좋아해줬으면 좋겠다는 욕구로 글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글은 허섭스레기가 된다. 우리는 우울해지고 씁쓸해진다. 글쓰기의 재미는 어디로 간 걸까. 월리스는 이때 글쓰기의 새로운 재미를 찾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찾게 되는 재미는 이전과 전혀 다른 재미다. 이때부터 글쓰기는 “차마 보고 싶지 않은 것, 혹은 남들 어느 누구도 보지 말았으면 하는 것을 조명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주제야말로 알고 보면 모든 작가들과 독자들이 공유하고 반응하는 것, 느끼는 것”이다. 이제 글쓰기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이 아니고, 남들이 가장 좋아해줄 것이라고 여기는 방식으로 자신을 선보이는 수단도 아니며, 그보다는 이상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진실을 말하는 수단이 된다. 이 과정은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무섭다. 또한 고되다. 그러나 알고 보면 최고의 재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 우리에게 필요한 글쓰기, 진짜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글쓰기는 이런 글쓰기일 것이다. 자기 진실을 꺼내는 글쓰기, 내장을 꺼내 보이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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