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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용 Feb 12. 2024

오늘날 어디에도 미래가 없을지언정 웃음에는 미래가 있다

유머란 무엇인가

내가 세 번째로 다닌 회사에는 나를 무척 싫어했던 여자 디자이너 한 분이 계셨다. 그녀는 나를 뒤에서 ‘아틀라스’라고 불렀다. 그리스 신화의 아틀라스. 세상의 무게를 짊어지는 형벌을 받은 거인. 나는 거인이라 불리기엔 키가 별로 안 컸지만, 이유를 생각하면 납득이 갔다. 그 별명에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의 거의 모든 일을 짊어지고 있다는 의미, 그러니 회사에 실컷 착취나 당했으면 좋겠다는 의미,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착취 당해서 너무 재밌고 즐겁다는 의미. 즉 조롱의 의미였다.


나는 내 별명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느냐 하면, 아니었다. 이 별명은 내게 영광스러웠다. 로맹 가리의 말이 떠올랐으니까. 그는 <밤은 고요하리라>에서 이렇게 썼다. “웃음이 인간의 속성이라고 말한 라블레는 사실 고통을 얘기한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아틀라스가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았던 건 그가 춤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춤꾼은 아니지만 가끔 노래방을 가면, 춤이라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모를 무언가를 하긴 한다…. 그걸 알고 붙여준 별명이었을까. 하지만, 나를 싫어했던 그 사람과 함께 노래방에 간 적은 없었던 기억인데….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의 수도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프랑수아 라블레는 “눈물보다는 웃음에 관하여 쓰는 법이 나은 법”이라며, “웃음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얘기했다. 앞서 말했듯, 로맹 가리는 이 이야기가 고통을 말한 것이라고 봤다. 니체도 웃음을 고통과 연결지었다. 인간이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짐승’인 이유는 “너무나도 극심하게 고통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겪는 고난에 대한 필사적인 임시방편으로 그런 것이라도 생각해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로맹 가리와 니체의 견해를 따르면, 인간은 웃음, 유머, 농담, 코미디를 통해 고통을 이겨낸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프로이트의 견해는 이에 대한 힌트를 준다. 그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농담을 “억압된 상태에서의 에너지 방출”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억압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 붓는데, 농담을 통해 초자아의 억압을 완화하고 거기에 일격을 날린다는 것이다. 헤겔도 웃음의 원리를 비슷한 관점에서 봤다. 그는 <예술 철학>에서 “억누를 수 없는 관능적 충동과 인간의 고차원적 의무감 사이의 충돌”이 우스꽝스러움을 빚어낸다고 했다. 오페라 감독이자 유머 작가 조너선 밀러의 말도 새겨볼 만 하다. 그는 유머가 일상적인 개념의 범주를 느슨하게 풀어주고, 그 범주들의 압제를 완화해준다고 본다. 우리가 일상적 범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정신의 자유로운 놀이, 이것이 유머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헤겔, 조너선 밀러의 의견은 모두 유머가 (그 순간이 얼마간이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만든다고 본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바꿔서 이야기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어렸을 때부터 나는 유머와 코미디, 즉 사람 웃기는 일을 좋아했다. 유치원생 땐 장래희망이 코미디언이었다. 잘 몰랐는데 중학생 땐 학교에서 좀 유명했다고 한다. 스무살 때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잘 모르는 중학교 동창들이 나를 먼저 알아보고 얘기해줬다. 고등학생 땐 같은 반 친구를 주인공으로 삼아 굉장히 수위 높은 개그 만화를 그려서 아이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군인 시절이나 대학생 시절, 직장인 시절에도, 꾸준히 시덥잖은 농담들을 던지며 살아왔다. 왜 그렇게 꾸준할 수 있었을까. 삶의 고통도 그만큼 꾸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행히 누군가가 나를 뒤에서 ‘아틀라스’라고 부르며 조롱한 일이, 엄청나게 고통스럽진 않았다. 누군가 나를 싫어하는 일도, 있는 힘껏 조롱하려고 애쓰는 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무기가 필요했다. 다시 로맹 가리의 말이다. “유머는 살아오는 동안 내내 나의 우정 어린 동료였다. 진정으로 적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순간들, 그 순간들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유머 덕분이었다. 누구도 내게서 그 무기를 떼어놓을 수 없었다. 또한 나는 기꺼이, 그 무기가 내 자신을 향하게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나’나 ‘자아’를 통해 그 유머가 바로 우리의 근원적 조건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유머는 존엄성의 선언이요, 자기에게 닥친 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의 확인이다.”


바흐친은 “억압적인 규범, 공포, 고통, 폭력의 엄숙함”으로부터 웃음이 세계의 명랑한 진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나의 웃음, 유머, 농담이 바흐친의 말처럼 세계의 진실까지 해방시킬 수 있을진 모르겠다. 시리아 내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울부짖는 아이들, 여전히 세계에 만연한 여러 억압과 폭력, 고문, 점점 더 악화 돼가는 기후 변화,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 사회 안전망의 붕괴와 도심에서 일어나는 무차별 테러까지, 슬픔이 가득한 세상이다. 하지만 어떤 세계에서, 어떤 인생을 살아가든, 유머를 잃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테리 이글턴은 “역사가 상황을 오판하고 일을 그르치는 일이 허다하기에, 이러한 역사의 결함을 바로잡으려면 희극이 필요하다”고 썼다. 웃음에 미래가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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