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웃길 것인가
어떻게 웃길 것인가. 애초에 이런 걸 왜 생각하지…. 코미디언이 될 게 아닌데. 이런 걸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긴 할까.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나는 써야겠다. 유머는 인생에 중요한 기술이니까. 이 문장이 옳다면, 다음 문장도 옳다. ‘어떻게’ 웃길 것인가를 제대로 고찰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웃기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망한 유머로 가는 지름길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웃길 것인가를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웃기지 못 하는 걸 넘어서, 타인에게 해가 되는 방식으로 웃기려 들 수 있다. 그럴 바엔, 유머러스한 사람 같은 건 안 되는 것이 옳다. 물론 유머는 실패를 통해 자라나는 기술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말처럼 “다시 시도하고, 더 낫게 실패”해야 한다. 하지만 그 실패가 타인에 대한 공격과 비하, 무례함으로 반복되는 실패라면? 그렇다면 그냥 발 닦고 집에서 잠이나 자는 게 낫다. 소개팅 같은 데서 흔히 첫 만남 이후에 이런 평가가 나오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착한데 재미없는 사람”, 이런 평가가 나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무례함과 공격성으로 무장한 유머를 던지는 사람 보다 착한데 재미없는 사람이 오천배는 더 낫다. 아무튼 착하다잖아.
나는 누구에게든 “착한데 재미없는 사람”이란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뭐 그냥 평범한 사람이지만. 인간이 다 비슷하지 않은가. 배고프면 식사를 해야 하고, 밤이 되면 자야 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화폐를 벌어야 하고, 적당한 소비로 적당한 쾌락을 추구하고, 다만 좀 특징적인 부분이라면 소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애쓴다는 점? 그리고 소비가 삶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지 않게 하려고 의식한다는 점? 책 읽는 걸 좀 과하게 좋아한다는 점? 아침 일찍 일어나서 헬스장에 가는 점? 뭐 그게 아니면 좀 일찍 잠자리에 들고 하루에 8시간씩 꼬박꼬박 잔다는 점 정도가 아닐까? 그 외에 생각 나는 건 식사량이 좀 많다는 것 정도다…. 회사든 모임이든 회식이라도 하면, 나한테 맨날 먹방 유튜브 해보라고, 진짜 성공할 것 같다고 하니까….
사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나지만, ‘특이한 사람’이란 얘기를 참 많이 들어왔다. 대학생 때부터도 그랬지만 점점 더 많이 듣는 듯… 최근에 직장에서나 독서모임 플랫폼인 트레바리 모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도 “살면서 처음 보는 캐릭터”란 얘기였다. 그냥 책 좀 많이 좋아하고, 사람들 잘 안 보는 영화 보고, 운동 좀 좋아하는 평범 그 자체인 사람인데, 이런 얘기를 듣는 건 어째서였을까. 아마 개그 욕심 때문이 아닐까. 내가 유머 감각이 뛰어난진 모르겠지만, 개그 욕심은 상당히 많다… 그것이 아마 개성으로 인식된 것 같다. 그러니까 유머를 지닌 사람이 된다는 건 어느 정도 ‘특이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걸 각오(?)해야 할 것이다.
영국의 극작가 윌리엄 콩그리브는 유머를 이렇게 정의했다. 유머란 “언행이 남들과 차별화되게끔 만드는, 그게 뭐가 됐든 오직 한 사람에게만 특유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행하거나 말하는 독자적이고 불가피한 방식”이다. 그러니까 내가 던지는 농담은 나만이 던질 수 있다. 유머가 나의 고유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구사하는 방식의 유머를 다른 누군가가 한다는 것이 잘 상상이 가진 않는다. 어색하다. 대표적인 사례 하나를 이야기 해보고 싶다. 일전에, 프립이라는 취미 플랫폼 앱을 통해 그림 그리기 원데이 클래스에 참여했었다. 주제는 해바라기 그리기였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통성명을 하고, 나는 점잖게 해바라기를 그리다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제가 해바라기의 김래원 성대모사 보여드릴까요?”
함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 재밌겠다며, 한 번 들려달라고 했고, 나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이 띱때들아” 라고 외쳤다. 사람들은 많이 웃어줬고, 그 날 밤,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다. 이 일화 속에서 해바라기 성대모사를 보여주는 사람을, 나는 내가 아는 어떤 다른 사람으로 대입해도 상상이 잘 안 된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뜬금없는 제안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능글맞은 표정을 짓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뻔뻔하게 갑자기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으니, 영화 <해바라기>가 떠오르고, 그러니 김래원 성대모사를 해야겠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테리 이글턴은 윌리엄 콩그리브의 말을 받아 이렇게 설명한다. “여하간 여기서 핵심은 이제 희극적인 것이 특이한 것과 동의어나 마찬가지가 됐다는 사실이며, 이는 실제로 순수한 개성과 구별하기가 어려워졌다. 만약 유머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특정한 인격의 분위기를 뜻한다면, 모든 개인은 유머러스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좀 더 별나거나 이례적이거나 괴팍하다는 의미에서 남들보다 더 유머러스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내가 그렇다고 별나거나 이례적이거나 괴팍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쨌건 그렇다면, 사람을 웃기는 방식이라는 건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돌아와보자. 어떻게 웃길 것인가. 당신은 당신의 방식대로만 웃길 수 있다. 다른 누구의 방식도 아닌 당신만의 방식으로.
그러니까, 나는 성대모사를 한다. 웃기려고. 별로 똑같진 않다. 김래원도, 박효신도,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도,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얼굴 이경영도, 김응수가 연기한 <타짜>의 곽철용도, <암살>과 <관상>의 이정재도, <범죄와의 전쟁>의 최민식도, <헤어질 결심>의 박해일까지… 별로 안 똑같지만 하고야 만다. 사실은 그 꾸준함이 유머의 핵심이다…. 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것 같기도. N행시도 한다. 갑자기 눈에 띈 단어가 있으면 운을 띄워보라고 한다. 2020년 10월, 나는 박명수가 예능에서 우크라이나로 5행시를 지은 걸 보고, 친구들과 있는 단톡방에 우크라이나로 5행시를 지어 올렸다. 그래서 지은 5행시는…
우: 우리 토요일에 만나야지
크: 크으… 이게 얼마만이니
라: 라지 사이즈 피자 한 판씩 먹을까?
이: 이탈리아 스타일로 말이야
나: 나는 그런 거 좋아해
재미 없나… 그렇다면 하나 더… 2021년 2월, 친구가 아우디를 타고 다닌다길래, 나는 “아우디는 없지만, 아우디로 3행시는 지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지은 3행시는…
아: 아메리카노
우: 우리 한 잔 어때?
디: 디카페인으로^^
뭐 이런 걸… 한다는 것이다. 자랑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일 뿐. 이런 게 당신에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실은 나한테도 맞는지 모르겠다. 그냥 할 뿐이다. 산을 왜 오르냐면,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고. 나는 왜 이러냐 하면 이렇게 태어났고, 이렇게 하고 싶을 뿐인 것이다…. 움하하
웃기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머에 기본이 되는 태도라는 것은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경청이다. 사람들 얘기를 잘 듣고 분위기와 맥락을 잘 파악해야 한다. 어느 상황에서 어떤 농담을 ‘안 하는 것’도 중요한 유머 감각이다. 뜬금 없이 성대모사 하고, 갑자기 N행시 하고, 때론 함께 있는 사람에게 N행시를 시키기도 하는 내가 경청이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게 이상한 걸까 싶지만. 그것도 다 해도 되는 상황에서 하는 것이다. 경청을 잘 하고 있어야 틈을 파고 들 수 있다. 가만히 있어야 할 땐 가마니처럼 가만히 있을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약간의 뻔뻔함이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저 이상한 소리할 겁니다, 그냥 들어주세요. 우린 다 약간은 이상하잖아요’. 상처 주는 소리하고 미안해하지 않는 뻔뻔함과는 다르다. 그런 뻔뻔함은 없어도 된다. ‘우린 다 약간은 이상하니까, 그냥 내 이상한 소리 좀 들어달라’는 뻔뻔함엔, 다음과 같은 무언의 부탁도 담겨있다 ‘내가 좀 바보 같지만요. 넓은 마음을 지닌 당신이 저의 이런 면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세요’ 즉 타인에 대한 의존이 필요한 태도다.
기술적인 면에서 기본이 되는 것도 있다. 유머는 ‘억압에 대한 해방’이다. 그렇다면, 억압이 되는 규범을 위반할 때나, 논리를 뛰어넘는 부조화가 생성됐을 때, 유머가 작동된다고 할 수 있다. 농담의 경우, 언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과장법이나 반어법, 중의성을 이용한 언어유희, 점강법 등 전통적인 수사법들이 효과적인 농담을 만들어줄 수 있다. 의도적인 실수와 상황에 부적절한 말이 농담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상황에 부적절하려면 ‘잘’ 부적절해야 한다.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부적절한 말, 이건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선을 잘 타야 한다는 얘기다. 신성한 것을 세속적인 것이나 그로테스크한 것과 붙이는 것도 훌륭한 농담이 될 수 있다. 이런 태도와 방법을 숙지한 채, 적절한 위트와 순발력만 갖춘다면, 우리도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니다. 왜냐하면 슬랩스틱 코미디가 빠졌기 때문이다…. 는 농담이다. 교양있는 시민이라면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건 하지 말자. (꽈당)
사실 유머에는 스킬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사회학자 김찬호의 말이다. 어떻게 웃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할 때, 이 말을 반드시 기억하자. “유머 감각이 부족하다고 애석해하기 전에, 자신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의 속성과 맥락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 별거 아닌데 기꺼이 웃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가? 그들과 자주 시간을 보내는가? 천부적인 유머리스트들과 자신을 비교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애정과 존중으로 연결되는 관계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계, 가슴이 열려 있는 만남에서 웃음은 저절로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