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읽을 것인가
여러분은 혹시 “다독이냐 정독이냐”에 대해 논하는 유튜브 영상이나 글들을 본 적이 있는지? ‘다독이냐 정독이냐’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말할 때 자주 이야기되는 소재다. 궁금하면 구글에서 ‘다독이냐 정독이냐’를 검색해보시길. 관련 기사들과 블로그 글들이 쏟아져 나올테니. 그 쏟아지는 콘텐츠들을 보면… 나는 새삼 슬픔에 빠진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은 다독과 정독을 논하기 전에, 그냥 애초에 책이란 걸 안 읽기 때문이다. 독서율 역대 최저… 출생률 역대 최저… 자살률은 언제나 최고! 대한민국 만세! ^^ 하긴 그래도 팔릴 책은 팔리지… <세이노의 가르침>이나 <역행자> 같은 책들은 많이 팔리지 않나. 이런 시대에도 몇 십만부씩 파는 그들이 승자다. 세이노 만세! 자청 만세!
그래도 기왕 꺼낸 얘기, 이어가보겠다. 다독이냐 정독이냐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결론들을 낸다. 그중에 약간 클리셰 같은 결론 하나가 “많이 읽는 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고 칭송하는 빅데이터 전문가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과 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유튜브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방향 없이 무턱대고 많이 읽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마 맞을 것이다. 그러니 무턱대고 많이 읽는 걸 칭송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들 말고도 “정독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분명 있다. 그들은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한 권을 읽더라도 제대로 읽어야지. 많은 책을 읽는 게 뭐가 중요하냐”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의 의견을, 조심스레 덧붙여보고 싶다. 정독만큼 다독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아주 소심하게… 그러니까, 제대로 읽는 것만큼이나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다고. 그 이유에 대해 말하면서 롤랑 바르트나 피에르 뱌야르의 이른바 ‘개입주의 비평’이라는 아이디어를 빌려보고 싶다. 물론 롤랑 바르트도, 피에르 바야르도 정독이냐 다독이냐 같은 것에 대해 딱히 아무 얘기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롤랑 바르트의 아이디어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책은 작품이 아니라 ‘텍스트’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흔히 알려진 ‘저자의 죽음’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는 저자를 죽일 필요까진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도 사람이야. 생명이라고! 우리는 저자가 장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재밌게 읽은 책의 저자에게 홍삼 세트라도 보내도록 하자…. 아무튼, 우리는 책을 텍스트로 활용해야 한다. “정신의 새로운 맥락을 만드는 텍스트”로.
텍스트는 비유하자면, 일종의 레고다. 정신의 레고. 레고를 조립해본 일이 있는지? 레고는 똑같은 부품들이라도 조합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당신이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가정한 뒤, 아이들에게 개수도 똑같고, 모양도 똑같은 블록들을 지어줘보자. 그중에 어떤 아이는 비행기를 만들고, 어떤 아이는 자동차를 만들고, 또 어떤 아이는 강아지를 만든다. 나는 여기에 ‘책을 어떻게 읽으면 좋은지’, 즉 ‘텍스트를 어떻게 다루면 되는지’에 대한 힌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작품이 아니라 텍스트로 대하며 읽는다는 건, 내 삶의 맥락 위에 텍스트를 덧입혀 읽는다는 것이다. 자 그러니까, 어느 한 책을 읽는다. 그리고 완독을 한다. 아니 사실 완독을 안 해도 된다. 발췌독만 해도 된다. 당신 맘대로 하시길. 아무튼, 그때부터 우리는 이 책을 왜 샀는지 혹은 왜 빌렸는지, 내 손에 들어온 경위에 대해 기록할 수 있다. 그냥 끌려서,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그냥 읽고 싶어서 같은 건 없다. 내 욕망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 그 욕망의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심지어 ‘그냥 별 생각 없이 끌리는 것’에도 이유는 있다. 그 욕망에 언어를 부여해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기계발서 한 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조차도, 우리는 디디에 에리봉처럼 사회학적 언어를 통해 자신의 위치와 계급을 분석해볼 수 있다. 하지만 꼭 그런 수준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저 내가 이 책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했는지, 내가 지금 읽은 책이 이제껏 읽어온 텍스트들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 어떤 구절이 내 삶에 어떤 맥락을 형성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 사회는 어떻길래 이런 책이 출판되고, 이런 책은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를 이야기해볼 수도 있다. 김수영이 시를 온몸으로 써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온몸으로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능동적인 독서 아닐까. 자기 방식대로 수용하고, 자기 삶의 맥락 안에 편집하고 그럼으로써 삶을, 사유를, 정신을, 육체를 고양시키는 것. 이런 독서는, 내 몸 속에 더 많은 텍스트들이 쌓여 있을수록 더 풍부하게 이뤄진다. 같은 텍스트가 주어져도, 더 많은 텍스트가 새겨진 몸으로 읽으면, 더 많은 의미와 맥락을 형성시킬 수 있으니까. 즉 독서를 하면 할수록 더 넓고 깊은 세계가 펼쳐질 수 있으니까. 비슷비슷해 보이는 레고라도, 부품이 많으면 더 많은 가능성을 품을 수 있는 것처럼.
텍스트가 많이 쌓여야 같은 텍스트가 주어져도 더 풍부한 맥락 안에 위치시킬 수 있다. 그러니 다독이 필요하다. 하지만 제대로 독해를 하려면, 창조적 오독이든 뭐든 하려면, 나아가 피에르 바야르처럼 아예 작품을 다시 써버리는 방식으로 독서를 하려면, 깊이 읽어야 한다. 느리게 읽어야 한다. 텍스트를 ‘사용’하려면, 텍스트를 내 삶에 ‘작동’시키려면, 텍스트를 정확하게 꼭꼭 씹어먹어야 한다. 밑줄도 긋고, 메모도 하고, 별표도 쳐야 한다. 그래야 분해하고 해체하고 인용하고 편집하고 조립할 수 있다. 남이 쓴 글이 아니라, 내가 쓴 글처럼 다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분해, 해체, 편집, 인용, 조립의 독서다. 이런 독서를 위해선, 정독도 다독도 모두 필요하다. ‘제대로’,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내겐, 그럴 시간이 없을 뿐이다. ^_^ 여러분은 어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