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비 Jul 13. 2020

티셔츠는 사지 않을테지만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이본 쉬나드


그렇게 많이 속고 산 인생도 아닌데, 뭐든 의심하고 회의하고 의도를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유형이 된 지 오래라, 이 책도 역시 매의 눈으로 읽었다. CSR의 원래 의도와 상관없이 그런 척 해야 더 팔리는 걸 알게 된 기업들의 '그린 워싱' 전략일 거라 생각했다. 그게 훨씬 '기업다운' 거니까. 책을 다 덮고 난 지금도 완전히 팔짱을 다 풀게 된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기업가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진짜임을 믿는 사람들이므로 방향성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나의 시멘트같은 의심을 녹였던 건 책에 실린 사람들의 미소만큼은 그렇게 환할 수가 없었다는 것. 아아 이 모든 스토리가 진짜라고 믿고 싶어졌다.




아마 10년전,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기대하며 야간 엔지오대학원에 다녔을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아침마다 쌍차투쟁 소식을 신문으로 접하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나의 무기력함과 터지는 눈물을 참고 출근하던 시절. 모 교수님이 언제적 알린스키냐고 해서 깜짝 놀랐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을 읽고 모든 글에 밑줄 좍좍 치던 시절.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홍기빈 선생님의 '칼 폴라니 강좌'를 들으며 '자본주의라고 해서 모든 것을 팔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에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던 기억. 모교인 서울대에서 석좌교수를 하시는 대신 어찌저찌 성공회대로 오시자마자 여름방학 특강으로 무려 마르크스주의 경제를 가르쳐주셨던 김수행 교수님의 수업 중에, 진짜 너무 다 맞는 말이라서 나도 모르게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던 기억. 그러나 지금까지 내 인생은 한 점 변함없이 그대로다 안타깝게도.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어야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아직도 IPO니 엑시트니 기웃거리는 창업의 세계에 완전히 발을 들이지도 못하고, 또 다니던 회사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게 없는 줄 알면서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 관성의 세계를 벗어날 결심도 못한 채, 올해 상반기가 다 지나갔다. 내가 내 욕구를 알고 내 한계를 아는 데도 불구하고 내 인생의 키를 바꿀 결정을 정말 내가 내린 적이 있었을까. 언젠가는 정말 해야할 때가 올 것 같은데.




뭔가 새로운 챕터로 넘어가는 단계라 생각한다. 여전히 이런 이야기에 가슴이 울리고 뭔가를 하고 싶어지는 걸 보니. 아직도 기업이 뭔가를 바꿀 수 있고, 바꿔야 한다고 믿는 내가 여전히 순진한 건지, 아니면 한바퀴 다 돌아보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이제 진짜 뭔가를 할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다. 다만 환경운동을 하기 위해 회사를 경영한다는 저자의 말이 힌트가 될 것 같다. 기업이 상품일 필요가 없다는 말에도 설득됐다. 파타고니아는 진짜 회사였고 제대로 돈을 벌면서 평범함을 벗어나 기이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프로그레시브하다는 말이 어느새 순진한 찐따처럼 들리기 시작한 세상에서 '진보적인 가치'가 얼마나 간지나게 멋진 일인지, 그래서 따라하고 싶고 동참하고 싶은 가치인지, 그리고 악의 대명사같은 '기업'이 도대체 뭘 할 수 있는지 세월을 들여 보여준 창업자의 스피릿 덕분에 잠시 다시 마음이 여려졌다.

작가의 이전글 더 그레이트 테피스트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