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일잡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비 Feb 18. 2021

갑을 대하는 을의 자세

[호모 세일즈 저널] 이런 갑, 저런 갑

뜬금포 오프닝부터. 글을 안쓴지가 너무 오래 되었고, 요즘 독서모임이 자꾸 연기되니 공개해야 하는 글을 안쓰게 되고, 안쓰면서 사니까 마음은 편한데 점점 글을 쓰지 않게 되고 더더더 안써지는 악순환 속에서, 뭔가 감정도 무뎌지는 것 같고 아무리 코로나 시대라도 일상은 숨죽인 채 돌아가고 나는 매일 뭔가를 맞닥뜨리는데도 써지지가 않아서 갑자기 이슬아 서평집을 사서 오늘 읽어보니, 나는 그 동안 많은 것을 나중으로 미루고 있었고 좋은 문장과 저자의 세밀함을 영접한 후 충만한 마음으로 새 매거진을 열었다. 이른바 일간 이비잡문. 업무일지다.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귀찮아 하는 퇴고라는 부담감에 짓눌려 시작조차 안하고 있기에 스스로 그 돌을 치워주기로 하고 잡문이라는 중의적 대문을 달되, 대신 매일 자기 전에 오늘의 가장 특별한 감정과 일에 대해 기록해보기로 한다. 독자들(이 계시다면)께는 죄송하지만 이 매거진은 그냥 저의 삼십분 작문 연습용이니 충분히 감안하시고 읽어주소서. 되도록 가볍고 재미있게 쓸 것인데 혹 건질 것이 한 글자라도 있다면 너무나 기쁘겠습니다. 브-멘.



나는 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약을 팔고 거래처는 약을 사주니까. 하여 이런 저런 갑들을 매일 만나는데 요즘 전반적으로 갑들의 퀄리티가 좋아져서 예전처럼 분한 일은 (나의 짬과 더불어) 덜 겪지만 여전히 진화하지 못한 채 갑의 껍질을 들쳐매고 나같은 을을 족치는 데 희열을 느끼는 분들이 계신다.


오늘 그런 분을 간만에 만났다. 상당한 내공이 있으시다. 웃으며 내뱉는 상스러운 단어들이 그렇고, 나의 대응에 따라 본인의 공격성을 살짝 살짝 조절하는 것이 그렇다. 미안하지만 나도 이 바닥 밥은 십년은 족히 먹은 지라 눈은 '너같은 놈들 하루이틀 보냐'라고 쏴댔을텐데 내 입은 아유 왜 그러세요, 네네 저희가 잘 알아보겠습니다, 라며 서비스멘트를 미친 듯이 발사했다. 인지부조화도 트레이닝이 가능한 것 같다.


요는, 제품을 쓰다가 하자가 발생했고 본인 손님에게 욕먹고 AS를 해야 하는 것이 짜증이 나니 제조사인 너님들이 다이렉트로 에프터케어를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인데 하..... 하고 싶은 말이 천만개는 되었으나 첫마디를 떼면 이건 갑을 떼고 싸우자로 받아들일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잘했어 나님아. 시간 아꼈자나. 예전엔 이런 분들 앞에서 회사의 입장, 갑님의 고지 의무와 제품의 하자가 아닌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 가능성에 대해서 개념 정리를 해드리곤 했으나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내 말들이, 상대방이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어떤 역효과가 나는지 익히 알기에 일단 다음 기회를 노리고 일차 상담은 접수만 하고 철수하기로 결심.


미안한데 약이라는 게 너도 알겠지만 백퍼 언제나 같은 효과가 나는 게 아니야. 확률적으로, 통계적으로, 이론적으로 어떤 특정 범주의 환자들에게 효능이 있다는 거지, 부작용없는 약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적용대상이 매번 다른 조건을 가진 생체라고. 게다가 우리 제품을 써달라고 우리는 말하지만 이 제품을 선택하고 권하고 사용하는 건 너의 몫이고 효능과 부작용의 득과 실의 평가는 온전히 너의 전문성 영역이라는 건 왜 빼먹는 건데? 바르는 제품은 피부에 닿고 털이 빠질 수도 있다는 걸 너가 모를 리가 없을테고 발모제가 없다는 건 더 잘 알테고. 그럼 사전에 고지해야 될 의무가 나에게 있는 게 아니잖아? 근데 왜 나한테 그 환자 에프터케어를 미루는 거지? 너가 짜증나는 건 알겠지만 말야.


뭐 이런 내용이다. 사실 우리 둘 다 인지하고 있다. 근데.... 그냥 갑의 플레이를 하고 싶은 분이라 그의 억울함을 생각해서 나도 이 스테이지에선 충분히 을의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죄송하다 미안하다, 제품에 고지는 되어 있지만 그쵸, 매우 글자가 작죠(그렇게 작진 않다 사실). 얼굴 가득 미안함을 담고 회사 월급이라는 걸 받기 땜에 이렇게 너한테 혼나고 있잖아를 온 몸으로 보여주며 삼십분쯤 버티면 상대방도 충분하다 느꼈을 즈음 다음 방문을 기약없이 약속하며 일어선다.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아 미안하다는 듯이.


그가 원하는 건 명백히 재무적인 결정이지만 내가 제안한 옵션을 일단 거절한다. 오케이. 넌 그럼 시간만 버리게 될 거야. 이것도 너의 선택이니까. 내가 너라면 이 네고를 빨리 끝내고 다른 일을 하겠지만, 넌 충분히 괴롭힐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네. 이런 타입들이 실은 가장 돈을 밝히는 놈들이라는 걸 잘 안다. 없어서가 아니다. 이래야 한다고 믿는 그의 신념인 거라서. 바보야, 돈은 시간이라구. 이디엇. 속으로 생각하며 인사를 꾸벅하고 나온다.


하필 눈이 펑펑 쏟아지고, 갑한테 을질을 실컷 당하고 나니 여러 생각도 쏟아진다. 팀장한테 보고하겠지만 결국 이 건의 종결도 내가 제안해야 하는데, 어느 선에서 마무리 해야 하나. 아 대체 왜 저러고 사는 거냐 싶은 맘과, 현장에서 돈버는 게 그래 어렵지 하는 맘이 뒤섞인 채 나는 머리를 한 번 세차게 흔들고 다음 거래처로 발길을 돌린다. 오늘도 밥값은 한 것 같다. 배터지게 욕 먹었으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