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들어서 나의 생각패턴에는 과도한 자기 연민이 녹아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깨닫게 된 계기는 나보다 더 강한 자기 연민에 빠진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난 후였다.
친구와 대화를 하고 나면 늘 답답함을 느끼고는 했는데, 나는 그 이유가 단순히 친구의 공감능력의 부재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더 파고들어 보니, 우리의 대화 속 문제점은 서로를 향한 공감능력의 부재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라 서로의 과도한 자기 연민에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대화패턴은 이랬다.
‘나 이러이러해서 힘들어’라고 먼저 친구가 힘듦을 털어놓는다.
그 순간만큼은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된다.
나는 힘껏 그에게 공감해 주고, 나의 힘듦을 나누었다.
그러면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건 힘든 것도 아니야, 더 힘든 사람들도 많아’라고 받아치고는 했다.
그리고 대화의 주제는 다시 친구의 힘든 일로 넘어가고는 했다.
마치 창과 방패의 대화처럼, 우리의 대화는 늘 겉돌기만 했고 대화 후 나는 마음속 찜찜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서서히 내 마음을 그 친구에게 털어놓는 걸 멈추기 시작했다.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되고, 그걸 계속 공감해주자 대화 속에 평화가 찾아오고 나는 더이상 섭섭함을 느낄 일이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공감능력의 부재나 이기심이라기보다는, 친구는 자기 연민으로 인해 나의 힘듦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패턴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사람과 나누는 나의 대화 속에서도 은근히 이런 면이 묻어나와서였다.
나도 언젠가부터 그런 식으로 행동을 했던 것 같다.
겉보기에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덜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내심 속으로 ‘저게 뭐가 힘들다고’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는 했으니까.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은연중에 내 속마음이 내 언어 속에 묻어 나왔을 것이다.
본인의 어려움만 크게 보이는 친구의 모습과 나의 힘듦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던 나.
둘 모두 서로가 세상에서 스스로가 가장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서로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 섭섭해했던 거겠지.
과도한 자기 연민으로 인해 내 손에 박힌 작은 가시가 너무 크고 아프게만 느껴져서, 다른 사람의 가슴에 꽂힌 칼 같은 힘듦을 보지 못한 거겠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가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내 가시에만 매몰되어 그를 외면하고는 했었다.
나만 내 마음에 가득해서, 가시가 박힌 정도의 상처에 죽어가는 사람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내가 가지지 못한 1이 너무 커 보여서, 그가 가지지 못한 100이 보이지 않았다.
겉보기에 사소한 가시처럼 보이는 그의 힘듦 이면 뒤에 어떤 큰 상처가 숨어있는지 모르면서, 나는 멋대로 내 잣대로 그의 아픔의 크기를 재서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감히 이해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그의 아픔을 내 멋대로 재단해 버렸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내가 불행을 느끼는 이유가 그에게는 없으니까 당연히 그의 삶에는 힘든 게 없다고만 생각했다.
내 아픔만 너무 커 보여서, 내 삶에 주어진 당연하지 않고 감사해야 마땅한 것들을 잃어버렸다.
과도한 자기 연민이 갉아먹는 건, 내 삶 속에 감사함이기도 하다.
자꾸 가지지 못한 것, 불행만 곱씹으며 내가 가진 것과 주어진 행운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나도 사람이기에 모두의 힘듦을 내 힘듦보다 우선시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 힘든 것에만 매몰되어 남들의 고통을 깎아내리는 건 멈추기를.
그들이 겪는 고통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아픔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헤아려보는 시도정도는 해보는 사람이 돼보기를.
나를 서서히 갉아먹으며 좀 먹는 자기 연민.
나를 향한 공감은 그 무엇보다 필요하지만, 자기 연민은 서서히 비워내야 할 숙제이다.
주위에 지금 당장 굶어 죽어가는 이들을 보면서도 내가 누리지 못한 비싼 레스토랑 때문에 그들을 무감각하게 보는 일이 없어지기를.
그들의 고통이 나의 더 누리지 못함 때문에 사소해 보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