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쉴새없이 빗물을 걷어내던 와이퍼가 무색할 정도의 폭우가 발목을 잡았다. 더구나 우중 출판기념회에 몇 명이나 올까 하는 걱정도 앞섰다. 대전으로 내려가는 내내 비는 계속되었고, 암 선고를 받았던 그때처럼 앞은 보이지 않았다.
김영호 문학평론가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암세포가 뼈로 전이되어 표준치료는 불가능합니다.”라는, 사형선고 같은 의사 말을 듣고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던 2년 전 그때였다. 김성동 작가가 폐암으로 입원했는데, 함께 병문안을 가자는 것이었다. 『미륵뫼를 찾아서』를 비롯한 두 권의 책이 계약한 출판사 사정으로 출간을 못하고 있으니 작은숲에서 출판해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2012년 『염불처럼 서러워서』로 인연을 맺은 후 『눈물의 골짜기』, 『작가가 살려쓰는 아름다운 우리말 365』 등을 낸 상태였고, 고향 후배라는 인연으로 엄했지만 살갑게 대해 주셨던 작가였기에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할 수는 없었다.
“얼마 못 사실 것 같아. 강 대표가 맡아 주었으면 하시는데… 강 대표에게 출판을 맡겼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니 밥도 못 자시는 양반이 총기가 또렷해져 이것저것 당부가 많으시네.”
“제가 직접 작업하지는 못하더라도 출판될 수 있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암에 대한 공포가 심했던 상황에서 수락도 아니고 거절도 아닌 애매한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상을 일시 정지한 후 치병을 위해 내려갔던 영동 숲에서 김성동 작가의 소천 소식을 들은 것은 일주일 후였다. 일상으로의 복귀를 꿈꾸며 매일 2만 보 이상 걸었고, 어설프지만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 결과 운 좋게도 암세포가 사라졌다. 일상으로 복귀해도 좋지 않을까 하던 작년 이맘때쯤 김성동 작가 1기 추도식에 참석했다. 그때까지 어느 출판사에서도 출간되지 못한 『미륵뫼를 찾아서』를 작은숲에서 출간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렇게라도 마음의 빚을 덜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손으로 직접 쓴 2024매에 이르는 원고를 직접 타이핑해야 했고(출판사에서 받은 원고는 작가가 직접 손으로 쓴 것을 작가와 갑장인 양평의 윤형로 선생이 타이핑해서 출력한 종이에 작가가 직접 손글씨로 교정을 본 것이었음) 모든 페이지마다 주석을 달아야 하는 순우리말에다가 엄청난 양의 한자. 그때 몸 상태로는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다. 원고 교정과 조판을 기꺼이 수락해 준 소종민 문학평론가 식구들과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교정을 봐주신 김영호 문학평론가 덕분에 책을 출판할 수 있었건만, 2주기 추모를 겸한 출판기념회 있는 날에 폭우가 내릴 줄이야.
몸이 회복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먹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먹고 옛날처럼 출판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옛날 일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옛날 일상은 나를 유혹한다. 맛있는 것에 대한 욕망, 세상에 대한 욕심, 나를 스쳐간 많은 인연들. 그 일상의 유혹을 하루하루 견디며 매일 맨발로 걷고 있다. 옛날 일상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일상을 살려 노력한다. 맨발로 걷고, 채식하고, 몸을 움직이는 일을 늘이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매우 단조로운 일상을 살고 있지만 고맙고 행복하다. 김성동 작가에게 남은 마음 빚 일부라도 갚을 수 있는 건강을 허락함에 감사한다. 이젠 버럭 호통 대신 고맙다며 살짝 웃어주시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