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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 Dec 30. 2022

기다림의 미학 '뻗치기'

겨울이면 떠오르는 재밌는 추억

날이 춥다. 아침 출근길에 느끼는 찬 공기는 비몽사몽 한 정신을 또렷이 깨운다. 두꺼운 옷로 혹한을 막아보지만 역부족이다. 옷 틈새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걸음 빨라진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끼는 순간이다.


겨울이면 매번 취재 현장이 떠오른다.

푸르스름한 겨울 공기 속에서 패딩과 장갑, 핫팩으로 무장한 기자들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취재원을 기다렸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지만 지루하 않았다. 지루함보단 현장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감과 압박이 더 컸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영상을 찍는 주체도 아닌 계약직 신분의 보조일 뿐인데도 영상기자 Y선배만큼이나 현장 분위기에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취재를 위해 특정인이나 상황을 기다리는  '뻗치기'라고 한다. 취재는 이 '뻗치기'에서 시작한다. 장소는 다양하다. 피의자가 소환되는 검찰청, 체포된 용의자가 이송되는 경찰서 앞일 수도 있다. 정치인이나 계 인물의 경우 집 또는 회사 앞에서 취재진들이 진을 치는 일도 있다. 이슈 중심에 놓인 일반인도 마찬가지다.

8년 전, 조출 근무를 위해 새벽 일찍 출근하던 어느 겨울날.

기자들은 멘트 하나, 영상 한 컷을 위해 계속 기다다. 


이때 뻗치기를 하는 기자들을 보는 시민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호기심을 갖고 무슨 일인지 물어보 경우. 주변을 서성이다가 슬쩍 물어본다. 이 분들은 기자들에게 새로운 소스를 제공하는 정보원 역할도 한다.


두 번째는 시끄럽고 통행에 방해된다면서 항의하는 경우다. 대체로 취재장소가 주택이나 아파트 단지일수록 많이 볼 수 있다. 신들의 사적 공간에 자리를 차지하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불만 섞인 목소리들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자들 보이지 않는 포토라인을 설정해 질서를 유지했다. 때론 풀단을 꾸려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로테이션 돌릴 때도 있었다.


뻗치기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기온이었다.  여름과 겨울이 가장 힘들었다. 취재 대상자나 어떤 사건이 나타날 시점까지 기다려야 하는 장소는 대부분 야외였다. 그래서 기온에 따라 컨디션이 오락가락했다.


특히 겨울 뻗치기는 정말 고됐다. 추위에 손은 무감각해지고, 얼굴은 칼에 베일 듯 아팠다. 여름은 시원한 물 한 모금이면 컨디션이 괜찮아졌지만 겨울은 답이 없었다. 몸을 녹이기 위한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금세 아이스로 바뀌었다.

 

땅콩회항 사건으로 조현아 前부사장의 국토부 소환 때가 정말 힘들었다.  당시 조출이었는데 교대 근무자들 없이 조사가 끝나는 저녁 늦은 시간까지 야외에서 계속 뻗쳤다. 오후에 교대될 줄 알고 내복도 안 입고 장갑도 안 챙겼던 게 실책이었다. 보도차량에서 대기할 수도 있었지만, 언제 어떻게 상황이 바뀔지 모르는 상황에서 맘 편하게 있을 수 없었다. 풀단이 꾸려졌지만 위치풀이었기에 주변을 서성이면서 상황을 주시했다.

땅콩회항 사건 국토부 진상조사를 받고 돌아가는 조현아 前부사장. 이날 뻗치기는 강추위속에서 이뤄졌다. 손발이 꽁꽁 얼었던 하루.
긴급체포된 살인용의자가 새벽에 경찰로 이송되는 현장. 경찰서 안에서 대기했음에도 추웠던 기억이 난다. 그나마 풀단이 꾸려져서 2~3시간 정도 기다렸다.

취재 현장은 정적이면서도 매우 동적이다.

뻗치기 할 때는 조용하던 현장이 상황이 닥치면 갑자기 역동적으로 바뀐다. 트라이포드 접는 소리, 카메라 들고뛰는 기자들의 발소리와 질문 소리가 어우러진다. 개인적으로 뻗치다가 긴장이 느슨해지는 순간에 찾아오는 급박한 상황은 꽤나 스릴 있었다. 그리고 따분한 표정을 보이던 기자들이 금세 진지하게 바뀌는 순간은 멋있다고 느꼈다.


남들은 득 될 게 없다 말하는 오디오맨 경험이 나에게 소중할 수 있었던 요소 중 하나는 '뻗치기'였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사고의 중심에서 역사의 흐름을 직접 보고 듣고 느꼈다. 기다리는 시간 동안 선배들과 대화하면서 더 가까워질 수 있었고, 고된 현장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인드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융통성도 키울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값진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뻗치기가 떠오르는 겨울이다. 내년 이맘때쯤에 또 생각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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