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좋은 부부싸움
연애하듯 하는 사남매 부부의 관계노하우
참으로 오랜만에 '부부들끼리의 대화시간'을 가졌던 주말이다. 우리는 딸린식구도 원체많고 시국도 시국인만큼 더 부부사람들과 소통하기가 쉽지 않은 이 때 이웃이 집에 초대를 해준다. 그곳엔 내가 좋아하는 거의 모든 것이 다 있다. 좋은 사람, 맛있는 스테이크와 와인, 서로 어울려 잘 노는 아이들, 그리고 '진짜 사람사는 이야기'. 참 행복했고 '이제야 사람사는 것 같다'고 느낀 한편 안하던 짓을 한 것에 대한 심한 후유증을 앓았다. 토요일 늦은 귀가 후 일요일 하루를 통째로 회복하는데 쓰면서 '아,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 이렇게 이벤트가 되어서는, 피곤해서 피하고싶을 만큼 습에서 벗어나서는 안 될일인데' 라고 다시 바이러스 시대를 개탄한다.
코로나야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일상의 안일함에 젖어 그 좋아하는 '부부수다'를 귀찮아하는 내가 되지는 않도록 경계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우린 아이들 교육얘기부터 미국이민 이야기, 집에 대한 이야기, 각 아이들 이야기, 결혼생활 이야기, 일상에서 웃겼던 에피소드에다, 종교이야기까지 장작 10시간이 넘도록 수만 이야기를 장르불사하고 쏟아냈다. 이 많은 이야기들의 끝 결론은 기승전 '부부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이것 풀어내면 만사형통이라는데 의기투합했다. 우리는 연애하듯 사는 부부로 살면 재x없다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는 세상이지만, 흔들리지 말고 이 우선순위를 잘 지키다가 지칠때쯤 또 만나 의기를 투합해 보자며 겨우 헤어졌다.
남편의 책상위에는 내가 권해주고 내돈내산으로 사다 준 책이 며칠째 계속 펼쳐져 있다. 정신의학전문의 박성덕의 책 '당신, 참힘들었겠다' 부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 그에게 귀감이 될 좋은 책으로 골랐던 이 책을 다시 훑어보며 어제 일상에서 나누었던 이야기와 책을 겹쳐본다.
아내가 지난밤에 있던 일을 자세히 물어 지녀가 곁에 있었다고 대답하니 크게 화를 내고 욕하고 꾸짖었다. 아참에 이부자리와 베개를 칼로 찍고 불에 태워버렸다. 두끼니나 먹지 않고 종일 투기하며 욕하니 지겹다. ' --- 1522년 10월 2일 묵재일기의 일부.
이 부분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 이 통쾌함은 '역시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늙으나 젊으나 시대를 막론하고 비슷하다는 사실, 부부싸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하고 사는 거구나에 대한 인류보편적 안심이 동시에 느껴져서다. 거기에 더 중요한 사실은 나의 깊은 심연이 '옳지!! 이게 제대로 된 사람관계지!'라 무릎을 치게 하는 본질 통쾌 감각.
지난주 글벗님의 어떤 글 한편이 뇌리에 계속 남아있다. 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권태기를 겪던 부부가 속에 있던 말을 드러내자 이게 곧 생각보다 큰 싸움이 되었다. 그런데 한바탕 싸우고 나니 그렇게 꼴보기싫었던 남편이 다시 좋아지고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권태기 이전으로 돌아가 잘 지내고 있다는 지인을 상담해주신 내용이었는데 글벗들은 각각의 경험담과 이를 접목해 '너무나 이해가 된다' '겪어보니 내 얘기였다' 등으로 쏟아졌다. 필사를 하면서 내가 느낀 '올바른 싸움' '질 좋은 부부싸움'이 주는 통쾌함은 우리네 삶속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인 권력, 문벌세족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인 '유교사상'의 흔적이 이렇게 남아 현재의 부부관계의 본개념을 흐트러놓았다 한다. 사실을 책을 통해 알고 나니 지금시대를 사는 부부들이 겪는 고충이 더 이해되기도 했다. 이들을 또 나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게 되고 부부관계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잘못만은 아니예요' 에 덧붙일 근거있는 스토리를 하나 더 알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우리는 부부관계의 잘못된 표상 유교식 부부관계를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올바른 부부관계 중심'으로 관계 우선순위만 정리되면 다른것은 모두 저절로 풀리는 경우가 많다. 일은 그대로라도 마음이 풀리기 때문에 그 대상이 더이상 문제의 대상이 되지 않거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만으로도 문제의 해결이라고 본다면 '세상 그 어떤 일 앞에서도 두려울게 없는 존재'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배우자의 참된 역할이 아닐까.
지난 10년을 모든 것이 부부중심인 관계성에 잘 배열되어있는지 내 자신을 검열하는데 다 썼다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모든 우선순위를 남편에 두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것은 내가 강한 의지가 있어서도, 대단한 생각이 있어서도 아니다. '내가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 절대 놓칠수 없는 가치임을 서른살이 될때까지 처절하게 배웠기 때문이다. 아픈 유년시절은 '나의 완전한 가정과 행복을 위한 밑거름'이 될꺼라는 믿음만으로 그 시절을 견뎌냈다. 그리고 기대했던 결혼이란 현실은 이상보다는 더 곱절 힘든일이 많았지만 믿음만큼은 절대 저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완전한 부부관계'를 위한 노력인지를 가늠해서 아닌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맞는 것에만 촛점을 맞추고 결혼생활 10년을 살았다.
그랬더니 드디어 내가 원하는 만큼은 완벽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나로 마흔을 맞이했다.
그 사이 우리도 꽤나 많이 싸우고 힘든 시절을 누구못지 않게 겪어내는 과정에서 그의 마음고생은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건재할 수 있는 건, 나를 드러내느라 정신을 못차리던 시절에 묵묵히 존재자체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 유효했던 것이 아닐지. 여전히 그의 마음이 착한 온도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은 촉끝까지 깨어있으려 노력한 것, 서로에게 깨어있는 존재이면서 이 관계속에 극치의 편안함이 공존하는 것 부부만이 할 수 있는 특수 인간관계가 아닐까.
제우스신이 원래 '완벽하게 자존,자족하던 자웅동체였던 인간을 남, 녀로 갈라 지구 속에 랜덤으로 뿌려놓았다는 부부관계. 반쪽이라는 개념도 이렇게 나온 것일텐데 이렇게 '나의 반쪽임'을 내 영혼이 알아채고 만난 사이가 부부사이일테다. 그런데 지금 우리 반드시 꼭, 내 자리 나의 배우자를 돌아볼일이다.
내 우선순위가 완전히 그에게 맞추어 살았던 때가 있는지.
그 사람이 나에게 잘 안해주니까..라는 말대신 내가 먼저 내 영혼의 반쪽에게 '최선을 다한 노력'을 하고 살아 왔는지. 말이다.
애착대상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반응이라 한다.
그러나 비극의 시작은 부부가 서로 '내가 먼저' 받기를 상대에게 바라고 있기 때문에 시작된다고. 이것을 먼저 해주는 게 어른이라면 그런 면에서 우리집 큰 어른이 바로 남편이었던 것이다.
내가 좋은 시스템이 있는 가정을 만들리라는 목적만을 향해 돌진하던 때 내가 맞으니 나를 무조건 따라달라고 우겼던 모든 나의 어리광을 감싸안고, 인내하면서 나를 채워주느라 자신의 빛을 거의 다 써버린 그다. 지난 결혼생활동안 네 아이를 출산하고 키우는 악마의 시간 동안 내가 어른노릇을 한 부분도 분명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공동 시작점에서 존재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기에 그 나머지는 모두 내가 채워도 억울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지켜주겠다고' 한 약속 그 바탕에 서서 부부관계에 애정을 쏟은 그에게 내가 바득바득 그렇게 들이밀면서 우겨대던 결혼전 10가지 계약조항도 이제는 의미가 없다. 어려운것을 먼저하면 그게 바로 어른이다.
네 아이의 폭풍우를 잘 견디고 나면 10년후 쯤이면 다시 오롯이 그저 그와 내 존재만이 남을 것이다. 오롯이 다시 두 존재로 남았을 그때, 지금보다 더 단단하고 더 서로를 존중하며 영혼의 반쪽으로 빛날날들이 기대된다.
어제밤 '왠지 모르게 우울하다'했던 그를 아이들보다 먼저 자도록 허락해 주는 것, 이 정도는 여유있는 내가 됐다. 그리고 진짜 그를 위하는게 무엇일까? 나의 중심축에 두고 자주 고민하는 내가 됐다. 전에는 '우리가정 시스템을 위한 형식'적인 고민이었다면 이젠 오롯이 그의 존재라는 과녁에만 집중된 진심이다.
너무 늦지 않아 다행이고 그가 많이 슬퍼하지 않아 한시름 놓는다. 그렇지만 역시 안일해 하지 않고, 그의 무한애정이 담긴 사랑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내가 대접받고 싶은 모습으로 이 사람을 대하고 있는지, 다시 영점초첨을 맞춰본다.
그리고 내 주위 사랑하는 지인들이 모두 이런 '건강한 부부관계'가 있는 모습으로 채워가고 싶다. 완전한 부부관계로 끝까지 살아 이 영향력을 전파하며 사는 일,
내가 지구별로 온 진짜 이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