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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피형아 Mar 05. 2021

#1. 1997년 11월 28일

1화 1997년 11월 28일




열일곱 소년은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었는가? (원제)



1997년 11월 28일, 여느 때처럼 나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SBS 충전 100% 쇼 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년에 중학생을 바라보던 내게 공부보다는 연예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비디오로 빌려보는 영화를 더 좋아했다. 그때 나의 우상은 H.O.T. 였다. 어린이에게 무슨 우상이 있느냐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랬다. 어쨌든 그때, H.O.T. 는 붉은색의 벨벳인지 실크인지 정확히 모르겠는 옷을 입고 나왔었고 어른들의 위선과 청소년들의 꿈과 희망이 무엇인지 포효하는 노래 위 아더 퓨처로 활동 중이었다. 그때 문희준이 신인이라면서 S.E.S. 를 소개했었고 어렸던 나는 그렇게 세 명의 요정들에게 넋을 잃었었다. 정확히 데뷔부터 나는 S.E.S. 를 열렬히 응원하며 좋아하기 시작했다.

서점에 매달 나오는 아이 러브 스타부터 틴스타, 토마토 같은 연예 잡지를 모으기 시작했고 부록으로 주던 대형 브로마이드 모으기가 참 쏠쏠했다. 그렇게 중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핑클이라는 네 명의 여자들이 데뷔를 했다. 여자의 마음만이 갈대는 아닌 것처럼 남자의 마음도 갈대였는데 그렇게 S.E.S. 를 지지하던 내 친구들 중 나만 빼고 전부 핑클로 갈아타 버렸다. 나는 정말 심한 배신감을 느꼈는데 다행스럽게도 여자 친구들의 80%는 여전히 H.O.T. 를 좋아하고 있었다. 왜 다행이었냐면 H.O.T. 와 S.E.S. 는 같은 소속사인 SM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S.E.S. 가 처음 나왔을 때 동네의 H.O.T. 팬이던 누나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욕을 해댄 적이 있다. 이해가 안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이해가 되었다. 오빠들과 같은 소속사라니, 나이도 비슷한데 혹시라도 오빠들에게 꼬리 치지는 않을까? 뭐 그런 생각? -_-ㅋㅋ 그런데 라이벌이던 젝스키스의 소속사 대성기획(그때는 이름이 DSP가 아니라 대성이었다)에서 S.E.S. 를 겨냥해 만든 핑클이 나왔으니 S.E.S. 는 자연스럽게 H.O.T. 팬들에게 보호(?)를 받기 시작했다.


나는 응답하라 1997의 시원이가 그랬던 것처럼 젝스키스가 나오는 프로그램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고 핑클이 나오는 건 더더욱 쳐다보지 않았다. 친구의 집에 놀러 가서도 채널에 대성 소속사의 가수들이 나오면 정말 시원이의 그 대사처럼 "대성은 안돼"라고 못을 박았으니까 -_-ㅋㅋ 덕질을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신세계이자 이해라고는 1도 할 수 없는 세상이겠지만 덕질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지금쯤 웃고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다. 친구들에게 매일 S.E.S. 욕을 듣고 살았지만 그때마다 같은 반이던 여자 친구들은 전부 나를 보호해줬다. 핑클을 욕해주면서 말이다 >_<ㅋㅋ 그때는 휴대폰과 삐삐가 함께 공존하던 시대였고 인터넷과 모뎀이 공존하던 시대였다. 우리 집은 천리안이었는데 학교에 다녀오면 밥도 먹지 않고 부모님 방에 있던 컴퓨터 전원을 켠 뒤, 천리안을 접속해 S.E.S. 팬들이 모여 있는 라페(L.A.F.E)에서 살다시피 했다.

출처: 구글

그게 참 재밌었고 행복했다. 서로 얼굴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데 S.E.S. 의 팬이라는 이유로 그 인터넷 동호회에 모인다는 게 신기했다. 우리 집은 아직 모뎀이었는데 십만 원이 넘는 전화비가 나와서 아버지에게 두드려 맞은 기억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그때의 우리 아버지는 정말 무서웠다. 아버지의 구두 소리만 나도 벌벌 떨었으니까 >_<ㅋㅋ 공부를 굉장히 잘해서 대기업에 다니시던 아버지에게 두드려 맞으면서 공부를 했다. 그 결과 나는 수학과 과학만 빼고 특히 영어는 항상 상위권이었다. (수학과 과학이 평균을 깎아먹었지만) 그런데 아버지가 정말 아이러니했던 게 공부를 못하거나 안 하면 엄청 혼을 내셨는데 내가 S.E.S. 를 좋아하고 따라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건 정말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이러니하다.


뭐 그렇다고 내가 좋은 대학교를 들어갔거나 좋은 직업을 가지게 된 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 뜻대로 그 삶을 맞이하는 건 아닌 것 같다) 1998년, 더 정확히는 1997년 S.E.S. 가 데뷔한 그해. 그때는 인터넷도 크게 보급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내가 어렸던 지라 팬클럽이라는 문화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연예 잡지를 통해 S.E.S. 공식 팬클럽 <친구>의 사서함 번호를 알게 되었다. 152-5252. (5252는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나의 모든 아이디와 결합된다) 너무 어려서 1기가 있는지도 몰랐었고 2기는 혼자 무슨 깡이었는지 제일은행에 가서 입금을 했었다. 당시 6개월 기준 회비로 만 5천 원이었는데 세기말에 만 오천 원이면 꽤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사실 말이 6개월이지 앨범 활동만큼 채워진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나는 자랑스러운 S.E.S. 의 공식 팬클럽 <친구> 2기가 될 수 있었다. 그때도 어렸던 지라 팬클럽만 들었고 일명 공방(공개방송의 줄임말)을 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S.E.S. 의 3집 <LOVE>가 발매되면서 컴백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이미 나는 <친구> 3기였다. 딱 한 번 공방을 가봤었고 3집 활동이 끝난 뒤, S.E.S. 는 올림픽 역도경기장에서 <친구> 3기 공식 팬미팅을 가지게 되었다.

출처: 다음

그때는 나의 베프와 함께 갔었는데 공식 팬클럽의 팬들이 전국에서 모이는 자리라 감회가 남달랐다. 3천 명 정도 왔던 걸로 기억하고 나와 같이 갔던 친구는 사실 <친구> 유료 회원이 아니었다. 그냥 슈를 좋아하던 친구였는데 도저히 혼자 갈 용기가 없어서 뭣도 모르고 그냥 데려갔던 것. 그런데 그 당시 입장을 할 때 경호원이었나? 아니면 당시 공식 팬클럽의 임원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친구는 <친구>가 아니어서 당연히 입장이 안 될 줄 알았건만 내가 <친구>이니까 들여보내 주었다. 그때 나는 역도경기장 안에서 누나들의 수많은(?) 공식 팬클럽 회원들과 한마음이 되어 생전 느끼지 못했던 카타르시스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열다섯은 설렘 그 자체였다. 나의 열다섯은 여전히 여자 친구들의 지지와 보호를 받았고 핑클로 갈아탄 내 친구들의 질타에 나를 보호해주었으며, 내 방에는 어느새 틴스타를 포함한 여러 연예 잡지들이 너덜너덜한 채로 책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잡지가 너덜너덜했던 이유는 H.O.T. 팬이던 여자 친구들을 포함해 신화나 젝키, 핑클 등의 팬이었던 친구들을 한 장씩 찢어서 나눠주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열다섯이란 페이지도 점점 채워져 가면서 2000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99년 12월 31일, MBC 가요대제전을 보면서 나는 나의 열 다섯 시절을 과거에 흘려보냈고 조금은 두렵기만 한 열여섯을 만날 준비를 했다. 이때가 아주 정확히 기억나는데 4집 아이야로 인기의 절정이 하늘을 뚫어 우주까지 솟아 올라 주체할 수가 없었던 H.O.T. 가 무려 자정에 단독 무대를 꾸몄던 걸로 기억한다. 장충체육관을 가득 메운 Club H.O.T. 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명한데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혁명이었다. 모든 가수들이 무대를 채운 가요대제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에 아홉은 전부 H.O.T. 의 팬들이었으니까. 그 인기는 그야말로 주체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젝스키스를 라이벌로 얘기했지만 현실은 정말 범접할 수 없는 그 자체였다. 1999년 12월 31일에서 2000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H.O.T. 가 단독 무대를 꾸몄고 카운트다운 숫자가 화면에 같이 잡히기까지 했다. 조금은 웃기면서도 슬펐던 게 H.O.T. 의 무대만 팬들의 함성 소리를 집어넣지 않았다. 팬들의 숫자가 워낙 많았고 그 함성 소리가 노래 자체를 묻히게 할 정도의 크기여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나 싶다. (원래 그런 무대는 팬들의 함성 소리 듣는 재미가 쏠쏠한데) 어쨌든 나는 그렇게 세기말을 보냈고 새천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의 새천년은 조금 아쉽고 서러운 해였던 걸로 기억한다.


여름쯤 SM에서 만 13세의 솔로 여가수 보아가 데뷔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SM과 H.O.T. 팬들을 포함한 S.E.S., 신화의 팬들에게도 거의 격동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정말 그때는 인터넷 보급도 막 시작될 때였고 휴대폰 역시 보급이 막 되었던 시기여서 루머들이 양산되는 곳들은 거의 제한적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웃기기 그지없는데 그때 보아가 데뷔했을 때는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온갖 루머가 떠돌아다녔다. 뭐 어쨌든 그때는 미니 앨범이나 싱글 앨범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무조건 정규 앨범으로 활동하던 시대였는데 S.E.S. 의 공백 기간이 무려 1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거의 프로젝트급이었던 보아의 데뷔 때문인지 S.E.S. 의 4집 컴백도 굉장히 늦어졌던 게 사실이고 플라이 투 더 스카이에 대한 지원도 뭔가 시원찮다고 느꼈으니까. 나의 열여섯은 거의 앙상한 나무만이 있는 추운 겨울 같았다. 그렇게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2000년 말이었나? 2001년 1월 초였나? 드디어 누나들의 4집 앨범이 발매되었다. 4집 컴백 전, 역시나 152-5252 공식 사서함을 통해 알았던 <친구> 4기 역시 이미 가입을 한 후였고 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모든 준비를 끝냈었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데 4집 앨범 발매는 컴백하기 전 먼저 교보에 진열되었고 중계동에 살고 있던 나는 15번 버스를 탄 뒤에 수유역에 있는 교보문고를 찾아 '그린란드에서 온 편지'라는 타이틀의 4집 앨범, 따끈따끈한 CD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출처: 다음

누나들의 컴백이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나 역시 어느새 열일곱이 되어 있었다. 2001년 1월 15일 일요일, SBS 인기가요를 통해 컴백 무대를 가진다는 소식을 공식 사서함을 통해 듣게 되었고 아직도 기억나는데 할머니와 함께 다니던 교회에서 공과 공부를 몰래 빠져나온 뒤, 혼자서 나는 그 먼 발산역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가방에 있는 거라고는 <친구> 4기에 가입했다는 입금증 하나뿐이었다. 회원카드가 오기 전이어서 입금증을 항상 가지고 다녀야 했다. 그게 곧 회원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니까. 열일곱의 나는 같이 갈 친구도 하나 없이 무작정 등촌동 공개홀로 향했다.

출처: 다음

그렇게 어렸던 아이가 어떻게 혼자의 힘으로 그 먼 곳까지 가게 된 건지는 지금 생각해도 대담한 것 같다. 당시 공방 좀 뛰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등촌동 공개홀은 5호선 발산역에서 내린다고 해서 바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는 가양역도 없었고 가장 가까운 곳이 발산역 하나였다. 거기서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 마을버스를 타면 10~15분 정도면 가긴 가는데 덕질의 기본은 시간이 금이다. 청소년이었던 내 용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기만 한 덕질의 생활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날 칼바람을 뚫고 드디어 등촌동 공개홀에 도착했다. 나는 그 날 택시를 혼자 타고서 공개홀 바로 앞에 내렸었는데 손에 보라색 풍선을 든 몇몇의 팬들이 보였다. 어떤 여자 팬에게 가서 S.E.S. 팬클럽은 티켓 어디서 받냐고 물어봤었는데 모른다고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같은 팬들끼리 친한 것이 보였고 나만 또 혼자였다. 숫기가 없던(?) 나는 뭔가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그냥 집으로 돌아가버렸고 누나들의 컴백 무대는 보지 못했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다음 사이트로 들어가 카페 개설을 했다. 그때는 네이버가 아니었고 다음이 진리였다. 4집 컴백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내 기억으로 현장을 직접 찾아온 팬들의 숫자는 현저히 적었다. 30명도 채 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열일곱의 나는 혼자서 공개홀 주변을 방황하던 나의 그 모습이 싫어서 함께 다닐 팬들을 찾기 위한 카페를 개설했다. '파'를 만든 것이다. 공식 팬클럽은 공식 팬클럽이고 그 안에서 각자의 팬들이 함께 움직일 팬들을 또 모집한다. 그게 바로 '파'다. S.E.S. 는 파 자체가 전혀 없었다. 있어봤자 팬사이트 개념으로 두세 군데가 전부였고 뭔가 전문적인 파가 아예 하나도 없었는데 그것을 내가 만들었다. 그 파의 이름이 바로 <요정 베이커리>. 줄여서 요베라고도 불린 나의 공방파는 앞으로 S.E.S. 팬덤에 엄청난 나비효과를 가져올지 전혀 모른 채 그렇게 첫 시작을 하게 되었다. 4집 컴백이 2001년 1월 15일, 내가 만든 S.E.S. 의 유일한 공방파 <요정 베이커리> 개설일 역시 2001년 1월 15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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