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요정 베이커리
열일곱 소년은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었는가? (원제)
왜 <요정 베이커리>라고 지었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은 분들이 많을 것 같다. 당시 전국회장이던 미윤 누나도 그랬고 서울 회장이던 상철이 형도 그 이유를 매번 나한테 물어봤었으니까. 그때도 손발이 오그라들었고 지금도 물론 그 뜻을 얘기기도 전에 손발이 오그라드는데 S.E.S. 의 사랑을 굽는다는 뜻에서 <요정 베이커리>였다. 물론 나 혼자 만든 거라서 누구의 의견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S.E.S. 팬덤 문화에 있어 전혀 새로운 지평선을 열었고 최초의 공방파를 개설하는데 성공했다. 이름은 <요정 베이커리>였어도 그 안에서 나의 닉네임이 필요했는데 나는 그 당시 바다 누나를 좋아했기 때문에 '바다 베이커리'라는 닉네임을 만들었다. 닉네임 앞에 '시샵'을 붙여서 '시샵-바다 베이커리'로 말이다. 그날 본격적으로 다음 카페 검색 칸에 S.E.S. 를 입력한 후, 모든 카페들에 들어가 회원 정보를 하나씩 클릭하기 시작했다. 가장 컸던 카페가 <이슈>였는데 당시 <이슈>의 회원수는 8만 명 정도? 그 정도로 기억한다. 그리고 포넷이라는 팬사이트가 하나 있었고 그 외에는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슈>는 S.E.S. 팬카페 중 가장 컸으나 전문적인 공방파가 아닌 팬사이트의 개념이었던 곳. 지금은 모르겠는데 그때는 그 카페에 가입한 회원의 간단한 정보를 볼 수 있었다. 그 닉네임을 누르면 메일 보내기와 쪽지 보내기가 있었고 나는 <요정 베이커리>를 개설하자마자 바로 초대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대충 뭐 공방을 함께 다닐 목적으로 만든 카페이니까 나처럼 혼자인 팬들, 함께 다닐 팬들을 찾고 있다면 가입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때 초대 메일 보내기가 한 달 기준으로 천명만 가능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하루에 최대 200명씩이었나? 그렇게 해서 5일 만에 천명 보내기에 성공을 했고 쪽지는 무한이라서 쪽지로도 초대를 보냈다. 말 그대로 막노동 작업이었다. 물론 혼자서. 가장 많이 보냈던 날이 쪽지 합쳐서 400명? 그렇게까지 보내본 것 같은데 어쨌든 개설 첫날인지 둘째 날인지 100명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매일 보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초대를 했고 정말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신기했던 게 눈덩이처럼 회원수가 늘어났다. 평일은 건너뛰고 그다음 주 토요일 음악캠프를 본격적으로 뛰었던 것 같은데 누구와 처음 함께 갔는지 기억이 난다. <요정 베이커리>를 만들고 첫 공방은 나 포함 네 명. 물론 회원수는 일주일 만에 거의 천명에 가까운 숫자를 기록한 것으로 안다. 그때 음악캠프를 시작으로 공개홀 그 특유의 냄새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덕질 좀 해본 사람이라면 공개홀 특유의 냄새가 뭔지 정확히 알 것이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으니까 패스. 스텐딩도 난생처음 서봤고 그때 생방송 시작하기 몇 분 전부터 오프닝 무대를 꾸밀 가수가 먼저 올라와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오프닝 무대를 꾸민 가수이자 내가 본격적인 공방을 뛸 때 처음 본 가수가 바로 코요태였다. 노래는 <파란>. 그게 기억난다. 생방송 시작하기 전 신지가 스텐딩에 서있는 여러 가수들의 팬들에게 인사해주었던 것. 그래서 나는 지금도 코요태의 파란을 들으면 그 날 그 시간과 그 공간, 그리고 그 냄새가 기억난다. 그렇게 음악캠프 공방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다음 날 있던 인기가요도 당연히 참석했다. 인기가요 때는 5,6명 정도 갔던 걸로 기억을 하고 어느새 회원수는 천명, 거의 1분에 하나씩 게시글이 올라오면서 거기에 또 댓글이 달리고 카페는 엄청난 활성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10개의 스케줄이 있으면 9개의 스케줄은 전부 따라다녔다. 라디오 스케줄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지만 방송국 앞에서 기다리기까지 했다. 주차장 빠져나가는 벤이라도 보기 위해서. 그리고 2001년 2월,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식 날, 집에서 부모님과 짜장면을 시켜 먹은 뒤에 바로 어디로 달려갔냐면 남대문 메사 팝콘홀을 향해 뛰었다.
그때 신동진의 미니 콘서트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누나들의 녹화가 내 졸업식날 있었기 때문이다. 평일 오후였던 지라 <요베> (이제 줄여볼까 한다) 친구들 중 갈 수 있는 애들은 없었고 새로운 회원이 나에게 연락이 왔었다. 같이 가도 되냐고. 목적이 그것이었으니까 나는 그 분과 둘이서 메사 팝콘홀에서 만났고 누나들의 미니 콘서트까지 참석하게 되었다. (그때 같이 간 그분은 그날 이후로 나오지 않았다)
점점 <요베>의 몸집이 커지면서 혼자 운영할 감당이 안되었다. 그때 같이 다니던 애들 중 자주 만나고 마음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부시샵으로 앉혔다. 그 둘을 부시샵으로 앉히면서 나의 <요베>는, 아니 이제는 나의 <요베>가 아니라 우리의 <요베>였다. <요베>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더 비상하기 시작했다. 단기간에 2천 명을 돌파했고 스케줄마다 거의 같이 다니던 <요베> 아이들의 숫자도 평균 하나의 스케줄당 10~20명이 고정되었다. 그게 불과 3월이 채 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1월 15일 날 개설했으니까. 그래도 나는 홍보를 멈추지 않았다.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초대 메일과 쪽지를 돌렸다. 그 결과 공방마다 현저히 적었던 S.E.S. 팬들의 숫자는 거짓말이 아니라 <요베>가 거의 반을 차지했다. 20명이 오면 10명은 우리, 나머지 열명은 따로따로 온 팬들.
어떤 날은 공식 팬클럽 임원들이 오지 않는 스케줄도 종종 있었는데 우리 <요베>만 펄보라 색 풍선과 단체복을 입고 누나들을 열렬히 응원하기도 했다. 어떤 곳은 정말 임원도 없었고 다른 팬들도 없었고 <요베>만 있던 스케줄도 있었다. (정확히 기억나는 스케줄은 안산에서 있던 공연과 상암 월드컵 경기장 완공 기념 공연) 참 미칠 정도로 따라다녔다. 혼자 있던 게 무섭고 외톨이 같은 느낌이 싫어서 함께 다닐 같은 팬들을 찾는 카페를 만들었던 건데 나에게 덕질은 항상 달콤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가수의 팬들은 대형 현수막을 하나씩 갖고 있었는데 S.E.S. 팬들만 유독 대형 현수막이 없었다. 작은 현수막은 개개인이 가지고 다녔지만 내 가수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워줄 대형 현수막을 가진 팬들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 3월의 어느 날, 대형 현수막을 만들기 위해 <요베>에 회비를 모금한다는 공지를 올렸고 그 당시 20만 원 정도? 그 정도 모였던 걸로 기억을 한다. 다 코흘리개 아이들이었는데 그런 아이들의 코 묻은 돈으로 20만 원을 단기간에 모을 수 있던 것 또한 대단했다고 생각이 든다. 20만 원을 다 쓰지는 않고 10만 원 정도의 현수막을 맞췄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현수막의 용도는 공개홀 앞에 있는 나무 사이에 걸어 놓을 목적이었다.
당시 덕질 좀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때 인기가요 공개홀 건너편 (까르푸, 현 홈플러스(?)는 대형 현수막을 걸어 놓는 명당이었다. 가수들이 주차장으로 들어갈 때든, 스케줄이 끝나고 나갈 때든 눈으로 볼 수밖에 없는 자리였으니까. 그중에 가장 좋은 명당은 주차장에서 바로 보이는 곳. 어쨌든 우리는 또 S.E.S. 최초 공방파라는 타이틀 이후에 다시 최초 대형 현수막을 가진 곳으로 이름을 더 날릴 수 있었다. 그 사이 회원수는 더 늘어났고 <요베>와 공방을 함께 뛰는 사람들의 숫자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어떤 날은 현장에 S.E.S. 팬들이 30명이 오면 <요베>가 20명을 넘기까지 했으니까. 다음에서 나름대로 꽤 유명해지면서 우리와 같은 공방파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애들이 나중에 본인들만의 파를 만들어 나간 적도 있었다. <요베>뿐이던 공방파가 나중에는 10개 정도로 불어 났고 그중에 3,4개의 파는 전부 내가 초창기에 데리고 다니던 애들이었다. 정말 뭐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들이 말도 없이 나간 경우였다. 더 이상 뭐 신경 쓰지 않았다. <요베> 회원수가 늘어날수록, 규모가 커질수록 그만큼 <요베>에 대한 험담도, 심지어 나에 대한 험담도 인터넷에 떠돌기까지 했다. 여전히 어린 나이었지만 어딜 가나 시기와 질투는 있구나라고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요베>는 더 커졌다. 그럼에도 내가 손을 놓지 않았던 건 역시나 초대 메일과 쪽지. 아마 개설 3,4개월 만에 거의 3,4천 명이 넘는 회원수를 끌어 모으는 데 성공한 걸로 기억한다. 반대로 다른 공방파들은 200명, 300명씩. 규모가 점점 커지니까 공식 팬클럽 임원이던 누나 형들에게 눈치도 많이 받고 예쁨도 그만큼 받기 시작했다.
예전 SM 건물이 있던 청담동, 갤러리아 뒤쪽에 누나들의 숙소가 있었는데 하얀 색깔로 칠해진 목ㅎ빌라는 우리에게 또 다른 놀이터였다.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무조건 숙소 앞에서 죽치고 놀았다. 스케줄이 끝나면 3호선 지하철을 타고 압구정역에 내려서 택시를 탄 후에 빌라 앞에서 하차. 밤도 참 많이도 샜다. 어렸던 유진 누나가 새벽에 알딸딸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것도 보고. 선물도 참 많이 주고. 배스킨라빈스 케이크 상자에 소주와 안주로 채워서 주기도 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하나 터졌다. 토요일 수업이 끝나고 우리 <요베>는 언제나 그랬듯이 누나들의 숙소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그날은 임원 누나들, 형들도 많이 왔었다. 해가 쨍쨍 뜬 토요일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엄청나게 무섭게 생긴 숏컷의 누나가 우리를 벼루고 있었다. MF 힙합 반바지에 MF 빨간색 박스티를 입었던 그 누나의 이름은 혜진 누나. (신상보호를 위해 역시 가명이다) 대구에서 올라왔단다. 그 누나는 공식 임원은 아니었지만 공식 임원들과 굉장히 친한 대구 팬이었는데 서울에서 요즘 <요베>라는 애들이 하도 까불대며 다닌다는 얘기에 아예 날을 잡고 올라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선명하지는 않은데 남자처럼 생긴 그 혜진 누나가 우리의 앞에 와서 뭐라고 했던 기억은 어렴풋이 난다. 너네 이렇게 숙소에 애들 데리고 오지 말라고 하는 것부터 낙서하지 말라고 했었나? 어쨌든 그 어린 나이에 우리는 엄청난 공포감을 느꼈다. 그런데 이미 우리 <요베>는 공식 임원 누나, 형들에게 미음과 사랑을 동시에 받고 있었던 지라 서울 회장이던 상철이 형은 언제나 우리를 감싸주었다. 뿔테 안경이었는지 무테안경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상철이 형만큼은 <요베> 사이는 물론, 공방 좀 뛰는 우리 팬들 사이에서는 천사로 유명했다. 그렇게 혜진 누나에게 호되게 혼났고 4집 타이틀곡 '감싸 안으며'의 후속곡인 'Be Natural'의 첫 무대가 있기 얼마 전.
어떤 공방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전국 회장이던 미윤 누나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네 휴대폰 번호 뭐냐"라고. 공식 팬클럽 임원이? 그것도 전국 회장이 내 전화번호를 따간다? 전국 회장 미윤 누나는 그렇게 내 휴대폰 번호를 가져갔고 나는 어린 나이에 점점 권력의 맛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속곡 첫 무대가 있기 며칠 전, 내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문자의 주인공은 바로 전국 회장 미윤 누나였던 것. 나는 문자를 보자마자 온몸에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주 음캠(음악캠프) Be Natural 첫방인 거 알지? 책임지고 요베에서 30명 데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