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충격의 소나타 XG
열일곱 소년은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었는가? (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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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997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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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요정 베이커리>
3화
나는 전국 회장이던 미윤 누나의 그 문자를 받고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몇 교시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든 눈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알 수 없는 만감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일개 팬이었던 내가, 일개 회원이었던 내가, 그것도 공식 팬클럽 <친구>의 서울 회장도 아니고 부회장도 아닌 전국 회장이 내 번호만 가져갔다는 것과 얼마 지나지 않아 먼저 이렇게 문자를 주게 되었다는 건 열일곱 소년의 마음을 뒤흔들고도 남았었다. 그야말로 센세이션이었다. 대사건이었고 대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집에 가자마자 <요정 베이커리> 카페에 공지를 올렸고 이미 함께 하고 있던 수많은(?) 우리 <요베> (요정 베이커리를 줄여서 요베라고 불렸다)의 오프라인 친구들하고는 저녁에 정팅을 했다. 여기서 정팅은 정기적인 채팅을 뜻하는 인터넷 용어를 가리킨다. 30~40명이 넘는 고정된 오프라인 친구들과 채팅만 몇 시간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 정팅이라기보다는 번팅이었다. 시샵이었던 내가 오프라인을 함께 뛰고 있던 <요베> 부시샵부터 나머지 친구들에게 갑작스러운 문자를 보냈었으니까.
더 정확히는 문자를 먼저 보냈고 집에 오자마자 버디버디로 다시 쪽지를 돌렸다. 몇 시간이 넘는 채팅을 하는 동안 우리의 주제는 역시 전국 회장인 미윤 누나의 문자였다. S.E.S. 의 최초 공방파였던 나의 <요베>, 아니 이제는 우리의 <요베>가 또다시 최초로 전국 회장에게 먼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게 아니냐며 전부 들떠있었다. 카페 공지로 올린 '후속곡 첫방 이번 주 음악캠프 공방 안내'는 이미 조회수를 몇 백씩 기록하고 있었고 나는 계속해서 S.E.S. 의 모든 팬카페를 돌며 카페 초대 메일과 쪽지를 보냈다. 뭔가 내게 거대한 프로젝트가 맡겨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서든지 '감싸 안으며'의 후속곡 'Be Natural' 첫 무대, 그러니까 후속곡의 첫방에 <요베> 회원만 30명을 채워서 데려가고 싶었다. 열일곱 소년의 욕망은 그렇게 불타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토요일. 그때 현장에 50명 정도는 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50명 중에 <요베>의 소속만 30명 이상이 되는 쾌거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때 그 기분은 어떠한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MBC (그때는 상암이 아니라 여의나루 역에 있는 분홍색 건물이 공개홀이었다)
주차장 바로 건너편에 이전에 맞췄던 대형 현수막을 걸었다. S.E.S. 대형 현수막 역시 <요베>가 최초. 정확히 기억나는데 3집 'LOVE' 활동 당시의 사진으로 만든 현수막이었고 문구는 절세가인이었는지, 절세미인이었는지 둘 중에 하나였다. 정확히 이 사진을 현수막에 쓴 건 아니었고 여기서 포즈만 다른 사진이었는데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봐도 흡사한 그 사진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맨 앞줄에서 공식 팬클럽 임원인 형, 누나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로 급성장해 있었다. 그만큼 <요베>도 하루가 멀다 하고 성장을 하고 있었고 <요베>에서 파생된 다른 공방파들도 4,5개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S.E.S. 의 공방팬들, 즉 현장을 직접 뛰는 팬들의 숫자 또한 점점 많아져 최소 두 배 이상 차이가 나던 핑클의 <핑키>와 비슷한 규모를 자랑하는데 성공했다.
음캠은 대부분 스텐딩으로 누나들을 응원했고 'Be Natural'의 첫 무대는 아마도 사전 녹화를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에 지금 기억이 나는 건 후속곡의 첫 무대였던 지라 코디부터 무대까지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안 쓸 수가 없었으니까. 누나들의 코디는 대충 알고 있었다. 원래 또 덕질의 기본은 후속곡이 뭔지 가장 먼저 알게 되는 건 물론, 그 노래에 맞는 헤어스타일이나 패션도 어떻게 서든지 알아내기 때문이다. 4집 '감싸 안으며'에서 유진 누나의 단발머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남자인 내가 유진 누나를 좋아한 이유는 언제나 긴 생머리였기 때문. 그런데 1년 조금 넘는 공백을 가진 뒤에 4집으로 컴백을 했는데 단발이라니! (그때까지는 바다 누나의 팬이었지만 유진 누나도 굉장히 좋아했다) 여자 팬들은 단발머리도 너무 예쁘다고 극찬했지만 나는 뭐 어쨌든 유진 누나의 긴 생머리를 볼 수가 없어 '감싸 안으며' 활동 내내 아쉽기는 했다. 그래도 그 당시 유진 누나의 단발머리는 가발로서 후속곡 'Be Natural'에서는 다시 유진 누나의 긴 머리를 볼 수가 있었다. 그때 수영 누나(슈 본명) 헤어 스타일도 너무 세련돼서 노래의 분위기 하고도 굉장히 잘 맞는다며 우리들끼리 북 치고 장구를 쳤고 특히 바다 누나의 그 숏컷은 잠시 나를 미치게 했었다. 숏컷이 그렇게 잘 어울리는 여자를 거의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무튼 누나들의 사전 녹화 때문에 일찍 공개홀로 입장을 완료했다. (아무래도 그날은 사전녹화가 맞는 것 같다) 정확히 기억나는 게 하나 있는데 내 바로 뒤에는 전국 회장 미윤 누나가 서있었다. 약간의 덩치도 있으면서 항상 숏컷이었던 미윤 누나는 누가 봐도 전국 회장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미윤 누나라서 그런 건지, 전국 회장이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미윤 누나의 몸에서는 항상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날 <요베>가 워낙 많이 왔던 날이었고 공방 자체를 처음 오는 우리 <요베> 회원들도 많이 있었는데 나는 항상 그랬듯 음캠은 여의나루 역 앞에서, 인가(인기가요)는 발산역 앞에서, 뮤뱅(뮤직뱅크)은 여의도역 앞에서, 쇼킹 엠(엠넷)은 남대문역 앞에서 신입 회원들과 먼저 만나 인사를 한 뒤에 기존 <요베>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도록 매번 노력했고 또 노력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고 내가 못 챙길 때면 부시샵 친구들이 챙겨줬고 <요베> 운영진은 아니지만 정예 멤버라고 할 수 있는 친구들도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 친구들 역시 항상 새로 나오는 신입 회원들을 굉장히 잘 챙겼다. S.E.S. 공식 응원법은 4집부터 생겼는데 내가 유일하게 응원법이 생각나지 않는 노래가 바로 'Be Natural'이다. 그 이유가 뭐냐면 'Be Natural' 응원법이 가장 어려웠기 때문인데 응원법이 쉴 틈이 없던 곡이었다. 노래에 맞춰 응원법을 소리치다 보면 우리끼리 얼굴을 보며 웃는다. 숨 쉴 틈이 없어서. 그래서 그날, 후속곡 첫 무대를 가졌던 날 나는 <요베> 친구들과 종이에 적힌 응원법을 계속 되새기며 이렇게 말했었다.
"아, 왜 이렇게 힘들어? 숨 쉴 틈이 없는데?"
그때 바로 내 뒤에 서있던 미윤 누나가 팔짱을 낀 채로 날 보며 웃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누나는 나와 옆에 같이 있던 친구들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너네 응원 좀 열심히 하라고"
덕질 좀 해 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겠지만 가수들의 노래에 맞춰 팬들이 입을 모아 소리치는 응원법은 임원들이 만든다. 지금은 공방 입장부터 공식 팬카페를 운영하는 운영진을 비롯해 모두 기획사 직원들이 아예 담당하지만 우리 때는 공식 팬카페는 없었고 공식 팬클럽만 존재했다. 공식 팬클럽의 임원들도 기획사 직원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팬이었다. 그럼 뮤뱅이나 음캠, 인가를 입장할 때 필요한 티켓은 어떻게 얻냐, 대부분 공식 팬클럽 임원들은 매니저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다. 그때는 매니저가 티켓을 들고 나와 임원에게 전해준다. S.E.S. 같은 여자 가수 팬클럽 앞으로는 티켓 자체가 많이 나오지 않는다. 남자 가수 팬클럽은 꽤 많이 나온다. 이유는 간단하다. 공방을 뛰는 성 비율은 여자가 8, 남자가 2다. 남자 가수 팬클럽은 어딜 가나 그 숫자가 꽤 많은데 여자 가수 팬클럽은 한 번에 20,30명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 H.O.T. 는 뭐 인기가요나 음악캠프 스케줄 하나에 수천 명씩 오는 게 기본이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티켓 자체가 많이 나올 수가 없다. 가끔은 S.E.S. 앞으로 30장이 나왔는데 웃기면서도 슬픈 게 그날따라 25명밖에 오지 않아서 5장이 남을 때. 언제였더라, 뮤뱅이었나? 그래서 이정현 팬클럽에게 나머지 티켓을 준 기억이 난다. 오히려 그때는 이정현 팬클럽이 평균보다 많이 와서 티켓이 모자랐던 날이 있었다. 어쨌든 그러다가 누나들이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들이 무대에 올라왔고 우리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바다 누나, 바다 언니, 유진 언니, 유진 누나, 수영 언니, 수영 누나를 불러댔고 노래 준비가 되기 전이어서 누나들은 우리를 향해 웃어주며 손을 흔들어댔다.
그런데 유독 바다 누나만 잘 웃지 않았다. 이거는 정말 골수팬이어서 말할 수 있는 건데 'Be Natural' 노래 분위기 자체가 워낙 음산(?)하다고 해야 하나? 어둡고 묵직해서 시작하기 전부터 감정을 잡아야 해서 그럴 수 있는데 바다 누나는 항상 기분파였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특히나 S.E.S. 활동할 때는 엄청난 기분파였다. 얼마 뒤, 드디어 후속곡 'Be Natural' 사전 녹화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미친 듯이 응원하기 시작했다. 단 몇 분의 무대를 보기 위해, 누나들을 직접 보기 위해 4,5시간을 또 기다렸던 것이다. (토요일이라서 4,5시간이지, 일요일에 하는 인기가요 때는 아침부터 줄을 서기 때문에 10시간은 기다린다) 그렇게 무대가 끝났고 음캠도 끝났다. 여느 때처럼 <요베>를 먼저 챙겼다. 시샵이었으니까. 음캠 뒤에 다른 스케줄이 있다면 곧장 그 스케줄을 향하곤 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Be Natural' 활동할 때는 맞다. 정확히 맞다. 누나들이 하얀색 정장에 하늘색 셔츠를 입었던 날이다. MBC 주차장 앞에서 <요베> 친구들과 플랜카드부터 각자의 현수막을 들고 서있었다. 덕질의 기본 중 하나는 또 본 무대가 끝나면 바로 뛰어야 한다. 우리 팬들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가수들의 팬들이 주차장 입구 중 명당을 차지하느라 바쁘니까 말이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나이는 어렸지만 시샵이었으므로 그날 새로 나온 <요베> 회원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을 맨 앞에 세워주었다. 그때는 퇴근길이라는 덕질 용어가 없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누나들의 벤이라도 가까이서 보게 해 주려고. 운이 좋은 날에는 누나들이 벤 창문을 열어서 인사를 해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무튼, 엄청 충격(?)적인 날이었는데 왜 충격적이었냐면 음캠이 끝나고 나서 누나들이 차를 타고 나오는데 그 차가 글쎄 벤이 아니라 소나타 XG였던 것.
(당시 XG면 나름 최신차였다) 그 작은 XG 뒷좌석에 누나들 셋이 앉아 있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더 충격이었던 건 선팅이 아예 안 된 차였다. 앞은 물론, 뒷자리 모두 선팅 자체가 안 되어 있었다. 그래서 주차장을 빠져나올 때부터 선팅이 하나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누나들이 굳이 창문을 열지 않아도 S.E.S. 인 게 다 보였다. 중간에는 누가 앉아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고 왼쪽에는 정확히 바다 누나가 앉아 있었다. 주차장 입구에서 다시 한번 팬들끼리 소리를 한 번 지른 뒤에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려고 하는데 누나들이 탄 XG가 신호에 걸려 횡단보도에 서있는 걸 목격했다.
현준이었는지 현욱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나를 포함한 둘이서 플랜카드를 들고뛰기 시작했다. 우리 둘이 뛰니까 나머지 팬들도 우르르 뛰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가 먼저 누나들 차 앞에, 아니 옆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우리는 인도에 서 있었으니까. 거기서 내가 '바다 베이커리'라고 쓰여있는 플랜카드를 들었고 누나들 셋과 눈이 마주쳤다. 유진 누나하고 수영 누나는 웃어 주고 손도 흔들어 준 걸로 기억하는데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하고 내 플랜카드를 바다 누나가 최소 3초는 쳐다본 기억이 난다. 그것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무표정으로. 확실한 기분파가 맞다. 최소한 그때는. 다른 가수 팬도 아니고 본인의 팬이 아닌가? 거기에 본인의 이름이 쓰여있는 플랜카드를 들고 있으면 최소한 목례라도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바다 누나는 그날 3초 정도 바라본 뒤에 유유히 사라졌다. 덕질하면서 그 날이 가장 기분 나빴다. 신호가 바뀌면서 XG가 출발했는데 나와 같이 뛴 <요베> 친구가 나 대신 씩씩거렸다. 나도 같이 욕했다. 욕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니까. 그 뒤에 따라오던 나머지 <요베> 친구들에게 방금 상황을 말했더니 오늘도 그랬냐면서 웃어댔다. 그날 이후로 바다 누나 대신 유진 누나로 옮겨 갔냐고? 아니다. 원래 덕질은 이런 거다. 재수 없으면서 사랑스러운 게 바로 덕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