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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피형아 Mar 08. 2021

#4. 나의 또 다른 소울메이트 “틴스타”

4화 나의 또 다른 소울메이트 '틴스타'



열일곱 소년은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었는가? (원제)



https://brunch.co.kr/@forsea5999/1

1화 <1997년 11월 28일>


https://brunch.co.kr/@forsea5999/2

2화 <요정 베이커리>


https://brunch.co.kr/@forsea5999/3

3화 <충격의 소나타 XG>






4화 <나의 또다른 소울메이트 '틴스타'>


출처 : 네이버


내 플랜카드 3초, 내 얼굴 3초를 바라보고서도 쌩을 깠던 바다 누나. 차라리 비웃기라도 해 주지, 무표정으로 나와 내 플랜카드를 바라보던 그때의 그 얼굴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것이다. 열일곱 소년은 그저 좋아서 멀리서나마 환하게 웃으며 바다 누나를 불렀는데 그때의 그 무안함과 민망함은 하늘을 찌르는 것도 모자라 우주의 명왕성까지 닿고도 남았었다. 그날만큼은 정말 바다 누나를 얼마나 욕했는지 모른다. 아주 잠깐 유진 누나로 갈아타려고도 했었지만 이런 게 또 덕질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하며 그때의 나는 누가 이기나 해보자 하는 식으로 더 이를 갈았던 것 같다. 4집 '감싸 안으며'로 컴백한 2001년 1월 15일부터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모든 공방을 따라다녔다. 3,4월까지는 활동을 했던 것 같은데 참 오지게도 따라다녔다. 그 와중에 학교는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고 조퇴도 하지 않으면서 나름 모범생(?)의 삶을 유지하기도 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굉장히 내성적이었다. 정확히 S.E.S. 를 따라다니기 전까지는 선생님 앞에서는 물론, 특히 여자 아이들 앞에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할 정도로 내성적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그랬다. 발표는 꿈도 꾸지 못했고 맨 앞줄에 앉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교탁 앞에 앉으면 선생님들과 눈이 마주칠 확률이 높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내성적이었냐면 쉬는 시간에 여자 아이들이 내 자리로 와서 내가 인사를 받아줄 때까지 앉아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던 겨울방학 때 갑자기 뭔가에 얻어맞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마치 성모 마리아를 만난 것처럼 집에서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있었는데 누가 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인 적이 있다.


"너 계속 이렇게 살 거야? 답답하게?"


출처 : 네이버


그리고 거짓말 1도 없이 나의 성격은 2학년을 올라가자마자 180도 바뀌게 되었다. 여자 아이들 앞에서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건 물론, 귀까지 빨개져 놀림을 당하기도 한 내가 새 학기를 맞이하는 3월 2일부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누가 보면 내가 겨울 방학 동안 연기학원이라도 다닌 줄 알 것이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도 몇 있었는데 특히 2학년 때도 같은 반이 된 여자 아이들은 거의 H.O.T. 팬이어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는 금세 친해졌다. 2학년부터는 거의 서점에서 살다시피 했다. 매달 10일인가? 15일인가? 그날이 연예 잡지들 신간이 나오는 날이었는데 달마다 꼭 두 권씩은 구매했었다. 부모님에게 받는 용돈이 한정적이어서 더 살 수 없었지만 두 권도 사실 엄청난 타격이긴 했다. 1998,1999,2000년 물가를 생각해보면 절대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으니까. 특히나 나처럼 중학생들이 구매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아이 러브 스타와 틴스타, 토마토가 균일가였던 걸로 기억한다. 4,500원~4,800원이었고 여기서 프리미엄급 연예 잡지로 손꼽히던 포토뮤직은 6,000원이었다. 그만큼 더 두꺼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 돈으로 산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서 포토뮤직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난 틴스타의 빠였다. 아이 러브 스타가 부동의 1위를 자랑하긴 했지만 나는 달마다 틴스타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구매를 했었다. S.E.S. 가 공백기간이어서 틴스타에 실리지 않아도 나는 틴스타를 잊지 않고 구매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구매를 한 잡지가 아이 러브 스타, 아니면 토마토. 그렇게 달마다 두 권의 연예 잡지를 들고 등교를 했고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우리 반에서는 물론, 2학년 전체에서 꽤나 유명한(?) 아이가 되었다. S.E.S. 기사만 잘라서 몇 반 누구를 찾아가면 H.O.T. 것으로 바꿔준다, 신화 것으로 바꿔준다, 젝키 것으로 바꿔준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 그렇게 물물교환을 하기 시작했고 내가 지난 2화인가? 3화인가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그렇게 내 잡지들은 항상 너덜너덜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게 너무 행복했다. 덕분에 내성적이던 성격이 없어졌고 친구들과 굉장히 잘 지냈으니까. 선생님들의 질문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맨 앞줄에 앉아도 전혀 싫지 않았다. 다시 틴스타 얘기로 돌아와서 나는 달마다 틴스타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출처 : 네이버


내성적이었지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틴스타에 편지를 보냈고 내 기억으로는 3학년 때까지 보낸 걸로 기억한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2년 조금 넘도록 편지를 보냈다. 당시 덕질 좀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틴스타와 아이 러브 스타 같은 연예 잡지에서는 달마다 독자들에게 편지를 받았다. 잡지의 맨 뒷장은 항상 어떤 연예 잡지가 되었든 펜팔 친구를 사귈 수 있는 플랫폼부터 내가 <요정 베이커리>를 만든 것처럼 각 가수들의 팬들이 모집하는 공방파 소식, 각 가수들의 공식 팬클럽 모집 소식도 알 수 있는 플랫폼이 별개로 또 있었다. 그거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나는 틴스타를 통해 펜팔 소식란에 두 번이나 실렸었고 나중에는 S.E.S. 를 좋아하는 팬들의 모임이라는 동호회 소식도 세 번 정도? 실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전국 각지에서 보내오는 편지의 엄청난 양에 비해 잡지에 실어주는 독자들은 달마다 20명이 채 안되었지만 나는 펜팔도 두 번, 동호회 소식은 세 번이나 실리는 데 성공했다. 지금도 정확히 기억나는데 그때는 삐삐와 휴대폰이 공존하던 시대여서 펜팔이 유행이었다.


출처 : 네이버

아, 펜팔을 모르는 세대가 있을 수 있으니 여기서 잠깐 펜팔에 대해 설명을 하자면 펜팔은 누군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가 손편지를 주고받는 걸 뜻한다. 더 쉽게 생각하면 편지 친구? 그러니까 나는 서울에 사는데 부산에 사는 내 또래의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같은 반이었던 여자 아이 중 한 명이 펜팔을 하는 얘기를 듣고 나도 틴스타에 편지를 보냈었던 것. S.E.S. 를 굉장히 좋아하고 H.O.T. 와 신화도 좋아하는 열다섯 살의 소년입니다라는 나의 소개가 틴스타 펜팔란에 실렸고 그때부터 우리 집 우체통은 불이 나기 시작했다. 중계동 그린 아파트 1층에 있는 각 세대 우체통 중 우리 집 우체통만 늘 엄청난 편지들로 꽂아져 있었다. 하루에 기본 10통, 많은 날에는 20통 정도 왔고 거의 두 달간 지속되었다. 그때 내가 받은 편지만 대충 400~500통은 될 것이다. 최대한 모든 사람들에게 답장을 했었다. 정말 신기한 건 남자에겐 한통도 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10명 중 2명이 신화 팬이었다면 나머지 8명은 전부 H.O.T. 팬들로부터 편지가 왔었다. 그때는 이렇게 같은 SM 소속의 팬들끼리는 유대감이 상당했다. 덕분에 우표값이 얼마나 많이 나갔는지 모른다. 나는 그때의 그 첫 펜팔이 너무나도 신기하면서 재밌었다. 정말 이렇게 많이 오는구나 하고 느꼈으니까. 그렇게 서로 답장을 주고받으면서 마지막에는 결국 몇 명만이 남게 되는데 나는 두 명의 진짜 펜팔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아직도 선명하다. 나보다 한 살인가, 두 살 많던 대구의 재영 누나, 그리고 나와 동갑이던 친구. 합천이었나? 합천이었던 것 같은데 민경이. 이 두 사람하고는 거의 고등학교 때까지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 같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손편지보다는 삐삐, 휴대폰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두 사람 다 H.O.T. 의 팬이었고 재영 누나의 목소리는 항상 또랑또랑했다. 삐삐에 녹음된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재영 누나는 내 이름을 먼저 부르면서 시작했다.


"XX아~ 재영이 누나다~"


그때 나는 H.O.T. 중에서는 문희준을 좋아했었는데 재영 누나가 항상 문희준 사진과 S.E.S. 사진을 함께 동봉해서 보내주고는 했다. 내 기억으로 재영 누나는 이재원을 좋아했던 걸로 안다. H.O.T. 가 세종문화회관에서 했던 단독 콘서트 라이브 실황 앨범 중 이재원의 솔로 무대 앞부분을 녹음해서 내 삐삐 인사말에 사용했었는데 그건 재영 누나를 위한 것이었다. 이재원의 솔로 무대 시작할 때 수많은 팬들이


"이재원! 이재원! 이재원!"


하는 응원소리를 내 삐삐 인사말로 녹음했던 것. 아직도 기억나는데 재영 누나가 그 인사말에 녹음된 걸 듣고서는


"XX아~ 재원 오빠 응원 소리네? 너무 고맙다"


라고. 그리고 합천에 살던 민경이는 강타의 팬이었다. 민경이는 재영 누나의 성격 하고는 조금 달랐던 게 항상 차분한 목소리였고 민경이 하고는 발렌타인 데이와 화이트 데이때 서로 초콜릿과 사탕을 소포로 교환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틴스타를 더더욱 신뢰하면서 더 좋아하기 시작했다. 할 얘기가 없어도 달마다 틴스타에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1년쯤 보냈나? 그러다가 어느 날 틴스타에서 편지가 왔었다.


출처 : 네이버


"XX아 안녕? 여기는 틴스타야, 나는 틴스타에서 XX를 담당하고 있는 XX라고 해. 편지를 받고 놀라겠지? 우리 XX 이가 항상 틴스타를 잊지 않고 달마다 편지를 보내줘서 너무 고마워. 안 그래도 틴스타는 우리 XX 이를 잘 알고 있단다. 앞으로도 틴스타 많이 사랑해주길 바라고 XX이가 좋아하는 S.E.S. 취재도 앞으로 더 많이 신경 쓸게"


대충 이런 내용의 편지였다. 이때 내 나이가 아마도 15살 말에서 16살 초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편지는 분명 하트 모양의 편지지였는데 마음 같아서는 사진을 보여주고 싶지만 지금은 당연히 없다. 그리고 내가 본격적으로 S.E.S. 를 따라다니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틴스타 하고도 멀어지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 틴스타의 덕질도 끝까지 했더라면 내 인생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틴스타 기자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었어도 그때는 연예 잡지마다 가수와 팬을 만나게 해주는 이벤트도 있었으니까 내가 1순위로 뽑히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놓고 보면 나는 그때부터 뭔가 이런 거에 능한 게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뭐 지금도 이렇게 글 쓰는 직업을 갖게 된 것일 수도 있고. 여러모로 S.E.S. 는, 그리고 S.E.S. 의 덕질은 답답하기 그지없던 나의 내성적인 성격을 180도로 바꿔준 계기가 되었고 팬클럽으로 활동하면서, 또 그 안에서 <요정 베이커리>라는 S.E.S.의 최초 공방파를 만든 시샵으로서 일찍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값진 경험이자 발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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