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피형아 Mar 10. 2021

#6. 덕질은 사회생활에 도움된다

6화 덕질은 사회생활에 도움된다



열일곱 소년은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었는가? (원제)



이전 이야기들을 먼저 보시면 새천년 감성을 더욱 즐길 수 있읍니다.


https://brunch.co.kr/@forsea5999/5

5화 <클릭비와 이가자 미용실>


https://brunch.co.kr/@forsea5999/1

1화 <1997년 11월 28일>






출처 : 네이버

압구정 갤러리아 백화점 맞은편에 있던 그 맥도날드는 모든 사람들의 약속 장소였다. 만남의 광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이나 핫플레이스 중 하나였다. 그때의 맥도날드 구조가 다 기억이 나는데 갑자기 뭉클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우리는 언제나 2층 구석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누나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그 당시 2층 구석에 있던 좌석만이 단체석으로 되어 있어서 기본적으로 늘 열명 넘게 움직이던 우리 <요정 베이커리>에게 있어서는 명당이었다. 덕질을 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게 또 있는데 내 가수의 무대만 보고 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상기 본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진짜 시작은 그 이후다.


출처 : 김재권 문학관 블로그

우리처럼 맥도날드를 가서 하루 종일 놀거나 민토에 가서 하루 종일 놀거나, 파파이스를 가든 롯데리아를 가든 집에 가기 전까지 수다를 떤다. 그럼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며 노는지 궁금할 텐데 우리는 S.E.S. 팬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기본적으로는 누나들 이야기가 비중이 크다. 오늘 음캠 무대는 어땠는지, 코디가 엉망일 때는 코디가 안티인 게 분명하다는 이야기, 팬서비스 별로 좋지 않기로 유명한 바다 누나가 오늘만큼은 기분이 좋았는지 입이 찢어지도록 인사해준 이야기, 오늘도 수영(슈 본명) 누나는 천진난만하다는 등등. 일반(?)적인 친구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똑같다.


덕후라고 해서, 빠라고 해서 다른 건 전혀 없다. 취미만 다를 뿐,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같은 팬이니까, 또 같은 또래들이니까, 여기에 거의 매일매일을 같이 붙어 다니니까 웬만한 학교 친구들보다 더 친한 존재였다. 얼마나 재밌게 놀았는지 가끔은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다. 그래서 내 학창 시절은 S.E.S. 와 <요정 베이커리>로 가득 차 있다. 학교가 끝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지하철로 뛰어 공방을 다녔고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누나들의 숙소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숙소 앞에서 몇 시간 놀다가 자연스럽게 다시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누비고 다녔고 그때는 지금처럼 카페 문화가 발달되기 전이서 늘 맥도날드, 아니면 로데오 거리 입구 쪽에 있던 즉석 떡볶이집에서 끼니를 때우곤 했다. 뭐가 그렇게 즐거웠을까? 그저 만나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밌었던 나날들... S.E.S. 가 이어준 또 다른 소울메이트. 우리는 운명 공동체였다.


웬만한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하고는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고 종종 만나기도 하지만 소수의 몇은 자신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다고도 한다. 우리를 만난 건 너무 좋지만 누나들을 따라다닌 건 흑역사라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이렇게 에세이를 가장한 소설을 쓰고 있듯 내 학창 시절을 사랑하는 건 물론, 늘 추억한다. 내가 시샵 출신이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덕분에 나는 내성적이었던 성격을 완전히 버릴 수 있었고 열여섯,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찍이 사회생활을 함으로써 리더의 자리를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으니까. 세기말, 그리고 새천년의 덕후들은 항상 손가락질을 받았다. 아이돌을 따라다니는 팬들에게 붙여진 빠순이, 빠돌이라는 비속어가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으니까. 내가 등교하면 학교 친구들은 항상 나를 향해 비웃곤 했다.


"S.E.S. 빠돌이 왔네?"


라고. 그래도 나는 즐거웠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항상 행복했고 재밌었다. 일반적으로 학창 시절에 대한 추억을 물어본다면 아마도 거의 머뭇거리지 않을까 싶다. 평범하게 공부만 한 기억? 매일매일 슬리퍼를 질질 끌며 동네 놀이터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기에 바빴던 기억? 게임방에 죽치고 앉아 있던 기억? (게임을 비하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미성년자가 뚫리던 술집에 가서 이성친구들끼리 유흥을 즐기기에 바빴던 기억?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집돌이나 집순이? 내가 굉장히 내성적이었기 때문에 만약 S.E.S. 를 따라다니지 않았다면 나의 학창 시절은 그냥 집돌이로 시작해서 집돌이로 끝났을 것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출처 : 네이버

가끔 길을 걷다 보면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늦은 시간까지 집에 가지도 않고 놀이터나 공원에 앉아 몰래 담배를 피우며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교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10대인 게 티가 나는 아이들이 헬멧도 쓰지 않고 오토바이에 3 치기를 하며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기도 한다. 오토바이 뒷자리에 여자 아이 태우고서 온갖 칼치기를 해대며 신나게 돌아다니기도 하고.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골목 어딘가에 앉아 그냥 사정없이 떠드는 아이들도 있다. 노래방에 숨어 담배 피우는 건 기본이고. 간혹 현 아이돌 멤버들의 과거 사진이 논란될 때처럼 말이다. 내 동생이 그랬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밤 12시 넘어서 들어오는 건 기본,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아도 그때뿐.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었는데 동생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느라 늦게 들어왔던 걸까? 그러나 반대로 나는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은 횟수는 확실히 동생보다 적다. 내가 맞았을 때는 시험 성적이 떨어졌을 때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아버지는 가끔 이런 얘기를 하신다.


"차라리 네가 속을 안 썩였지"


그렇다. 나는 단 한 번도 사고를 친 적이 없다. 담배를 배워본 적도 없었고 어디 가서 술을 몰래 마시지도 않았다. 집엔 늦게 들어왔지만 동생처럼 할 일도 없이 동네 양아치처럼 어딘가에 박혀 있지는 않았으니까. 나의 학창 시절은 투명할 만큼이나 순수했다. 그저 누나들만 따라다녔으니까. 덕질은 삶의 질을 향상해준다. 여행할 때 받는 느낌을 그대로 받기도 하고 치유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조직적으로 만들어진 팬클럽 안에, 일찍이 집단에 소속되기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사회생활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앞으로 있을 사회생활하고도 직결된다. 팬클럽으로 활동하며 우리는 협동과 협력을 배우게 되니까. 나처럼 시샵을, 지금은 시샵이라는 용어로 쓰지 않으니까 운영진이라고 해야겠다. 운영진이라면 아주 자연스럽게 리더십을 배우는 게 또 덕질이다. 자신이 속한 '파'(동호회)가 해당 아이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홍보에 목숨(?)을 거는 것도 사회생활에 무척이나 도움이 된다. 그것은 곧 마케팅이니까. 덕질의 지존급이었다면 홍보를 어떻게 해야 반응이 오는지 어느 정도는 감이 올 것이다.


 덕분에 나는 내 블로그를 단기간에 키우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올해로 블로그 활동 8년 차가 되었고 6,7년 차 때는 일 평균 방문자수가 1~2만 명을 유지했었다. 그 결과 전체 방문자수는 오늘 날짜 기준으로 28,772,872를 기록 중이다. 이제는 영화 리뷰어로 활동하고 있으며, 웬만한 영화들은 개봉하기 전에 시사회로 먼저 초대받아 관람한다. 그리고 리뷰를 작성하고 때로는 각 영화사에 콘텐츠를 기고하며 살고 있다. 만약 나의 아들이, 나의 딸이 아이돌에 미쳐서 덕질을 한다고 하면 나는 누구보다 이해해주고 지원해줄 것이다. 나쁜 짓만 하지 않으면. 친구 잘못 사귀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아예 안 들어오거나, 담배와 술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이렇듯 덕질은 나라는 인간을 완벽하게 바꿔 놓았다. 지금도 나는 어느 자리에서도, 누구에게도 당당히 S.E.S. 를 따라다녔다고 신나게 얘기한다. 어릴 적에는 친구들에게 놀림받았지만 지금 이런 얘기를 하면 다들 신기해한다. 말로만 듣던 덕후를 직접 만나게 된 거나 마찬가지이니까.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 왜 1집부터 따라다니지 못했을까? 2집부터 따라다녔어도 좋았을 텐데 왜 몰랐을까... 더 방대한 에피소드를 갖게 되는 건 물론, 나의 학창 시절은 더더욱 찬란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텐데 말이다. 내성적인 성격을 더 빨리 고칠 수 있었을 텐데. <요정 베이커리>를 만들어서 공식 팬클럽 임원들에게 가장 먼저 인정을 받고 전국 회장인 미윤 누나가 내 휴대폰 번호를 가져가며 내 성격은 점점 더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더 빨리 현장 덕질을 시작했더라면 나는 반장을 늘 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아이들을 인솔하는 방법을 알았고 정모 주최부터 질서 유지하기 등등 모든 것에 능통했으니 반장이나 부반장 후보에 항상 나갔을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반장이나 부반장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아, 고등학교는 빼야겠다. 그때 우리 학교에는 반장이란 게 없었으니까) 엄청 내성적인 아이 었으니까. 다시 돌아간다면 반장은 물론이고, 전교 회장도 한 번 노려보고 싶다. 물론 그것이 권력을 이용한 욕망이 되지 않고 협동이라는 착한 욕망이 되어야 하지만.


출처 : 네이버

그렇게 점점 누나들의 4집 활동도 끝나가고 있었다. 타이틀곡부터 후속곡의 막방까지 참 많이도 다녔다. <요정 베이커리>도 단기간에 엄청난 성장을 보이기도 했고. 4집 활동이 끝난다고 해서 나의 덕질은, 우리의 덕질이 끝나는 건 아니다. 뮤뱅이나 음캠을 뛸 수 없으니 누나들이 있는 숙소를 찾아가는 것. 누나들의 공백기에도 우리들은 늘 압구정역에서 만나 1번 출구로 나와 그대로 갤러리아 백화점까지 직진을 했다. 그 뒤쪽이 숙소였고 그 옆에는 SM이었으니까. 그리고 불과 2개월? 3개월 뒤? 누나들이 데뷔 이래 처음으로 여름 활동을 하게 되었다며 앨범 발표를 했다. 그 앨범이 바로 '서프라이즈'라는 타이틀의 4.5집 <꿈을 모아서>. 이때가 나의 가장 큰 전성기이자 우리 <요정 베이커리> 역시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건 워밍업 수준이었고 앞으로 펼칠 이야기들이 요즘 말로 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S.E.S. 는 늘 겨울에 활동했기 때문에 공방을 뛰던 우리는 항상 추위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데 데뷔 이래 처음으로 여름 활동이라니! 다 죽었다. 신나게 놀아보자! 그리고 누나들의 앨범 중에서도, 타이틀곡 중에서도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는 <꿈을 모아서>의 첫방이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공지] 4.5집 컴백 <꿈을 모아서> 첫방과 함께할 요베 회원을 모집합니다.


라는 공지를 카페에 올렸다. 이미 인터넷 상으로 유명해져 있을 대라서 조회수 폭발은 기본, 현장에 새로 나오는 <요정 베이커리> 신입 회원들의 닉네임이 댓글로 엄청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이때 아마 <요정 베이커리> 카페 회원수만 거의 4,5천 명 정도? 우리와 같은 다른 공방파 카페 회원수들은 100명부터 200명, 300명, 700, 800명 정도로 형성되어 있었다. 드디어 뜨거운 열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누나들의 첫여름 활동이 시작됐다.





이전 05화 #5. 클릭비와 이가자 미용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