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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피형아 Mar 12. 2021

#7. 새빨간 거짓말 “하리수”

7화 새빨간 거짓말 '하리수'



열일곱 소년은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었는가? (원제)



이전 이야기들을 먼저 보시면 새천년 감성에 더욱 흠뻑 젖을 수 있읍니다.


https://brunch.co.kr/@forsea5999/6

6화 <덕질은 사회생활에 도움된다>


https://brunch.co.kr/@forsea5999/1

1화 <1997년 11월 28일>







7화.


2001년 7월에 발매된 S.E.S. 의 4.5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앨범. 그때는 또 정규앨범 사이사이에 0.5를 넣어서 앨범을 발매하는 게 조금 유행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젝스키스도 3.5집을 낸 걸로 알고 있으니까. '서프라이즈'라는 타이틀을 달고 발매된 누나들의 4.5집! 타이틀곡은 '꿈을 모아서'라는 곡이었는데 이 곡은 원래 누나들의 일본 앨범 수록곡이었다.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곡 중 하나였다. '유메오 카사네데'라는 곡이었고 팬들 사이에서는 이 노래만큼은 꼭 한국 버전으로도 듣고 싶다고 얘기를 했었으니까. 이 곡 말고도 한국 버전으로 다시 태어난 일본 노래들이 몇 있었는데 'Unh Happy Day'도 있었고 'Little Bird', 'Searchin' For My Love' 등, 여기에 앨범 마지막 수록곡인 '달 끝까지' 역시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인데 이 곡은 KM 가요대전에서 딱 한 번 부른 적이 있다. (당연히 나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맨 앞에 앉는데 성공) 개인적으로 나는 누나들의 일본 노래 중 '유메오 카사네데'를 포함한 'Sign of Love', 그리고 누나들의 일본 첫 데뷔 싱글곡인 '하나가 되는 세계' (메구리 아우 세카이)를 가장 좋아했으나 아쉽게도 '유메오 카사네데'만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일본 데뷔 싱글곡 '하나가 되는 세계'는 노래도 노래지만 뮤직비디오가 정말 내 스타일이다.)


'LOVE'의 일본판인 '이츠마데모 언제까지나'와 누나들의 다섯 번째 싱글이었나? 'Sign of Love' 앨범은 정식판으로 어렵게 구하기도 했었다. 첫 싱글 앨범 '하나가 되는 세계'(메구리 아우 세카이) 역시 가지고 있었다. CD는 아니었고 테이프로 가지고 있었지만 이건 일명 백판. 세기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린 나이었음에도 나는 우리 집에서 먼 수유역까지 항상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간 뒤에 누나들의 앨범을 구매했다. 수유역에 교보문고가 있었으니까.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계동에서 수유역까지 간 이유는 단 하나. 나이가 그렇게 어렸음에도 나는 무조건 교보문고를 다녔다. 교보문고에서 구매해야 앨범 판매량 집계에 반영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 그런데 일본 앨범은 당연하게도 우리나라에 수입되지 않는다. 중학교 때는 내가 <요정 베이커리>를 만들기 전이었고 방구석 팬클럽이었기 때문에 어디서 구할 수가 없었다. 인터넷도 보급되기 직전의 시절이어서 천리안을 끼고 살았는데 그때 S.E.S. 팬들만 접속할 수 있는 '라페'(L.A.F.E)를 통해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길거리에서 백판으로 구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나 역시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나? 무작정 노원역 근처를 돌면서 백판을 팔고 있는 아저씨를 발견했었고 다행스럽게도(?) 누나들의 일본 첫 싱글 앨범 테이프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다시 4.5집 '서프라이즈' 컴백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모든 준비를 다 끝낸 후였다. 누나들의 4집 활동이 크게 짧지는 않았으나 3집에서 4집의 공백기간이 무려 1년이 넘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아쉬운 활동인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앨범의 타이틀이 아마도 '서프라이즈'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고 팬들을 위한 깜짝 선물 같은 셈이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더 열광하게 된 이유는 앞 이야기에서도 말했듯이 누나들의 첫여름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아마 음악 프로그램이 하나 더 생겼던 걸로 기억한다. KBS2에서 하던 주말 프로그램이었는데 이름은 뮤직 플러스였나? 이때까지만 해도 음반시장이 괜찮았다. 공중파 음악 프로그램만 KBS 뮤직뱅크, MBC 음악캠프, SBS 인기가요, 여기에 토요일 오후 5시에 방영해주던 KBS 뮤직 플러스까지 신설되면서 우리의 스케줄 또한 더 늘어났다. 누나들이 바쁜 만큼 나, 그리고 우리 <요정 베이커리>도 굉장히 바빴다. 일주일 내내 음악 프로그램 스케줄이 있으면 화요일엔 엠넷 '쇼킹 엠'을 가야 하고 수요일엔 KM '쇼 뮤직탱크'(줄여서 쇼탱)를 가야 하고 목요일엔 KBS '뮤직뱅크' (그때는 목요일이었다), 금요일엔 뭐가 있었지? 뮤직 플러스 녹화였나? 뮤직 플러스도 사실 뮤직뱅크와 비슷한 프로그램이었는데 뮤직 플러스만 생방송이 아니라 아예 사전녹화로 진행되었다. 금요일이 뮤직 플러스 공방을 뛰었더라면 다음 날인 토요일에는 당연히 '음악캠프'를, 그리고 일요일에는 '인기가요' 공방(공개방송 줄임말)을 뛰는 걸로 일주일을 마무리하곤 했다. 엄청난 체력이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한 체력이 필요했지만 아마도 지금 뛰라고 한다면 당연히 못 뛸 것이다. 그때는 다들 파릇파릇한 고등학생들이었으니까. 여기에 라디오 공개방송이나 지역 방송 무대까지 있으면 더 힘든 일주일이 되는 것이다.


엠넷 '쇼킹 엠' 로고

뜨거운 태양처럼 우리의 열정도 그만큼 불타 올랐다. 2001년 그해 여름은 우리에게 있어서 더 열정 가득한 계절이었고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완벽하고, 가장 뜨거웠고, 가장 잊지 못할 여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2001년의 여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8시쯤 사전 녹화로 진행하던 엠넷 '쇼킹 엠'은 남대문역에 있는 메사 팝콘홀이 무대였다. 뮤뱅이나 음캠, 인가 같은 공개홀은 텔레비전으로 봐서 알겠지만 좌석과 무대의 거리가 꽤 있는 반면, 올 스텐딩의 쇼킹 엠은 좌석이 아예 없기 때문에 공간 자체가 굉장히 좁았고 무대도 그만큼 작았다.


무대 앞이 전부 올 스텐딩이던 '쇼킹 엠'


쉽게 생각하면 홍대 라이브클럽이나 대학로 소극장 정도의 크기라고 보면 된다. 쇼킹 엠은 팬과 가수가 굉장히 밀접된 최고의 프로그램이었다. 여름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꽤 덥기도 했다. 올 스텐딩이어서 모든 가수들의 팬들과 다닥다닥 붙어 있어야 했고 사전 녹화 프로그램이었기에 녹화만 거의 2,3시간을 하는 게 '쇼킹 엠'이었다. 좁은 공간에 올 스텐딩인 공연이어서 애초에 풍선은 절대 금지. 그래서 어떤 가수의 팬들인지 잘 모르는 게 또 특징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허락된 게 플랜카드. 그때 유행하던 플랜카드가 미니 사이즈의 플랜카드였다. 딱 얼굴만 가릴 수 있을 정도의 그 사이즈. (아마 요즘 아이돌 팬들도 쓰는 걸로 알고 있다.)


여느 때처럼 나는 4호선 회현역 (아, 여태껏 남대문역이라고 한 것 같은데 정정해야겠다. 정확히는 회현역이다.)에서 그때마다 새로 나오는 <요정 베이커리> 회원들을 챙겼다. 이미 고정적으로 함께 공방을 뛰는 <요정 베이커리>의 정예 멤버라고 할까? 부시샵만 3명 정도 있었고 정예 멤버들만 해도 40~50명은 거뜬히 넘어 스케줄 하나당 우리 <요정 베이커리>는 최소 20~30명은 항상 공방을 뛰었다. (정모 이야기도 하겠지만 정모 때는 50~80명 정도 나오기도 했다.) 이때 처음 <요정 베이커리>의 신입으로 나온 친구들이 '유진 낭자'와 '수영 유치원', 그리고 수원에 살던 남자아이 한 명도 있었는데 한참 잘 다니다가 공부를 해야 한다며 공방을 끊어 닉네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닉네임은 기억나지 않는데 그 친구의 이름은 기억이 난다.) 내가 왜 이 세 친구를 한꺼번에 소환하게 되었나면 '쇼킹 엠' 때 이 세 명의 친구들이 한 스케줄에 같이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억난다. 회현역 개찰구 쪽에 서 있던 세 친구들의 모습. 여자였던 '수영 유치원'은 혼자서 오른쪽에 서 있었고 남자였던 '유진 낭자'도 혼자서 왼쪽에, 닉네임은 기억나지 않지만 욱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남자아이 역시 이 둘처럼 한쪽에 홀로 서 있던 모습. 시샵은 느낌만으로도 안다. 가장 먼저 '수영 유치원'에게 다가가


"혹시 요정 베이커리에서 나오셨어요?"


라고. 수줍게 "네"라고 대답했던 열다섯, 열여섯의 '수영 유치원'은 그날 아마도 반바지를 입고 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남자아이에게 가서 또


"혹시 요정 베이커리에서 나오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닉네임이 혹시...?"


"저 유진 낭자요"


"아, 유진 낭자님!"


신청을 받을 때 카페에서 닉네임과 휴대폰 번호를 먼저 받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회원들이 나올 때면 이렇게 닉네임을 확인했다. 이 세 친구는 말 그대로 한낱 한시에 똑같이 처음 나온 아이들이었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세 친구는 서로를 입사 동기처럼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요정 베이커리> 안에서도 이 세 명은 서로 더 친한 사이었다. 대부분 이렇게 한 번씩 현장을 나오면 그다음부터는 자주 나오는 편이다. 우리는 누나들의 공식적인 스케줄이 끝나면 우리끼리 더 즐거운 시간을 가지기도 했으니까. 그중에서 한낱 한시, 동시에 나온 '수영 유치원'과 '유진 낭자', '욱' 이렇게 세 친구는 하루가 멀다 하고 공방마다 나오는 정예 멤버가 되기도 했다. 언제였더라, <요정 베이커리> 거의 초창기 멤버였던 '도발 바다'가 어느 날 탈퇴를 선언했다.


"형, 나 이제는 요베 말고 다른 곳에서 활동할게"


"어디서?"


"그냥 나도 요베처럼 다른 파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라고 하며 착한(?) 탈퇴를 선언했다. '도발 바다'는 그렇게 <요정 베이커리>의 부시샵을 아예 떠났고 <에.로.파>라는 새로운 파를 창단했다. 하지만 나, 그리고 나머지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과 '도발 바다'는 굉장히 친하게 지냈다. 말도 없이 나간 것도 아니었고 누구와 싸워서 나간 건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처음에 <에.로.파>라고 짓는다고 했을 때도 내게 가장 먼저 물어봤었다.


"왜 근데 에로파야?"


'도발 바다'가 만든 <에.로.파>의 뜻은 '에스이에스 로드 매니저'의 줄임말로서 <에.로.파>였다. 어쨌든 그렇게 '도발 바다'의 탈퇴로 인해 부시샵의 부재가 있었으나 나는 곧바로 우리 <요정 베이커리> 정예 멤버 중에서 가장 나이가 있으면서도 나름 명문고를 다니고 있던 '새벽 하늘' 누나를 그 자리에 앉혔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이름으로 불러 주었지만 '새벽 하늘' 누나만은 '하늘 누나', '하늘 언니'로 불렀다. 왜냐하면 누나가 그때 본명이 마음에 안 들어서 한참 이름을 개명할 것이라고 했었는데 아마도 그 영향이 조금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편하게 우리는 누나의 닉네임을 따서 '하늘 누나', '하늘 언니'로 부르게 되었고 누나 역시 마음에 들어했다.


2001년 하리수 데뷔 당시

그때 '쇼킹 엠'의 MC는 하리수였다. 홍록기 생각도 어렴풋이 나긴 나는데 내 머릿속엔 하리수가 굉장히 깊게 박혀 있다. 그때 하리수는 트랜스젠더 연예인 1호였고 '새빨간 거짓말'로 굉장히 큰 인기와 화제를 불러 모았던 화장품 '도도'의 CF 모델이었다. 어딜 가나 하리수는 핫이슈 그 자체였다. 아직은 보수적인 대한민국이었지만 하리수의 등장은 그야말로 센세이션 그 자체였으니까. 그때 '쇼킹 엠'의 또 다른 매력으로 MC가 무대가 아닌 팬석, 그러니까 모든 팬들이 서 있는 곳에서 가수들을 소개했다. 2001년 여름, 특히 누나들과 활동이 겹쳤던 당시 여자 아이돌이 '베이비 복스'가 있었다. 그리고 아이돌이라기보다는 '이정현'도 활동이 겹쳤었다. 남자 아이돌은 '신화'가 겹쳤었는데 내가 신화를 더더욱 좋아하게 된 시기이자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베이비복스 5집

'쇼킹 엠'은 전부 사전 녹화였던 지라 한 가수의 무대가 끝나면 다음 가수의 무대까지는 약 15~20분 정도 텀이 있었던 것 같다. 잠시 무대 준비를 하던 사이, MC 하리수가 각 가수들의 수많은 팬들을 뚫고 중간으로 걸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리수 팬클럽은 물론, 각 가수들의 팬들도 이런 상황에서는 소리를 많이 지른다. (TMI로 하리수의 공식 팬클럽 이름은 '핫이슈'였다. 싸이 팬클럽 이름이 '싸이코'였고)  내 기억을 되짚어 볼 때 나는 아마도 그때, 그날 하리수를 실제로 처음 본 것 같다. 하리수가 내 앞으로 지나가는데 나는 정말 거짓말 1도 하지 않고 너무 깜짝 놀랐다.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혔을 정도였으니까. 그 이유는 바로 하리수의 실물 때문이었는데 웬만한 여자 아이돌보다 훨씬 예뻤다. 지금은 성형수술을 많이 해서 그때의 얼굴이 거의 없지만 데뷔 당시의 실물은 말도 안 되게 미쳤었다. 나는 물론이고, 친구들, 옆에 있던 다른 가수들의 팬들도 웅성웅성거렸던 게 선명하다. 여기저기서 너무 예쁘다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었으니까. 추가로 하리수는 팬서비스가 상당히 좋았다. 자신의 팬클럽을 잘 챙기기도 했고 우리 같은 다른 가수의 팬들에게도 잘해준 게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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