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피형아 Dec 28. 2021

#23. 나의 10대를 채워준 S.E.S.에게




열일곱 소년은 어떻게 권력을 쥐게 되었는가? (원제)


이전 이야기들을 먼저 보시면 새천년 감성을 더욱 즐길 수 있읍니다.



https://brunch.co.kr/@forsea5999/1

1화.



https://brunch.co.kr/@forsea5999/22

22화.







23화.



S.E.S. 누나들이 출연한 역대 드림콘서트 중에서 가장 팬들이 많이 왔었던 2002 드림콘서트. <요정 베이커리>가 먼저 시작해 각 팬커뮤니티에 모두가 한 마음으로 만든 사진들을 배포하여 일궈낸 결과물이었다. 그때 누나들은 3층 정가운데에 앉아 있던 우리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 그 규모의 팬석을 딱 한 번만 더 누려봤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누나들에겐, 우리들에겐 2002 드림콘서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장 많이 온 현장이었다. 3층에서 바라본 드림콘서트의 그 무대와 잠실주경기장을 꽉 채운 수많은 팬클럽의 풍선들이 보여준 거대한 그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오직 S.E.S.를 위해서 만난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 모두가 코흘리개였고 꼬깃꼬깃한 지폐와 동전들을 모아 끼니를 해결했던 2002년. 배는 고팠지만 참 행복했고 즐거웠다. 걱정도 없었고 처음엔 누나들을 볼 수 있다는 부푼 기대감으로 공방(공개방송)을 뛰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더 행복했던 우리들.



2002년 겨울이었나? 겨울이 오기 직전이었나? 공방을 밥 먹듯이 뛰던 우리들은 이미 알고 있었듯 그렇게 해체를 한 누나들. H.O.T.가 해체했을 때는 그렇게 큰 충격을 받은 나였지만 정작 누나들이 해체를 했을 때 나와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은 덤덤했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수영 누나(슈 본명)만 SM과 재계약을 했고 유진 누나와 바다 누나는 각자 갈 길을 갔다. 유진 누나는 본격적인 연기를 위해 배우의 길을 밟기 시작했고 바다 누나는 본인 만의 색깔을 찾기 위해 솔로 활동을 이어갔던 것. 나는 원래 바다 누나의 팬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혜진 누나와 까꿍 유진, 그리고 화정 누나 등과 같은 공식 임원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유진 누나를 따라 다니기 시작했다. 유진 누나와 혜진 누나가 워낙 친했고 혜진 누나 특유의 그 깡과 강단으로 유진 누나의 개인 팬클럽 <파이시즈> 창단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배우의 길을 가고 싶어한 유진 누나였지만 그래도 해체 후 솔로 앨범을 2집까지 내기는 했었고 여전히 건재했던 요정이었던지라 개인 팬클럽 <파이시즈>의 규모도 나름 작지 않았다. 그에 맞춰 나는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과 함께 <파이시즈> 1기를 가입했고 바다 누나와 수영 누나의 개인 팬클럽은 따로 가입할 수 없었지만 처음엔 다 같이 움직이며 누나들을 응원했다. 언제였더라? 바다 누나의 솔로 앨범, 즉 1집 쇼케이스 무대가 대학로(4호선 혜화역)의 어느 한 공연장에서 있었는데 <요정 베이커리>는 당연히 바다 누나를 응원하기 위해 모였다. 정확히 어떤 공연장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공연장 바로 옆엔 GS25시 편의점이 있던 건 생생히 기억난다. 줄을 서면서 이것 저것을 사먹었기 때문에.


바다 누나의 1집 쇼케이스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여전히 카리스마 최성희가 무대 위에 있었고 S.E.S.는 해체했지만 그때 공방을 다니던 여러 가수들의 팬클럽 모두가 그랬듯이 개인팬 따위는 껴주지도 않는 게 국룰이어서 우리는 세 명의 누나들을 따라 다니며 응원했다. 수영 누나는 곧바로 <KBS 뮤직뱅크>의 MC를 맡았고 매주 목요일 (금요일이었는지, 목요일이었는지 헷갈린다) 밤엔 우리 모두 여의도로 향했다. 수영 누나를 응원하기 위해서. 그래서 항상 우리는 MC석 바로 앞이나 옆에 앉아 펄보라색 풍선을 흔들곤 했다. 지금까지도 정확히 기억나는 것,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수영 누나의 팬서비스. 세 명의 누나들 중 가장 팬서비스가 좋았던 사람이 바로 수영 누나였다.



언제였을까? 거슬러 올라가야할지, 아닐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언젠가 한 번 수영 누나의 생일파티를 클라쎄에서 한 적이 있다.(수영 누나 어머님과 이모님이 운영하시는 이태원 카페) 그때 아마도 우리 <요정 베이커리>를 포함해 50~60명 정도 왔던 것 같은데 누나들을 워낙 자주 봐서 그랬는지 수영 누나가 그렇게 가까이 앉아 있었어도 내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보다는 정말 뭐랄까, 친누나가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다른 건 기억이 안 나지만 수영 누나가 우리들에게 해줬던 말이 생생하다.


"나는 너희들이 너무 부러워, 혹시라도 여기에 연예인을 꿈 꾸는 친구들이 있다면 정말 진지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길 바랄게,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연예인을 하지 않았을 거야"


라고. 우리는 알고 있었다. 누나들 중 가장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고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성격과 바깥에서의 성격이 똑같았기 때문에. 수영 누나는 그 정도로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S.E.S. 해체 후에 가장 힘들어했을 사람도 아마 수영 누나였을 것이다. 혼자서 다 해야 하니까 유리같은 그 여린 마음에 얼마나 큰 짐이었을까...물론 나는 세 사람 모두를 응원하는 팬이었지만 누나들이 해체 후 지금까지?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 꿈 속에 누나들이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었으나 유독 수영 누나는 내 꿈에 종종 나오곤 했다. 해체 후 지금까지 유진 누나를 훨씬 더 응원하고 있지만 왜 수영 누나만 내 꿈에 나왔던 걸까?



유진 누나의 개인 팬클럽을 본격적으로 창단하기 위해서 혜진 누나와 까꿍 유진, 그리고 내가 압구정에서 한 번 모인 적이 있다. 누나들이 S.E.S.로 활동할 당시에 서울, 경기, 대구, 마산 할 것 없이 홍길동처럼 따라 다니느라 공식 팬클럽 임원이었던 형과 누나들의 눈에 들어 유진 누나의 개인 팬클럽 창단에 맞춰 임원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도 있었지만 나는 <요정 베이커리>를 만든 시샵이자 이미 많은 회원들과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신념을 지키고 싶었다. 물론 나에게도 좋은 기회였던 건 사실이지만 나는 <요정 베이커리>를 뒤로 할 수 없었다. 임원을 한다고 했어도 <요정 베이커리>는 그대로였겠지만 뭐랄까, 나만의 원칙이라고 할까? 그 원칙과 신념을 져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나만큼 많이 다닌 <요정 베이커리>의 부시샵 까꿍유진이 유진 누나의 개인 팬클럽 공식 임원, 서울 회장을 맡게 되었다. 그렇다고 까꿍유진이 <요베>를 떠난 건 아니었다. 여전히 내 친구였고 우리 <요정 베이커리>의 주축이었다. 내가 없을 때 힘이 되어준 그런 존재.


개인 팬클럽의 이름을 뭘로 할 지 엄청나게 고민했다. 그러던 중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처음엔 아프로디테가 물망에 올랐었다. 미의 여신을 상징하고 있었기 때문. 그러다가 누나의 생일인 3월 3일에 맞춘 <파이시즈>로 결정되면서 1기 창단식을 대학로의 한 공연장인 <S.H클럽>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까꿍유진이 시간이 되지 않아 내가 혜진 누나와 함께 대학로의 모든 공연장을 하루 종일 다녔던 기억이 난다. 거짓말 안 하고 거의 7,8시간을 돌아다닌 것 같은데 혜진 누나의 체력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음악캠프> PD와 싸울 정도로 강단과 깡이 대단하던 사람이라서 그런지 단 한 개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 공연장은 유진 누나의 팬클럽 창단식 장소 목록에서 가차없이 제외되었다. 그러다가 어쨌든 S.H.클럽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는데 사실 S.H클럽은 거의 시작 때 방문한 곳 중 한 곳이었다.


"아무래도 처음에 봤던 S.H클럽이 가장 낫지?"


다리가 아파서 죽기 직전이었던 나는 그냥


"응..."


이라고 대답했다. 내 눈엔 뭐 거기서 거기였지만 혜진 누나의 눈에는 아니었나보다. 그래서 연예인 팬클럽 회장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요정 베이커리> 운영하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만약에 공식 임원을 했었더라면 얼마나 더 큰 고충과 노동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눈앞을 가린다. 유진 누나는 <러빙유> 이후에 <마지막 춤을 나와 함께>라는 작품으로 브라운관에 등장한 것 같은데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필모그래피 확인을 해보니 두 번째가 맞다) 뭐, 정확히는 단막극이었던 <남과 여>가 첫 주연작이긴 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축전 (홍차성희보라)


해체 전이었는지, 해체 후였는지 모르겠는데 언젠가 한 번은 유진 누나의 생일날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과 모여서 청담빌라(바다 누나와 유진 누나가 살던 숙소)를 찾은 적이 있었다. 3월 3일. 아직은 어린 나이었기 때문에 누나에게 생일 선물을 전달하고서 빨리 집으로 가야 하는데 소위 말하듯 더럽게 안 오는 것이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흘러서 밤 10시를 훌쩍 넘었던 것 같은데 드디어 누나의 하얀색 EF 소나타, 차량번호 1779가 골목에 들어선 것이었다. 청담빌라는 지하에 주차장이 있었는데 숙소 앞에서 기다리던 우리들을 본 유진 누나가 잠시 창문을 열어 인사를 해주었다.


"나 기다린 거야?"


"누나, 생일 축하드려요"


"언니, 생일 축하드려요"


혜진 누나가 준비한 이벤트였던 지라 유진 누나는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서 20명 정도 되는 우리들과 함께 그 지하 주차장에서 케이크 촛불을 불고 간단한(?) 담소를 나눈 뒤,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을 한 번 찍고서는 집으로 들어갔다. 그게 2002년이었는지, 2003년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둘 중에 하나로 기억한다. 일명 직찍사. (직접 찍은 사진) 그 직찍사를 내가 가지고 있었는데 세월이 워낙 오래되어서 그런지 잃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내 기억 속 그 날의 장면은 여전히 생생하다. 긴 생머리의 유진 누나는 당연히 중간에 서 있었고 양 옆, 그리고 누나의 앞에 무릎을 꿇어 사진을 찍었다. 케이크와 선물을 들고서. 누나는 기억할까? 청담빌라 지하 주차장에서 생일파티를 했던 걸. 비록 사진은 없어졌지만 그 기억 만큼은 빛바래지 않은 것처럼 내겐 너무나도 소중한 추억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강원도 원주에서 있었던 <SBS 인기가요> 공방 때


사는 게 사는 지라 지금은 어릴 때처럼 응원을 직접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내 마음 속 아이돌은 누나들이고 여전히 내 마음 속 여배우는 유진 누나다. 참 희한하다. 막상 누나들을 미칠 정도로 따라 다니면서 응원하고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눈 횟수가 가장 많은 사람은 정작 나인데 유진 누나는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참 재밌는 건 유진 누나는 <요정 베이커리>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있다. 그래서 누나에게 내 이름을 밝히는 것보다


"누나, 저 요정 베이커리 시샵이에요"


라고 하면 단번에 안다. 가장 오래된 공방파, 최초로 만들어진 공방파, 규모가 가장 컸던 공방파라는 걸 지금까지 알아주고 있다. 2016년 12월, 누나들의 데뷔 20주년에 맞춰 단독 콘서트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를 기념하여 <요정 베이커리>에서 정말 오랜만에 현수막을 만들었었다. 세종대학교 대양홀에서 이틀간 열린 S.E.S. 데뷔 20주년 콘서트. 첫날 오전부터 모여서 이 현수막을 어디에 걸어야 할 지 많은 고민을 하다가 콘서트장에서 가장 가까운 어린이대공원역 *출구(기억나지 않는 출구 번호)에 걸기로 했다. 예전하고는 달라서 그냥 걸지는 못했고 나와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은 역장실을 직접 찾아 이유(?)를 설명 드렸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S.E.S. 팬인데요. 오늘 세종대학교 대양홀에서 콘서트가 있어서요. 혹시 *출구에 저희 현수막을 좀 걸 수 있을까요? 시설 훼손은 절대 안 하고 밤 11시까지만 걸어 놓은 후에 깨끗하게 제거 할게요"


라고. 그 순간 역장실 안에 계신 역장님과 직원들의 시선이 참으로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이지만 순간적으로 어릴 적 그 깡이 나온 것이다.


"그래요. 밤 11시까지요?"


역장님은 단번에 허락해주셨고 우리는 근처 던킨도너츠에 들어가서 감사의 의미로 역무실을 다시 찾아 전달 드렸다. 기분이 좋아진 우리들은 들 뜬 마음에 어린이대공원역 *출구에 현수막을 걸었고 하나 둘 씩 그 출구로 나오는 팬들에게 인증샷이 되었다. 그 순간은 한없이 어리기만 했던 그때의 우리가 느꼈던 그 설렘이었다. 누나들의 콘서트가 끝난 후, 일명 퇴근길. 누나들이 각자의 차를 타고 빠져 나가는 출구 쪽에 현수막을 다시 걸었다. 가장 먼저 나간 수영 누나가 우리들의 현수막을 보고 창문을 열어 간단한 미니 팬미팅을 했다. 본의 아니게 현수막을 들고 서 있는 우리들의 그 자리가 미니 팬미팅이 열리는 장소가 되었던 것. 다른 팬들도 우리 쪽으로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유진 누나가 나왔는데 설마가 역시. 그냥 나가려던 매니저에게 유진 누나가


"잠깐만! 잠깐만! 나 이거 찍을래!"


유진누나가 인스타에 올려준 사진


하면서 우리 <요정 베이커리> 현수막을 찍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온 바다 누나. 처음부터 창문을 열고 온 바다 누나는 우리의 현수막을 가장 뒤늦게 발견했는데 우리 현수막을 본 바다 누나의 기분이 갑자기 업 되어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를 질렀다. 대박이라며.


어리기만 했던 그때. 언젠가 한 번은 혜진 누나의 호출로 집에 있다가 압구정 로데오거리까지 간 적이 있었는데 봉추찜닭이었나? 예전 피자헛 있는 그쪽 찜닭집이었는데 거기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혜진 누나, 그리고 당시 신화창조 전국 회장이던 은지 누나, 그 외 신화창조 임원들이 더 있었나? 내 기억으로는 그 자리에 나를 포함해서 5,6명 정도가 있었는데 혜진 누나는 정말 신기한 게 여러 팬클럽 회장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낸 사람이었다. 그때 나는 신화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신화창조의 전국회장과 지금 겸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미치도록 놀라웠었다.


유진누나의 솔로활동 때 받은 싸인


내 인생 중 가장 찬란했던 2001년, 그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의 그 열기처럼 나의 2001년과 2002년은 불꽃 그 자체였다. 압구정 맥도날드 1호점, 아니면 청담사거리에 있는 청담점에 모여 늘 정모 준비를 하기도 하고 돈이 없어 햄버거로 끼니를 떼우던 나의 열일곱, 열여덟. 본더치가 유행하기 전, MF가 먼저 유행을 했던 압구정 로데오거리, 디키즈, 갤러리아 백화점, 그리고 간혹 돈이 좀 생기면 햄버거 대신 치킨을 먹었던 파파이스, 로데오거리 안 2층에 있던 아이스베리, 그 옆 건물 지하에 있던 즉석떡볶이, 바다로 가는 기사, 닭으로 가는 마을, 우리가 늘 정모 하던 신촌 민들레영토, 한 달에 한 번쯤은 다 같이 돈을 모아 외식다운 외식을 했던 피자헛과 정성본 칼국수. 스무살이 된 기념으로 청담사거리 건너편에 있었던 하자(HAJA)포차, 유진 누나의 생일 선물로 혜진 누나와 같이 골랐던 BNX.



가끔은 너무 돌아가보고 싶다. 2002년의 그 햇빛과 달빛을 다시 느껴보고 싶고 어릴 적 우리들을 다시 만나 못 다 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어렸던 누나들을 다시 만나고 싶고 그때보다 훨씬 더 열정적으로 공방을 뛰어보고 싶다. 한없이 젊었던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머니의 얼굴과 손을 꼭 한 번 다시 잡아보고 싶고 안아보고 싶은 나의, 우리의 2000년대. 그 시절로 갈 수 있는 티켓값이 상상을 초월해도 어떻게서든지 돈을 모아 가보고 싶지만 절대로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가끔은 그때의 그리움이 목까지 차올라 어쩔 줄 몰라하기도 한다. 참 재밌었다. 누구는 창피한 흑역사라고 하지만 나에겐 그때만큼 찬란했고 열정적이던 시절도 없었으니까...


올해 봄부터 써내려갔던 나의 에세이를 가장한 소설, 소설을 가장한 에세이 <열일곱 소년이 권력을 쥔 방법>이 모두 끝났다. 7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나, 그리고 이 글을 함께 읽어준 그 시절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은 잠시나마 열일곱, 열여덟살로 돌아갈 수 있어 너무나도 행복했다. 이제 이 글도 끝이 났으니 그때의 그 추억들은 다시 서랍 속에 고이고이 간직하게 되겠지...?



- 고마운 <요정 베이커리> 친구들, 그리고 우리를 만나게 해준 누나들에게 바치며..-







이전 12화 #22. 2002 드림콘서트 (파도타기 연합)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