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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립체 Mar 15. 2020

미움도 분노도 괴로움도 그녀 숨결에 녹아서 사라질 거야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 (스포일러 포함)

 1. 낯설었던 첫인상

 '여신님이 보고계셔', 이 뮤지컬은 제목부터 독특하다. <여신님이 보고계셔> 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일지 상상은 가는지? 심지어 이를 줄여 말하는 애칭이 '여보셔'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다룬 뮤지컬 일지 너무나도 궁금해졌지만, 소재를 확인하고선 보러 갈 용기가 더 떨어져 버렸다. 한국전쟁 당시 군인들의 이야기라고...?

여러분은 전쟁물을 좋아하시는가? 나는 굳이 따지자면 싫어하는 편에 가깝다. 전쟁 영화들 중 많은 영화들은 애국 프로파간다를 품에 가리고 관객에게 뽕(?)을 채워 넣으려 한다. 부감 샷 너머로 영웅은 돋아나고, 대다수는 배경에서 살해당한다. 선과 악은 도시락 반찬통처럼 뚜렷하다. 게다가 시끄럽고 보기만 해도 고단하다. 으악!

그러던 차, 뮤지컬 덕구 지인이 함께 보자며 표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큰 기대를 하지 못했다. 매번 플릿가 파이집 2층 토사장님을 뵙기 위해 전국 최초 뮤지컬 전용 극장 잠실 샤롯데시어터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던 나는 여보셔로 소극장 뮤지컬의 첫걸음마를 뗀 뮤린이였으니까.

작은 무대, 오케스트라의 부재, 내가 앉은 2층은 몸을 조금만 앞으로 숙이면 무대까지 와르르 굴러 떨어질 것만 같은 경사가 있었다. 음악감독의 팔락 팔락 날갯짓(?)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오케스트라가 없이 mr을 틀어준다는 사실 자체가 살짝 충격이었지만, 안내 방송이 나오며 극장 안이 조용하고 어두워지자, 반사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와!

극이 시작된 순간부터 여보셔에 홀딱 반한 채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쫓아가고 있는 나를 뒤늦게 발견할 수 있었다.

2. 매력적인 세트 활용

이것이 소극장 극의 매력일까? 아직 내가 소극장극의 매력은 이것이다!라고 할 만한 짬바는 아니기에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여보셔는 가진 것 이상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 극이라는 것이다.

여보셔는 무대는 작았지만, 설정된 공간이 바뀌었을 때 굉장히 효과적으로 세트를 활용했다. 꽃과 풀이 만발한 무대 뒤쪽 경사로는 수풀 너머 신비로운 여신님이 등장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회상 씬에서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골목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여러 인물들이 퇴장하고 등장할 때 자연스러운 퇴장/진입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순호가 형을 떠나보내고, 계속되는 악몽에 괴로워하는 씬에서는 폭격을 당한 듯 폐허가 된 건물 잔해들이 무대 위쪽으로 드리운다. 어두운 무대 한가득 보기만 해도 불안한 느낌을 조성하는 어둡고 붉은 조명이 어지럽게 쏟아진다. 순호는 무대 중앙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절규하는데, 이때 순호의 공포와 절망은 바닥의 핀 조명 하나로 극대화된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는 바닥에 설치된 하얀 핀 조명이 강렬하게 쏘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곳. 넘버에도 등장하는 꽃나무는 무대 오른쪽 위에 커다란 존재감을 자랑하는데, 그 꽃나무에 살짝 걸쳐 뜬 달이 인상적이다. 어두운 밤 하얗게 뜬 달과 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나무라니! 세상에! 지금 생각하니 육성으로 감탄하고 싶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여신님'이라는 존재가 상징하는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는 것, 이 뮤지컬의 주제를 거의 완벽하게 구현한 세트가 아닐까?

앗...! 달이 사라져버렸다(?) 해가 뜨고 있다...?

3. 무대의 접힌 곳을 펼쳐라, 연기와 상상

여보셔의 배우들에겐 이런 미션이 주어졌다: 배는 없지만 흔들려야 한다. 수풀은 없지만 헤매야 한다. 그래서 배우들은 없는 배 안에서 이리저리 비틀대며,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슬로모션으로 쓰러지기도 한다. 점멸하는 조명 처리는 그야말로 화룡점정.

서로를 믿을 수 없어 어두운 밤중 무인도를 돌아다니며 방황하듯 누군가를 추격하는 장면에선, 없는 수풀을 헤치며 인물들끼리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이 때다. 좁으면 좁다고 할 수 있던 이 무대가 접혀있던 종이를 펼치듯 광활하게 펼쳐지는 순간이다.

무대의 접힌 곳, 바로 배우의 연기와 관객의 상상을 펼쳐내는 것이다.

그리고 배우들은 이렇게 크게 펼쳐놓은 무대를 관객석까지 끌어들이기도 한다. 고기잡이를 하러 관객석에 와서 약 3열 정도까지 열심히 미역과 고기를(관객의 마음을...) 잡는다.


4. 작은 이야기로 큰 이야기의 경계 허물기

이제 와서 이야기하는 게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아기자기한 제목과 달리 이 뮤지컬의 시대적 배경은 한국전쟁, 등장인물은 군복 차림의 국군과 인민군, 공간적 배경은 포로 수송선이 난파되어 잠시 머물게 된 어느 무인도다.

앞서 도입부에서 내가 전쟁물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여보셔에도 총, 칼, 폭탄은 나온다. 총도 쏘고 칼도 나오고 폭탄 터지는 소리도 나지만 그건 이 극의 아주 일부다. 이 극은 문득 유쾌할 때 눈물이 울컥하고 눈물이 흐르다가 단번에 웃음이 터진다.

여보셔의 인물들은 꽃과 풀이 만발한 무인도에 고립된 채 자신만의 여신님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방법을 터득한다. 순도 100% 처절하기만 한 인생도, 찬란하기만 한 인생도 없듯이 이들은 전장 한가운데서도 빛나는 여신을 찾아내고 사람과 사랑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물 개개인의 과거와 성격을 굉장히 섬세하고 밀도 높게 묘사한다. 이들이 믿는 여신님은 손목이 얇고 입술 옆에 귀여운 점이 있는 이웃집 누나가 되었다가, 허리가 다 굽은 어머니가 되었다가, 또 나비처럼 원투 쓰리 포 춤을 추는 여인이 되기도 한다. 이들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절망이 목 끝까지 차오른 순간에도 마음속에 들풀처럼 피어있는 희망을 잊지 않고 찾아낸 것이다.

이 극의 마지막은 시원섭섭하다. 이들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답을 생각하며 머릿속에 분단의 현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이들이 목 터져라 외쳤듯 정말 누구를 위해 저 재밌고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싸워야 했던 걸까? 가족을 친척을 친구를 잃어야만 했을까?

'당장은 다시 만나지 않는 게 좋겠지, 우선 오래 살자.'

이들 때문에 극 내내 울고 웃었던 우리는 꼭 이 사람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만 같다. 그래서 단순하지만 그 대사가 주는 여운은 대단하다.

5. 중독성 갑 넘버 열전

여보셔는 한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중독성 강한 넘버를 자랑한다. 게다가 창작 뮤지컬의 좋은 특징 중 하나인 가사의 자연스러움과 유려함까지 갖췄다.

진희와 순호에게 불러주는 영범의 자장가 "꽃나무 위에"는 마음을 평화롭게 도닥인다. 순호가 여신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 노력하는 "그대가 보시기에"는 어린아이의 재롱잔치처럼 사랑스럽고 향기롭다.(어이구어이구 오구오구!) 비명과 눈물이 범벅된 "악몽에게 빌어"는 나쁜 기억과 꿈의 혼재가 선명히 느껴진다. 희생을 통한 통합을 목적으로, 특히 국가에 의해 수없이 강조되던 위인전 이용법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장군님이 살아계셔"는 또 어떤가. 극장을 나와 걸어가다가도 문득 넘버를 흥얼거리게 된다. 여보셔는 좋은 극이다.

p.s. 연우무대의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의 여신님 최연우 배우님. 이 정도면 운명적 페이트 아닐까요?(?)

p.s.2. 아... 저도 늘순호 실제로 보고 싶어요. 왜 전 입덕이 이렇게 늦었을까요?

p.s.3. 들어간 사진은 커튼콜 당시 제가 직접 촬영한 사진입니다 :) 커튼콜 시에는 촬영이 가능한 공연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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