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딸은 부모님이 궁금해
브런치스토리 팝업스토어에서 챙겨 온 30일 치의 글감 중 1일 차.
이 주제를 보자마자 바로 하나의 기억이 떠오를 줄 알았는데, 기억들이 뒤엉켜 떠올리는 데 며칠이 걸렸는지 모른다. 나의 첫 기억은 부모님이 심어주셨으니 아무래도 부모님 얘기를 해야겠다.
나는 서른을 훌쩍 넘기고도 철없는 못난 딸이다. 내가 철이 들었던 적이 있던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은 나로 인해 애 태웠고, 전전긍긍했다. 성인 남성 키를 훌쩍 넘는 폭설이 내린 날 태어났으니, 출산하러 가는 병원부터 얼마나 고되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지금도 이따금 과거 이야기가 나오면 '어후 말도 마라' 손사래부터 치신다.
성질머리가 올라오던 때, 사춘기와 갱년기가 겹친 우리 집. 대통령 할애비가 와도 어쩌지 못한다는 중2병에 심하게 걸렸다. 탈선을 한 건 아니지만, 당시 슈퍼주니어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요, 콘서트나 팬사인회에 가지 못하게 막는 부모님에게 매일같이 대들었다. 책상 앞에 붙여둔 브로마이드를 내가 자는 사이 떼어버린 엄마에게 다음날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말없이 친구 집에 놀러 간 후 핸드폰을 꺼버리기도 했다.
“갱년기라 엄마도 우울한데 엄마 좀 이해해 주면 안 될까?” 힘들게 본인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엄마에게는 “갱년기가 뭐! 어쩌라고!”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아빠는 나한테 해준 게 뭐야!” 부모에게 해서는 안될 말을 하며 지독한 사춘기를 보냈다. 갱년기를 이길 사춘기는 없다고 하지만, 적어도 우리 집은 사춘기가 이긴 듯 보였다. 갱년기를 겪는 부모의 속이 다 타버리는 줄도 모른 채.
내가 왜 그랬을까.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부모의 가슴에는 이미 대못이 잔뜩 박혀있다. 이제 와서 못자국을 지우는 건 어렵지만, 박힌 못을 빼 보려 한다. 많고 많은 기억 중에 가장 첫 번째 기억이 사춘기에 대한 후회라니. 웃기게도 이제야 철이 들려나보다.
나의 부모님은 나의 이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부모님을 인터뷰 한 이유는 간단하다.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이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답변이 궁금하기도 했고, 질문하기 전 부모님의 답을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부모님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부모님의 흥미가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모르겠다. 우리 엄마 아빠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Q. 내가 사춘기일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 엄마: 엄마의 잔소리가 싫다고 했는데 딸의 입장에서는 잔소리였겠으나 엄마의 입장에서는 딸을 교육하기 위함이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당시엔 딸이 더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도록 희망을 기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래도 엄마의 마음엔 대못이 박히지 않았다. 부모는 자식의 나쁜 것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엄마는 딸이 대못을 박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아빠: 저게 왜 저럴까. 속상했다.
분명 속상했던 기억이 한가득일 텐데 자식의 나쁜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니. 나도 훗날 나의 자식의 나쁜 것은 기억하지 않는 엄마가 될까.
Q. 좋아하는 색
- 아빠: 하얀색, 깨끗하니까.
아빠가 하얀색을 좋아하는지 처음 알았다. 아빠의 옷장은 늘 무채색이 가득했고, 그중에서도 어두운 색이 많았는데, 하얀색은 쉽게 더러워지기 때문에 일하면서 잘 입지 않았던 것이다. 소중한 날에 꺼내 입는 옷이 하얀색이었는데, 좋아하는 색이었기 때문에 아껴두었나 보다.
- 엄마: 빨간색, 칙칙한 색보다는 밝은 색이 좋으니까.
맞아, 엄마는 빨간색을 좋아한다. 그 때문인지 엄마의 옷장에는 유독 붉은 계열의 옷이 많다. 실제로 빨간색을 입었을 때 얼굴이 제일 밝아지는 엄마.
Q. 좋아하는 음식
- 엄마: 고기류, 맛있잖아.
- 아빠: 얼큰한 것(추어탕, 매운탕 등)
고기를 좋아하는 엄마는 매번 고기반찬을 준비하고, 아빠는 땀 빼는 음식이 좋아서 외식 메뉴는 늘 추어탕이었다. 추어탕 집에서 돈가스를 팔았기에 어린 나는 돈가스를 시켜 먹었고, 지금은 아빠와 같이 땀을 쭉 빼며 추어탕을 들이켠다. '시원하다!'는 말과 함께.
Q. 요즘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
- 아빠: 없다.
나는 아직도 세상에 재미난 것 투성인데, 재미있는 게 없다는 아빠의 말이 아팠다. 내가 맘껏 재미있어 할 수 있도록 많은 경험을 선물해 준 아빠가 재미있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많은 경험을 선물해 드려야겠다.
- 엄마: 요가, 몸이 좋아하는 것이 느껴진다. 허리나 팔, 다리, 손가락 안 아픈 곳이 없었는데 아프던 몸이 나아지는 게 느껴져서 요가가 재밌게 느껴진다.
아빠와 다르게 재미있는 것이 있는 엄마라서 한편으로 감사했지만, 아픈 곳이 나아진다는 이유로 재밌게 느껴지는 것이 조금은 속상했다.
Q. 30년을 먼저 산 소감
- 엄마: 고난의 시간이었지만 인내하면서 감사하고, 자녀를 바라보는 것도 감사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복에 순종하지 못했던 것의 아쉬움과 죄송함이 있다.
- 아빠: 자식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좋다.
순 자식밖에 모르는 부모님이다. 본인의 인생을 돌아볼 줄 알았는데, 그 안에서도 자식은 절대 빼놓을 수 없나 보다. 부모는 다 이런 것일까. 자식의 입장에서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하지만, 한편으로는 슬프다.
Q. 인생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인생을 대하는 태도
- 아빠: 나그네 같이 왔다가 가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
- 엄마: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묵묵히 남은 길을 가는 것. 진실하고 신실하게
철학적인 질문이다. 고작 30여 년의 인생을 살아온 내가 감히 답할 수 없는 질문. 부모님은 다를 줄 알았는데, 이 질문에서 많은 생각을 하신 듯하다. 크리스천인 우리 가족에게 하나님을 빼놓고 논할 수 없는 인생이다. 나그네처럼 왔다 가는 삶을 진실하고 신실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행복이 아닐까.
Q. 같은 모습으로 다른 인생을 산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 엄마: 상상하는 게 의미가 없다. 지금 내 인생이 좋다.
- 아빠: 지금처럼 살고 싶다.
질문의 의도는 '부모님이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였다. 부모님 세대는 현실과 가족 챙기기에 열중한 탓에 본인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기에 온전히 본인만의 인생을 산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건넨 질문이었다. 이것도 해보고 싶었고, 저것도 해보고 싶었다며 상상만으로 기뻐할 줄 알았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 슬프다.
Q.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
- 아빠: 과거는 돌아보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는 것
어쩌면 현재에 충실하는 것이 삶을 가장 후회 없이 살 수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종종 과거를 그리워하며 후회하는데, 아빠는 매번 현재에 충실하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했다. 아빠는 담담했지만, 나는 왜 아빠의 답을 듣고 공허해질까.
- 엄마: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결과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없는데 상상해서 뭐 한담.
처음 이 대답을 듣고 우리 엄마는 T구나. 확신했다.
끈질기게 '상상은 해볼 수 있잖아!'라고 말하며 이끌어 낸 대답을 듣고 눈물이 터져버렸다.
- 엄마: 어린 시절이 너무 슬퍼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데, 만약 돌아간다면 교복 입은 학생 하고 싶다.
엄마는 공부를 정말 많이 하고 싶어 했는데,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학교가 아닌 공장으로 향해야 했다. 공장으로 향하면서도 교복 입고 학교 가는 학생들이 부러웠다고 말하는 엄마의 눈빛에는 슬픔이 서려있다. 교복이 얼마나 입고 싶었을까. 학생이 얼마나 하고 싶었을까. 훗날 자신의 힘으로 졸업장을 취득해 버리고 지금은 존경받아 마땅할 엄마지만, 어린 시절의 엄마는 포기를 먼저 배웠다. 그게 슬프다.
Q. 미래로 갈 수 있다면 무엇을 보고 싶은가
- 엄마: 자녀들이 주 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기쁨으로 사는 모습
본인의 삶에 빗대서 답변해 달라고 했건만, 자식 생각뿐인 엄마다.
- 아빠: 건강하고 행복한 모습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아서 그럴까. 미래로 갔을 때 건강한 모습이 보고 싶다니... 아빠는 건강할 거다. 반드시.
Q. 2025년의 목표
- 아빠: 우리 가족 건강하고 행복하게
- 엄마: 주의 말씀 안에서 인도하심을 순종하며 주시는 복을 가벼이 흘려보내지 않는 삶, 자녀들이 주님을 의지하면서 감사함으로 건강하게 각자의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조금 이르지만 다가올 해의 목표에도 자식은 빠지지 않는 부모다.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온 부모님, 매일을 감사와 기도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
답변할 때만큼은 누군가의 부모가 아닌 각자의 인생에 집중하기를 바랐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다. 질문 자체 만으로 부모님께 본인의 삶을 생각하고, 상상할 시간을 드리고 싶었는데, 본인의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몇 개 되지 않는 질문이지만, 부모님에 대해 하나 더 알게 된 기분이다. 마음 한 켠이 씁쓸해진 건 왜일까. 질문지를 받아 들었을 때 부모님은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까. 못난 딸은 부모님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