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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Vet Feb 01. 2021

지금 여기에 <살아남은 사람들>

아픔을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려 깊은 위로

배경 이미지: <살아남은 사람들> 메인 포스터 ⓒ알토미디어(주)

▲ <살아남은 사람들> 보도스틸 ⓒ알토미디어(주)


 헝가리가 배경인 <살아남은 사람들>은, 홀로코스트로 주변인을 잃은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특히 집단의 아픔이 아닌, 개인 각각의 아픔을 다룬다는 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만의 정체성이 빛난다. 그걸 증명하듯 영화의 배경은 세계 2차대전 도중이 아닌 2차대전 직후, 1948년을 배경으로 한다. 전쟁의 참상이 벌어지는 와중이 모두의 아픔을 조망하는 것이 아닌, 전쟁 직후 상실의 고통을 차츰차츰 삭이는 개개인의 내면을 비춘다.


 영화가 시작하자, 한 병원의 복도가 보인다. 카메라는 천천히 걸어간다. 프레임 안으로 간호사가 등장하며, 카메라를 안내한다. 컷이 전환되고 의사가 산모에게 걸어가는 장면이 이어진다. 시작은 의사의 시점 쇼트였던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영화의 주인공, 의사 ‘알도’라는 개인의 시점으로 그렇게 시작된다. 개인의 시점을 취하면서 관객들은 인물들의 일상을 들여다보게 되고, 이런 일상성은 여러 홀로코스트 영화 중 <살아남은 사람들>만의 독자성으로 자리매김한다. 인물들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잊지 못하는 과거의 아픔 때문에 아파하고 슬퍼한다. 그럼에도 서로 의지하며 아픔을 견뎌내는 것, 그것 또한 일상의 한 부분임을 보여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따스한 위로를 건넨다.


▲ <살아남은 사람들> 보도스틸 ⓒ알토미디어(주)


 영화는 영화 내 인물들의 시점만을 취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영화에는 흥미롭게도 카메라가 ‘거리를 두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밤의 거리에서 알도와 또 다른 주인공 ‘클라라’가 포옹을 하는 장면, 알도의 아픔이 담긴 사진들을 마주한 클라라가 울며 엎드리는 장면, 알도와 클라라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떠난 이들을 위해 건배하는 장면까지 등등. 감정이 충만한 영화의 결정적 순간마다 카메라는 은근하게 거리를 둔다. 이렇게 카메라가 거리를 두는 행위는 인물들끼리 공유하는 감정을 파헤치지 않고, 그들만의 것으로 놔두는 배려이다. 섣불리 아픔에 끼어들지 않고 기쁜 감정에 침투하지 않는 것, 이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픔을 사려 깊게 조망한다.


 이런 거리 두기는 또 다른 층위에서도 흥미롭다. 관객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카메라를 통해 그 시간 동안 영화 내 세계 속에 존재하기 위한 행위이다. 이런 관점을 통해 <살아남은 사람들>의 거리 두기를 바라본다면, 이는 관객 개개인의 시점을 마련하는 시도이다. 카메라의 렌즈가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이 아닌, 관객이 능동적으로 영화 속 세계 내에서 인물을 바라보게 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아픔을 갖고 있다. 영화는 인물들의 아픔을 멀찍이 보여주면서, 관객들이 자신의 아픔을 곱씹어 볼 수 있는 자리를 살며시 마련하고 있다.


 능동적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영화 속 순간들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영화 안의 따스한 태도로 끝나지 않고 영화 바깥의 현실까지 떠올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전까지 많은 사건을 통해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10년 정도만 되돌아 봐도 2014년에 우리는 큰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2020년은, 한 해가 아픔과 고통의 해였다. 질병이 전 세계를 덮쳤고,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떠났다.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우리는 그 모든 사건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슬픔의 시간과 떠난 사람들을 잊지 못하고, 또 잊지 않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런 우리에게 잔잔히 다가오는 위로이다.


▲ <살아남은 사람들> 보도스틸 ⓒ알토미디어(주)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영화 안으로 다시 돌아오려 한다. 영화 중간에 클라라가 악몽을 꾸는 장면이 있다. 클라라는 게토에서 군인이 자신의 주변인을 죽이는 꿈을 꿨다 말하며 알도에게 기대서 흐느낀다. 그때 알도는 이제 자신은 악몽을 꾸지 않고, 떠난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는 말로 클라라를 위로한다. 알도는 이미 그 아픔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아는 사람이다. 클라라는 아직 그렇지 않다. 아픔을 계속 부정하고, 희박한 희망을 놓지 못한다. 하지만 클라라는 이야기의 진행과 함께 그 아픔을 마주하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영화는 알도 개인의 시점으로 시작했지만, 클라라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점으로 마무리된다. 고통을 직시할 수 있는 클라라와 그런 클라라를 바라보는 관객,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 배급사 알토미디어(주)로부터 제공 받은 스크리너를 통해 개봉 전 관람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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