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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들 Jul 25. 2024

오토바이 여행



우리의 여행은 어디에서 왔는가?

오토바이로 무이네 사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처음 예정에는 없던 일이었다. 살다 보면 가끔 예상치 않았던 일이 생기는 법이다. 나와 오토바이의 만남은 그랬다. 지금까지 무수한 여행을 하면서 내가 오토바이를 탈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단연코 이번 여행에서도 단 한 번도 오토바이 위에 앉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다. 그런데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 뜻밖의 연속, 그게 인생이다.      


사실 오토바이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가장 최근 기억은 네팔에서였다. 네팔의 번화한 타말 거리를 걷고 있을 때, 내 옆을 스쳐가는 오토바이 행렬을 만났다. 그들은 사이드 미러로 나를 치고 가면서도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좁은 골목에서 두 번이나 같은 일을 겪었다. 그것은 매우 불쾌한 경험이었고, 나는 이방인들로부터 무례한 취급을 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아마 일방적인 폭력이었기에 그런 생각이 더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 동네에서는 그게 거의 일상처럼 일어나는 일일 테지만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아니다      


그다음 떠오르는 기억으로는 오토바이들의 역주행이다. 속도를 높여가며 차선을 바꿔가며 달리는 이들을 만나는 경험은 유쾌하지 않다. 아슬아슬하게 차선을 넘나드는 그들은 마치 목숨을 내놓고 달리는 느낌이었다. 한국에서 운전을 하면서 배달 오토바이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는 신만이 아시겠지만 적어도 그들과 얽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자동차 사고로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서

사실 오토바이 위에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바람을 가르고 정해진 길을 가는 것, 걷는 것보다 조금 더 빨리 오래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정도일 것이다. 나는 바람을 따라잡을 수 없고, 그저 그 사이를 지나갈 뿐이다. 어떤 바람은 살갑기도 하지만 오토바이에서 만나는 바람은 그렇지 않다. 느긋하게 앉아서 휴식을 취할 때, 예를 들면 지리산 산행을 하다가 잠시 쉬며 만나는 바람처럼 고마운 게 있을까. 하지만 계절을 넘기는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은 피하고 싶다. 오토바이의 바람은 늦가을을 훌쩍 넘긴 초겨울을 닮았다.      


오토바이에서 만나는 바람은 친절하지 않다. 매 순간마다 얼굴을 사정없이 할퀴고 머리채를 잡아챈다. 만약 안경이 없다면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이다. 자전거 위에서 맞는 바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토바이에서 접하는 바람은 소나기와 같다고 할까. 하지만 그 매력 때문에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상의 바람과 싸우는 일은 언제나 있어왔다. 다만 그 싸움에서 온전히 살아남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살아남기로 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오토바이를 탈 때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두 발 자전거가 그렇듯이 오토바이도 마찬가지이다. 균형을 잃는 순간 위험에 처한다. 그 위험은 속도를 수반한 것이라서 치명적이다. 한 번의 방심이 대형사고를 낳는다. 핸들을 놓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하늘로 날아갈 수밖에 없다. 통제할 방법이 전혀 없다. 그저 조용한 선에서 수습할 단계라면 좋으련만 그런 요행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부터 오토바이와 친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운전을 하는 사람조차 핸들을 잡아보지 않은 사람이 꽤나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지만 이번만은 질끈 눈을 감기로 했다.       


         

오토바이와 친해지는 법

조금 속도를 높이면 바람이 더 세게 따라붙는다. 좀처럼 상대를 떼어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오토바이에서는 더 그렇다. 오토바이에서 바람은 한 몸이나 마찬가지이다. 핸들을 잡고 길로 나선 순간부터 멈추는 순간까지 하나의 운명이랄까. 그래도 오토바이에 앉는 순간, 조금은 더 속도를 높여보고 싶은 욕망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어쩌면 그것은 원초적인 본능일 수도 있다. 속도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오랜 욕망이었다. 그래서 육상경기에서는 1초를 앞당기기 위해 몸을 다그치고 혹독한 훈련 앞으로 몰아세운다. 심지어 우리는 인터넷 검색이 빨리 안 되면 못 견뎌하지 않던가. 그게 지금의 우리다.           


다음으로 오토바이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조작과는 다르다. 핸들이 그렇고 브레이크가 그렇다. 그들은 생명과 직결된다. 힘을 조절하지 않으면 오토바이는 자기가 주인인 양 나를 제 마음대로 다루려고 한다. 세게 당기면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으르렁거린다. 다들 알지 않은가? 통제를 넘어선 행위의 최종 결말을, 그래서 오토바이를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은 그 속도만이 아니라 오토바이가 토해내는 울음을 사랑한다. 그 울음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온몸 구석구석 파고드는 그 절절함을 쉽게 잊을 수 없다. 체 게바라는 오토바이로 떠난 남미여행에서 자신의 미래를 결정했다. 누구나 그렇지는 않겠지만 가끔 오토바이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다.          



오토바이의 숨겨진 미학

사실은 오토바이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외형도 멋지지만 시동을 걸면 더 멋진 일이 펼쳐진다. 시동을 거는 순간 숨죽이고 있던 기계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완벽하게 호흡을 맞춰가며 작동한다. 각각의 기관이 제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면서 오케스트라와 같이 움직인다. 운전자의 의지대로 출력을 높이기도 하고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약간의 휘발유로 그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가끔 오토바이로 전국을 일주했다거나 유럽을 일주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 우리와 다른 DNA를 가진 것일까? 하기야 자전거로 1년 넘게 해외여행을 하던 친구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가 만난 수많은 낮과 밤을 내가 어찌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그 친구는 지금도 자전거 페달을 구를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느 허름한 시골집에서 고단한 몸을 누이거나 노숙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기야 동남아시아라면 자전거보다는 오토바이가 어울릴 수도 있겠다. 베트남에서 자전거를 타는 건 각별한 의미가 있다. 걸어 다니기에는 너무 힘들고 자동차를 구입할 형편이 안 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중간 타협점으로 오토바이를 자연스럽게 선택할 것이다. 오토바이는 유지비가 적게 들고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도 않는다. 포장된 도로만이 아니라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도 문제가 없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많지만 가끔은 색다른 도전을 시도해 볼 필요도 있다. 그것이 반드시 오토바이일 필요는 없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오토바이여도 나쁘지는 않겠다. 처음 오토바이 여행을 시작할 때 사고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사고는 없었다. 하지만 사고가 났다고 해도 또 어떤가.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해도 충분하다.       


여행에서 내가 오토바이를 택한 것처럼 당신이 무엇인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충분히 도전해 볼 가치가 있다. 우리가 만나는 시간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얼마나 적던가. 스스로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인간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그리고 마음만 먹고 그만둔 일은 그보다 더 많다. 당신은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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