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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생각 Feb 01. 2024

남도 시의 현재와 미래

 『그곳엔 두 개의 달이 있었다』김휼 시집

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김규성 시인이 『남도 시의 현제와 미래 』(문학들 비평선 004)를 펴냈다. 저자는 남도에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시인들의 시적 특징을 살펴보고, 그것이 이전 세대의 영역과 어떤 차별성을 띠고 있는지 보석같은 문장들로 시인들의 시를 544페이지에 걸쳐 분석하고 있다. 아래는 이 책에 실린 글 중에 제 시집 『그곳엔 두 개의 달이 있었다』를 소개한 부분을 과분한 평을 받고 감사해서 올려본다.  김규성 시인은 담양군 대덕면 용대리『글을 낳는 집』창작집필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시집으로는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 『신이 놓친 악보』, 『시간에는 나사가 있다』, 『중심의 거처』가 있으며, 산문집으로 『산들내 민들레』, 『뫔』, 『모경(母經)』, 『산경(山經)』 등이 있다. 

 

세련된 언어 감각과 미래진행형 서정 

   ― 김휼 시집 『그곳엔 두 개의 달이 있었다』


 1.
   흙의 질감, 자연친화적 서정, 따스하고 곡진한 감성은 남도 시의 전통적 표징이다. 이를 현대적 감수성, 효율적 표현으로 재구성해 독자적 시세계를 선보이는 시인이 김휼이다. 그는 또 전래의 한을 구도적 수행과 절제, 내밀한 사유로 다스려 새로운 치유의 동력으로 역동화한다.
   공간적 배경은 지극히 서정적인데도 그 표현은 현대시가 가동할 수 있는 최적의 표현과 형식을 추구한다. 당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어법과는 일련의 변별점을 지닌다. 따라서 그만의 신선한 특장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시적 풍향을 시사한다. 요컨대, 남도의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위치를 예시하는 그의 시적 성취와 포맷은 남도의 소중한 미래적 자산이다.
   아래의 시 「비문을 읽는 저녁」은 첫 행부터 마지막 행까지 시종 긴장을 놓치지 않고 주제를 끌고 가는 힘이 돋보인다. 제목에 나오는 “비문”을 비롯해 “책”, “양장본”, “마침표”, “격음”, “목차”, “안긴문장”, “접속사”, “낱말”, “모음”, “오독”, “문장”, “여백”, “운율”, “모국어”, “글”, “서書”, “붓질”, “필적”,  “낱장” 등,  글과 관련된 단어들이 시의 어휘군을 이룬다. 이 부분은 그가 얼마나 문법/문장의 기본에 충실한 자세로 창작에 임하는가를 돌이켜 보게 해준다.   


 
     갈피 사이 강이 흐르는 책을 읽습니다
     두툼한 일몰을 잘라 엮어놓은 양장본
     해진 귀퉁이가 못내 마음이 쓰입니다
     하늘을 등지고 걸어오는 동안
     갈래 길 사이에서 오갔던 완력과
     무릎을 길들이던 눈물의 얼룩을 닦아냅니다
     마침표를 찍듯 굳은살로 찍힌 통점
     풀어내지 못해 뭉쳐진 격음을
     생의 목차에 안긴문장을 주억이며 읽어갑니다
     늘어진 행간마다 불쑥 들어서는 접속사
     격랑 사이에 놓였던 낱말이 침식되고 있습니다
     곳곳에 모음이 흘러내려 오독되는 문장들
     눈물의 깊이로 길을 낸 주름은
     어느 생의 여백일까요
     기진한 몸속에도 운율은 남아 있어
     가늘게 뛰는 심장이 모국어를 이끌고 있습니다
     살아온 만큼 쓰여지는 몸의 글
     힘이 풀리고 바람이 들어
     앞뒤 어긋난 문장을 읽어가려면
     무릎을 꺾고 키를 낮춰야 하지만
     쇠잔한 붓질이 만들어 낸 기묘한 비백의 書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지요
     바람의 필적을 모면할 수 없는 낱장인 몸
     더듬거리며 읽는 눈빛이
     속수무책 흐려지고 있습니다
                                 ―「비문을 읽는 저녁」전문


 
   다음의 구절은 위의 시에서 가려 뽑은 글과 관련된 문장들인데 시 전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가 격조 높고 참신한 은유와 이미지를 선보이고 있다.
 
     “마침표를 찍듯 굳은살로 찍힌 통점”
     “풀어내지 못해 뭉쳐진 격음”
     “생의 목차에 안긴문장”
     “늘어진 행간마다 불쑥 들어서는 접속사”
     “격랑 사이에 놓였던 낱말”
     “곳곳에 모음이 흘러내려 오독되는 문장들”
     “기진한 몸속에도 운율은 남아 있어”
     “가늘게 뛰는 심장이 모국어를 이끌고”
     “살아온 만큼 쓰여지는 몸의 글”
     “앞뒤 어긋난 문장을 읽어가려면”
     “쇠잔한 붓질이 만들어 낸 기묘한 비백의 書”
     “바람의 필적을 모면할 수 없는 낱장인 몸”
 
   시「비문을 읽는 저녁」이 문학적 용어와 사물을 소재로 한 리얼리티를 아날로그 식으로 전개한다면  아래의 시「소문」은 신화적 상상력을 배경으로 하는 디지털 방식의 역동성을 발휘하고 있다.      


     흰말을 끌고 밤길을 다녔다
 
     묘연한 행방을 묻는 사람들로 우물터는 늘 붐볐다
 
     밤이면 마을 바깥을 떠돌아다니는 그를 두고 누구는 둥근 형상을 가졌다 하고 누구는 무성한 갈기를 가졌다 하고 바람에 한껏 몸을 부풀렸다가 일순간 사라져 버리는 뒤태를 본 이들은 그가 축지법을 쓴다고 했다 그가 왔다 간 곳마다 거뭇거뭇한 생채기가 흔적으로 남았다
 
     달이 지는 그믐
 
     월궁에서 무언가를 은밀히 찧고 있다는 토끼의 무성한 염문도 꺾이는 날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먼 하늘로 불꽃을 쏘아 올리던 밤, 벌거숭이가 된 침묵의 고지에 깃발을 꽂기 위해 발빠른 말[言]을 빌어 천 리를 내달렸으나 한 번도 진실을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거시기가 둥글든지 납작하든지
 
     익명의 숲으로 뜬구름은 몰려왔다 몰려갔다
                                                     ―「소문」전문


    “흰 말”, “우물터”, “축지법”, “월궁”과 “밤이면 바깥을 떠돌아 다니는 그”, “둥근 형상”, “월궁에서 무언가를 은밀히 찧고 있다는 토끼의 무성한 염문”등의 구절은 신화를 구성하는 언어적 소도구들이다. 그리고 “거시기”라는 지시대명사로 추상적 존재인 신을 대체한 신화는 “익명의 숲으로 뜬구름은 몰려왔다 몰려갔다”는 행방이 묘연한 미궁을 빌려 끝을 맺고 있다. 그럼으로써 막연하지만 무궁한 미래진행형으로 그 메아리를 확산해 간다. 충실한 기본을 통해 내연을 심화하는 한편,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해 외연을 확장하는 내외겸전內外兼全의 치밀과 열정이 볼수록 경이롭다. 
 


 2.
 
   김휼은 내면 깊숙이 침잠해 있는 감정선과 분출하는 정서를 자아의 본연/중심과 일치하게 조율한다.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감정의 길항을 잠재워 안팎의 평온을 동시에 유지하는 결코 쉽지 않은 자기 관리이다. 희로애락의 무상한 변화에 준비 없이 대응해야 하는 처지로 누군들 수시로 발생하는 애환이 없을 수 있겠는가. 김휼에게도 감정의 굴곡과 복선은 상존하게 마련이다. 이는 그가 이성보다 감성을 가다듬어 노래하는 시인의 운명(시인 누구에게나 주어진)을 자진해서 선택한 사실이 증명한다. 그런데 그는 이를 혼자만의 감정유희에 머물지 않게 다독이고 다스려 이웃과의 공감대를 확장한다. 그간 남모르게 거듭해 온 수련의 강도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성향 상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숨은 내공은 그의 시에서 역동적 원심력으로 작용한다.
   흔히 세속의 복잡다단과 부딪칠 경우, 이를 속취俗臭로 외면하고 고상한 성스러움으로의 도피를 꾀한다. 그러나 함부로 성속을 가리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이어서 현실감이 떨어지고 공허한 관념의 덫에 빠지기 쉽다. 이점을 절실히 인식하고 있는 김휼은 성속聖俗에 연연하지 않고 내면의 언어를 질 높게 가다듬어 육화함으로써 추상적 모호성을 극복하고 구체적 의미망을 확충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품격과 실속을 동시에 갖춘다.
   아래의 시「발자국 소네트」는 제목과 달리 침울한 감정선이 내면의 기류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제목에 굳이 “소네트”라는 단어를 차용한 것은 참담한 감정을 밝고 지순하게 다스리고자 하는 자기최면의 속셈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뜨거워지고 있었다
     무대는 들끓었고 노래는 완벽했다
     마지막 후렴이 시작될 즈음
     한 가닥 빛이 나를 뚫고 지나갔다
     주저앉아 구멍 난 몸과
     사라지는 빛의 꼬리를 바라보았다
     무작정 빛을 따라갔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북서풍이 부는 거리를 종일을 걸었다
     부르튼 발에 꽈리처럼 물집이 부풀어 올랐다
     허방 같은 물컹한 집을 터트리자
     고여 있던 무성음들이 쏟아져 나왔다
     울음이 다 빠져나간 폐허의 집
     한 점 메아리도 남지 않은 헌 집
     한참을 웅크리고 앉아
     멈추어도 흔들리는 것들을 생각했다
     全 생을 걸고 바라보던 태양 아래서
     까맣게 박힌 울음의 씨앗을 묻고
     해바라기는 늙어가고 있었다
     바람은 다른 계절을 품고 불어왔다
     목마름쯤은 들숨으로 받아내는 순전한 그와
    그림자를 잇는 길에 몸을 맡겼다
                                         ―「발자국 소네트」전문


 
   르네상스 시절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보낸 연시에서 유래한 소네트는 통상 달콤하고 낭만적인 서정시를 일컫는다. 그러나 위의 시는 초인적 인고와 애한哀恨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주저앉아 구멍 난 몸”으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북서풍이 부는 거리를 종일을 걸”어 다니다 “부르튼 발에 꽈리처럼 물집이 부풀어 올”라 “허방 같은 물컹한 집을 터트리자/고여 있던 무성음들이 쏟아져 나”오는 형극의 길이다.
   “울음이 다 빠져나간 폐허의 집/한 점 메아리도 남지 않은 헌 집”등의 구절이 암시하듯 절망과 허탈의 정서로 시종하고 있다. 이 지난한 여정은 “목마름쯤은 들숨으로 받아내는 순전한 그와/그림자를 잇는 길에 몸을 맡”기는 데서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완전체인 “순전한 그”는 관념과 추상의 외투를 걸친 그림자 같은 존재다. 이제 화자에게 남은 과제는 시 「소문」의 “거시기”와 같은 존재인 신神의 외투를 벗기고 그 실체와 온전히 만나는 길뿐이다. 어쩌면 화자는 키에르케고르가 고독한 단독자의 결연한 의지로 신과 만나고자 한 접점이거나, 아니면 김현승이 절대고독 속에서 신과 결별하고 주체적 자아를 통해 궁극의 실존에 다다르고자 한 미지의 고지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3.
 
   곽재구의 시 「사평 역에서」는 오랫동안 신춘문예의 텍스트로 꼽히며 사랑을 받아왔다. 남도의 서정을 종전의 언어습관과는 달리 세련된 언어감각으로 노래해 독자들에게 매혹적 감수성을 선물한 것이다. 백석의 시가 서북지방 오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세련된 언어감각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자주 읽히는 것과 비슷한 예다. 김휼의 시도 세련된 언어감각이 주조를 이루며 그만의 시세계를 구축한다. 고도로 함축한 감성의 언어와 참신한 감각의 언어가 극적 조화를 이룬다. 그의 언어는 안으로 정제되지 못한 체 겉으로만 화려한 시풍과는 격이 다르다.


 
     단단한 울타리 하나 갖는 꿈이 있어요
 
     소리 내어 울어 본 적 없는 이들이
     울고 가기에 좋은 벼랑이 있는 붉은 집
     이 집은 혼자일 때 젖는 외로운 각도랍니다
 
     둥근 별채에 고이듯 안착하려면
     날카로운 정오의 빛을 지나
     몇 번의 모래 언덕을 굴러야 해요
 
     마음도 훈련이라서
     깊어지는 구석에서 뜨거워지는 방들
     오랫동안 비어 있는 쪽문을 열면
     쏟아질 듯 글썽이는 안부가
     스며드는 달빛이 발목을 적셔요
 
     한세월 울적한 그늘을 안고 살아
     벽마다 금이 간 둥근 눈물의 집
     붐비는 이별에 몸살을 앓고 있어요
                                  ―「당신 눈 밑엔 붉은 알람브라 궁」


 
   “소리 내어 울어 본 적 없는 이들이/울고 가기에 좋은 벼랑이 있는 붉은 집”은 실은 화자의 내면 깊숙이 잠재된 정서를 상징한다. 그러나 화자는 이를 “마음도 훈련이라”는 종교적 경구를 빌려 추스른다. 수행자적 자세로 자아를 다스리는 화자의 정신세계를 가늠헤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한세월 울적한 그늘을 안고 살아/벽마다 금이 간 둥근 눈물의 집”이라는 구절에서 보듯 오랫동안 적체되어온 감정의 억압을 당대의 언어와 자신만의 어법으로 표현한다. 또 첨단의 언어를 빙자해 일부러 낯설고 모호한 탈문법의 문장을 남발하는 일각의 풍조와는 결을 달리해 고품격의 수준 높은 언어를 구사한다. 그리하여 세련된 언어의 연금술사로 등극한다. 이와 같은 언어의 연금술은 아래의 시 「장군의 섬」에서도 곁들여 볼 수 있다.


 
     붉은 꽃이 지자
     바람은 몸을 비틀었다
 
     뒤를 버려야 앞으로 갈 수 있는 목숨의 길
 
     두려움의 꽃대는 강력하여
     베어내는 칼끝이 그믐처럼 휘었다
 
     구걸하는 것은 목숨이 아니라서
     쓰라릴수록 눈물은 단단해졌으므로
     설움을 뭉쳐 목책을 쌓았다
 
     꽃피는 바다를 지키는 일이라면
     물속인들 꿈속인들 쌓지 못할 성이 있으랴
 
     사시四時와 더불어 바다의 초입에서
     풍찬노숙을 견디는 장군의 섬
 
     저만치 홀로 피안에 들고
     벌어진 기억 사이로 해마다 봄은 꽃을 불러
     슬픔의 간격을 메우고 있다


     *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에 있는 섬
                                          ― 「장군의 섬」- 장군도* 전문
 


    이 시는 “뒤를 버려야 앞으로 갈 수 있는 목숨의 길”, “두려움의 꽃대”, “베어내는 칼끝이 그믐처럼 휘었다”, “목책을 쌓았다”, “구걸하는 것은 목숨이 아니라서”등, 섬 이름 ‘장군도’와 걸맞은 이미지가 주조를 이룬다. 이를 통해 이 시는 모호한 추상의 늪에 빠지지 않고 구체적 사실성과 의미망을 확보한다. 김휼의 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의 하나다.
 


 4.


   흔히 경험과 체험을 동의어나 유의어쯤으로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이를 독일에서처럼 엄밀히 구분하면 체험은 그냥 사건이나 일상의 변화를 단순히 겪어내는 것이고 경험은 체험을 실천 기제 삼아 새로운 변화를 추동하는 적극적 자기관리를 가리킨다. 김휼은 비상한 영적 체험뿐 아니라 일상적 체험까지도 미래지향적 경험으로 체화하고 승화해 내밀한 사유의 지평을 확장한다. 그에게 사유는 고차원의 은유와 이미지를 빚어내는 언어적 상상력과 더불어 시의 골간과 동력을 이루는 바탕재다.


 
     그림자도 가고 없는 모양성*을 걷는다
     함성을 머금은 둘레는 기억의 먼 곳으로 길을 내어주는데
     애잔한 풍경 하나 기운 오후의 틈으로 끼어든다
 
     박제된 표정을 안고 숨을 멈춘 고사목
     귀를 접고 깊음에 들었다
     나는야 붉은 이야기에 목마른 필경사
     직립이 남긴 여음을 받고자 높고 쓸쓸한 자세를 한참 바라본다
 
     디딜수록 발밑에 길 하나씩 늘어나던 시절
     불완전한 내 청춘의 뜰에는 비틀린 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소진한 생의 마디를 연잎 위에 풀어버린 어머니
     멈춰버린 반쪽의 몸으로 캄캄한 내 문맹의 시간을 비춰주었지
 
     세상 모든 직선은 곡선의 완성을 위한 받침인 거라
     눕는다는 건 하늘로 세우던 문장을 땅 위에 펼치는 거라
     바스러지는 목소리, 조심스레 받는다
 
     당신의 안과 나의 바깥이 둥근 세상을 만들어가는 계절
     어딘가에 닿으려는 맹죽을 노송은 휘감고 돌고
     나는 먼 곳의 기억을 향해 걸어간다
                                      ―「곡선의 문장을 걷다」전문


 
   모양성은 고창의 옛 지명 모양부리를 본 떠 이름 지은 읍성으로 1453년 외침을 막기 위해 자연석을 쌓아 만들었는데 인근 장성의 입암산성과 함께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해왔다. 예부터 음력 9월 9일 중양절이면 부녀자들이 줄을 지어 성곽을 돌며 ‘성 밟기’행사를 해왔다. 화자는 그 유서 깊은 자취를 따르며 발자국마다 다채로운 이미지를 빚어낸다.
 
     “그림자도 가고 없는 모양성”
     “함성을 머금은 둘레는 기억의 먼 곳으로 길을 내어주는데”
     “귀를 접고 깊음에 들었다”
     “디딜수록 발밑에 길 하나씩 늘어나던”
     “소진한 생의 마디를 연잎 위에 풀어버린 어머니”
     “세상 모든 직선은 곡선의 완성을 위한 받침인”
 
   이 도저한 이미지의 행군은 마침내 “하늘로 세우던 문장을 땅 위에 펼”쳐내 “당신의 안과 나의 바깥이 둥근 세상을 만들어가는”것이라는 결론에 모아진다. 시 전편에 걸쳐 도처에서 연쇄적으로 파생하는 이미지의 세분화는 분업에 해당하는데, 화자는 이를 하나의 주제로 모아 마무리 지음으로써 효과적인 협업을 이룬다.
   김휼은 깊고 넓은 사유의 흔적을 쉽게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다의적으로 표출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김휼의 시와 만나며 자신도 모르게 영혼의 심연을 파고드는 결곡한 사유의 세례를 받게 된다. 이 부분은 김휼의 시가 탈일상의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모호의 늪에 빠지지 않는 비결이다. 기독교 목회자인데도 그의 시에서 기독교나 종교적 체취를 발견하기 쉽지 않은 점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만큼 그는 치밀하게 시의 얼개를 구상하고 직조한다. 그러는 가운데 그의 시는 의미심장한 이미지의 파장을 낳으며 다의적 의미망을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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