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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Nov 16. 2023

수능 세대입니다

"수능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티브이 뉴스를 안 본 지 오래인데도, 아나운서의 멘트가 음성지원 되듯 귀에 꽂힌다. 

수능. 

우리 집 세 아이 모두 초등학생이라서인지 와닿지 않는다.

나 자신이 수능 본 지는 어언 20여 년 전이며, 아이를 통해 겪을 가장 빠른 미래 또한 십 년 가까이 남았다. 위아래로도, 앞뒤로도 먼 일이다. 그런지 꽤 오래다. 주변에도 역시 애나 어른이나 고만고만한 나이라 수능을 인식하고 산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학교 마치고 온 첫째가 말해서야 알았다. 

"엄마, 내일 수능이래요."

아. 그래. 그렇지, 이 무렵이지. 가만. 그래서 갑자기 추워졌나? 

수능 때가 나가오면 한파가 기승을 부린다는 속설을 떠올린다. 사실 가을이 물러가고 겨울이 다가오는 때이니 언제 추워져도 이상하지 않음에도, 으레 수능과 연관시키곤 하는 것이다. '라테도 말이야, 패딩에 보온도시락으로 무장하고 수험장으로 들어섰더랬지' 하는 추억 한 가지쯤은 가지고 말이다. 


"이번 수능에도 만점이 나올까요?"

짐짓 심각한 말투로 던진 초5의 말에 엄마둥절.

강성태인줄?

언젠가 <유퀴즈> 수능만점자들 편을 같이 보았었는데, 그게 인상이 깊었나보다 짐작한다. 그렇지. 초딩에게 수능이란 유퀴즈의 소재에 불과하지. 학습학원 근처에도 안 가본 아이도, 내 계발에 더 열중인 나도, 우리 가족 모두 아직은 속 편함에 새삼 감사한 수능 전야다.







수능날 이른 아침, 시험장 앞을 취재하여 보도하는 뉴스를 해마다 온 국민이 시청했다. 

선생님들과 후배들의 응원전(!)을 받으면 입장하는 수험생들을 모습을 지켜보았다. 경찰차나 오토바이를 타고 촉박하게 등장하는 수험생도 꼭 있었다. 뒤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교문에 딱 붙어 있는 부모님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눈을 꼬옥 감은 채 꽁꽁 언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연신 굽혔다 폈다 하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교문에 엿을 붙으면 시험에 척 붙는다는데 실제로 엿이 붙은 모습은 본 기억이 안 나지만, 그 간절함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일이다. 조금 뒤늦게 저녁 즈음부터는 연예뉴스를 다루는 방송프로그램에서 수험생인 고등학생 연예인들이 밴에서 내려 팬들의 응원을 받으며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단골 코스였다.(에쵸티 오빠들, 수능으로 대학 갈 리는 없는 우리 오빠들도 시험장에는 잘 들어가는지 눈으로 열심히 좇았더랬지.)


오로지 수능으로 대학 가던 세대다. 아마 내신이라는 제도가 생기며 수능의 파워는 필연적으로 조금씩 약해졌고 위와 같은 라테의 풍경 또한 추억이 되었다. 


유퀴즈를 같이 시청할 때 아이가 물었다. 

"엄마는 수능날 도시락 뭐 싸갔어요?" 

출연한 만점자들은 불고기니 된장국이니 대답하는데 나는 얼른 떠오르지가 않았다. 20년 전이야... 정말 기억이 안 난다. 또래 엄마들과 수능담(!)을 나누다 보면, 엄마의 정성스러운 수능 도시락을 자알 먹고 사탐, 과탐 시간에 졸음이 와서 혼났다, 심지어는 졸아서 시험을 망쳤다, 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나는 워낙 긴장이 심한 편이라, 체할까 봐 조심하느라 점심 도시락을 남겼던 것도 같다. 






모든 과목이 다 끝나고 3학년 1반 우리 교실에 모였다. 미리 공지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모두가 그렇게 교실에 들렀고, 각자 자기 자리에서 종례를 기다리던 일상처럼 앉았다. 교탁에서 우리를 찬찬히 바라보며 수고했다 토닥이는 선생님의 한 마디를 듣고 울컥했던 감정이 생생하다. 


이미 깜깜해진 운동장으로 나왔을 때 아빠가 마중 나와 있었다. 

마킹 실수 안 하고 내 나름 괜찮았다며 조금은 뿌듯하고 시원하기도 했는데, 아빠를 보니 왠지 미안스럽다. 그다지 상위권도 아니며, 뭐 수능에 명문대 당락이 좌우된다든지 하는 기대를 주는 것도 아닌 딸인데 아빠는 저 멀리서도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가방을 받았다. 수고했다고 말하면서.



다들 우리에게 수고했단다.

우등생이건 아니건 우리는 수험생이었다. 1년 내내 예비 수험생으로 살았으며, 하루 종일 떨리고 긴장했다. 어쨌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만큼은 모두 같다. 상대적인 등수와 점수를 떠나 그간의 각자의 노력을 최대로 발휘했으면 바라는 마음은 똑같다. 







수능 다음 날 친구들과 시내로 몰려가 귀를 뚫었다. 정확히 열 두 배 예뻐 보였다. 여전히 교복 차림이지만 양쪽 귓불에 작게 반짝이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니 이미 여자어른이 된 것 같다.

그다음 날은 헬스장에 등록했다. 교복 단추가 수시로 튕겨나가느라 쉴 새 없던 뱃살을 쪽 빼고 상콤하게 캠퍼스를 총총 누빌 상상을 했다.

더 이상 수업을 하지 않는 수업 시간에는 우리끼리 영화 관람으로 시간을 보냈다. 몇몇 친구들이 비디오대여점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골고루 빌려왔는데 우리의 선택은 조용히 하나에 모아졌다. (반대하는 이 없었다.) 우리는 중요한 장면에 서로 쳐다보지 않기로, 눈 마주치지 않기로 다짐을 나누었다. 교실 티브이로 비디오를 보는데, 교대로 망을 보며 선생님을 비롯한 누군가가 오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도 때로 참지 못하고 꺅꺅거리던 볼 빨간 조마조마함이란!



원서 내고 대학 입학까지 또 중요하고 똥줄 탈 일들이 남아있겠지만, 수능 끝난 다음 날부터 대학 입학까지의 뜨거운 겨울을 보낼 청춘이 지금의 나는 철부지처럼 마냥 부럽다.

채 언급하지 못한 많은 역사가 그 짧은 새 이루졌으며, 그대들도 그러할지니. 


당부한다.

어른이 되고 싶어 성급하지만 여전히 순수한 열아홉 끝무렵을 즐기기를.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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