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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Mar 13. 2024

첫 마라톤 대회.  기분만큼은 풀코스!

마라톤 입문기(1)

 

5시 20분 알람에 벌떡 일어났다. 사실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도 여러 차례 눈을 떴었다.

씻고 나와, 여느 아침과 같이 막서기에 바나나, 양배추, 호두, 우유를 넣아 갈아 마셨다. 미리 챙겨둔 준비물을 하나씩 다시 확인했다. 집을 나서려는데 뒷골이 쎄하다.

"아, 배 번호!"



마라톤 3~4일 전이면 신청자의 주소로 기념품과 배번호가 배송된다. 원래 기록칩이라는 것도 보내주는데 이는 10km 이상 신청자에게만 해당한다. 5km는 기록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 허허.

5km는 사실상 참가에 의의를 두는 '런린이'나 가족 참가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 또한 달린 지 3개월 여밖에 되지 않은 러닝 초보자인지라 기록칩 없이 배번호만 받았다. 칩이 없다고 아쉽다거나 섭섭하지는 않았다. 지금 내 처지로서는 기록이고 나발이고 5km 완주도 가능한 건지 걱정이었으니까. 오히려 챙길 게 하나라도 덜어져 다행인 쪽이었다. 우야든동 무려 다섯 자리 숫자가 적힌 배번호를 받으니 그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아직은 내 옷 같지 않은 그 이름 '마라톤 대회'. 그날이 오긴 왔구나.




올해 1월 1일, 연례행사인 '새 다이어리에 계획 적기'를 하다 문득, 그야말로 앞뒤 맥락 없이 '떠오른 계획'이었다. 마라톤 도전!

앉은 그 자리에서 올해 확정된 마라톤을 검색해 5km 종목이 포함된 행사 중(10km, 하프, 풀코스 종목이 보통이고, 5km은 포함하지 않는 행사가 많다) 가장 빠른 일정인 '코리아오픈레이스'를 즉시 신청해 버렸다. (접신하듯 그분이 오셨을 때 일단 저질러 놓고 볼 때가 종종 있다. 그때의 배꼽 간질간질함이 내가 살아있음을 일깨워주는 것만 같다.)






매일 달리기를 하면서도, 진즉에 신청해 둔 마라톤 대회는 왠지 다가오지 않을 먼 일처럼 여겨졌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배번호가 날아든 것이다. 내 손으로 신청했으면서. (온라인 쇼핑의 경우에도 가장 도파민이 활발하게 분비되는 순간은 택배를 기다리는 시간도 물건을 받고 열어보는 때도 아닌, 결제하는 순간이 아니던가.)

책상에 두고 수시로 바라보며 얼떨떨하기도, 설레기도, 떨리기도 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그것을 책상에 그대로 두고 가려했다니. 아뿔싸.


대회를 며칠 앞두고는 마라톤 준비에 관한 영상을 보며 달리곤 했다. 그중 한 영상에서 마라톤 경험이 많다는 한 유투버가 한 말이 떠오른다. 딴  몰라도 배번호와 기록칩부터 챙기라고. 그 두 가지를 당일에 안 챙겨 오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아이고, 정신없는 사람들이군.'하고 지나친 그 이야기 속 당사자가 하마터면 내가 될 뻔했다.

지방에서 새벽같이 버스 타고 상경한 참가자가, 배번호가 없어 무려 되돌아와야 하는 허탈한 상황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어휴.

어휴~~~






6시 30분에 출발하는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통상 소요시간은 2시간. 여느 때 같으면 그 시간을 공으로 보내지 않았을 거다. 책을 읽든, 음악을 듣든, 영상을 보든. 하지만 오늘은 출발과 동시에 잠을 청했다. 너무 이른 시간. 컨디션 조절을 위해서다.


남편은 몇 차례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5km에 나간다고 했을 때 그랬다. 기왕 하려면 10km는 해야지, 뭔 5km를 하냐고.(정작 이러는 그는 '왜 뛰지?'사상의 소유자다.) 또한 내가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거나, '땀을 비 오듯 흘릴 테니' 갈아입을 옷을 챙긴다거나 하는 모습과 어휘 사용에 픽픽 웃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험이 없는 초심자는 예상할 수 있는 기준치가 없으니 긴장하기 마련이다. 고로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곤 한다. 늦으면 어떡하지. 장소를 못 찾고 헤매면 어떡하지. 너무 추우면 어떡하지. 아니, 옷이 땀에 절면?

여유는 없는 반면 의욕은 넘치는 게 특징이다.

'흥. 비웃지 마. 나 지금 기분은 풀코스 출전이그등?'





다행히 내리 숙면을 취한 덕에 개운한 상태로 도착했다. 예상보다 버스가 일찍 도착한 것도 왠지 느낌이 좋았다. 간단하게 김밥 한 줄을 사 먹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최근 '자양역'으로 새 이름을 얻은 '구 뚝섬유원지역'에 전철이 서니, 온통 달리기 복장을 한 사람들이 가득 쏟아져내린다. 아예 공기가 변한 듯하다. 역사(驛舍)가 건강한 기운으로 잔뜩 들떴다.


굳이 안내 표식을 따를 것도 없었다. 수많은 마라톤 차림의 인파에 둥둥 섞여 가다 보니 행사장이 나타났다. 바깥 입구에 있는 간이 화장실에는, 특히 여자 화장실에는 늘 그렇듯 긴 줄이 늘어서 있다.(행사장 간이화장실 설치할 때는 부디 여자 화장실은 칸 수를 두 배로, 부탁드립니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꼬리에 잠깐 줄을 섰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행사장 쪽으로 내려가보았다. 오. 역시나 천막으로 된 간이 탈의실이 따로 있었다.

불확실하, 그래서 걱정 반일 때, 그러나 알 수 없는 '육감'따를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적중하면, 불안했던 지분만큼 짜릿하다. 더구나 지금처럼 혼자라  쾌감을 나눌 이가 없을 때면, 말도 못 할 답답함으로 인해 내적 희열은 배가 되기도 한다. 아, 물론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는 옛말도 맞는 말이다.

이러나저러나 좋다는 말이다.



부스에서 나눠주는 커다란 비닐봉지에 갈아입은 옷과 잠바와 배낭까지 다 넣었다. 휴대폰은. 잠시 고민하다, 조끼를 꺼내 입고 조끼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었다. 몸만 가볍게 뛸 요량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사진 찍어줄 사람이 없지 않은가. 생애 첫 마라톤 참가인데 셀카라도 열심히 남겨야지! 짐 봉투를 부스에 보관한 후 한결 가뿟한 몸으로 출발선 쪽으로 슬슬 향했다.

풀코스와 하프코스 종목은 진작에 출발했고, 지금은 10km 참가자들이 막 출발하고 있었다. 10km 참가자들이 기세 좋게 모두 출발하고, 이제 뒷라인에 섰던 모두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출발 지점을 다시 채웠다. 쿵쿵 신나는 음악에 맞춰 스트레칭을 하거나 가볍게 뛰며 저마다 몸을 풀고 있었다. 나도 리듬에 따라 조신하게 몸을 흔들며 출발을 기다렸다.


"자, 5km!"  

"출~발~하쎄요!"


사회자의 우렁찬 외침에 일제히 앞쪽부터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중간 어드메에 섰던 나도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워낙 많은 인파라 조심조심 걸을 수밖에 없었다. 머지않아 시야가 넓어지고 숨통이 트였다.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제 짐을 싸며 오늘 날씨가 영하라는 예보에 긴장했었다.

출발할 때야 워낙 이른 시간이라 무척이나 추웠지만, 행사장에 도착한 때부터, 달리기 위해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한 순간부터 추위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정말이지 청명했다. 올 겨울 눈이 많이 오기도 했지만 그보다 흐린 날이 너무 잦아 울적하기까지 했다.

오늘, 거짓말처럼 맑다. 영하의 기온이라는 예보가 빗나간 것인지, 마음도 몸도 상기되어 추위를 이겨낸 것인지 모르겠다. 3월에 진작에 들어섰는데도 봄은 코빼기도 안 비친다며 야속해하던 마음이 누그러진다. 여기 와서 봄내음을 맡네.


아침 햇살도 '오랜만이라고' 마음껏 내리쪼이고 있었다. 달리는 사람들은 그 덕분에 몸이 금세 풀렸다. 온도가 낮으면 몸이 굳고 부상 위험도 높다. 날이 풀린 덕에 보다 안전하게 달릴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건강을 지키려는 부지런한 사람들을 응원하는 듯하다.

햇빛은 또한 든든하고 가만하게 흐르는 한강으로도 향했다. 수면에 넓고 공평하게 퍼져 반짝거린다. 노안이 오는지 눈이 부셔 눈물이 나는데도 시선을 빼앗긴다.

그 뒤로 서있는 다리, 때때로 그 위를 지나는 전철, 그리고 저마다 다른 높이의 건물들.



한강이 이렇게 근사하구나.

매일 한강에서 달리는 사람들은 좋겠다. 


가끔 의식의 흐름이 막무가내다.

갑자기 저 강 건너편의 건물들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멋진 배경을 이루던 한강변의 아파트가 부분 확대되며 '음, 저기에 살려면 얼마쯤...' 속세의 호기심에 당도한다. 더욱 현실적인 자각에 정신줄이 멀리 안 가고 돌아왔다. 

 

달리는 내내 흠뻑 빠져 코스의 경치를 만끽했다. 힘든 줄도 모르고, 아니 심지어 즐기며 달릴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평소 달리기를 할 때보다 오늘 훨씬 힘이 덜 든다고 느꼈다.

돌이켜보건대 홀딱 반한 코스의 풍광 덕만은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또 있었다.



*사진출처 : 개인소장 및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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