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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Apr 24. 2024

테스형 곧 만나러 갑니다

나훈아 공연 티켓팅 성공기

9시.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지난주에 달력에 표시해 둔 중요한 일정이 앞으로 한 시간 남았다, 고 알려주는 것이다.

8시 30분 전에 모두 출근, 등교시키고 홀가분하게 설거지를 마친 참이다. 알람 덕에 중차대한 일정을 새삼 상기하고 돌아서니 매일 챙겨 듣는 영어 방송 시간이다. EBS 어플을 켜고 식탁에 교재를 펴고 앉는다. 방송으로 듣는 수업은 20분. 수업 후에는 오늘 주제를 낭독하고 그 녹음본을 SNS에 업로드하여 인증하는 것까지가 루틴인데. 앗.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시간이 다 되었으니 오늘만큼은 미뤄둔다. 아까 알람이 일러준 일생일대의 중요한 일정, 아니 임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9시 50분. 교재를 덮어 옆으로 밀어 두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 공연 예매처 YES24 앱을 연다. 어라. 찾는 것이 메인 화면에 얼른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땐 검색이 빠르다.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손가락 놀림으로 검색을 하고 그 결과를 클릭한다.

이거지. 강렬한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2024  LAST CONCERT 고마웠습니다!'



새빨간 무대 의상의 그를 감상할 새도 없이 웬 안내창이 뜬다. 'YES24 티켓' 어플을 다운받으란다. 기가 막힌 타이밍.


아아. 짜증 나지 않는다. 짜증 낼 틈도 없거니와, 괜한 에너지를 소비할 만한 껀덕지가 아니라는 정확한 상황 판단 덕이다. 이까짓 것쯤이야 장벽이라 말할 수도 없는, 발이 차이는 돌멩이 수준으로, 그저 가벼이 건너뛰면 그만이거나 심지어 멈칫할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란 녀석 제법 단단해졌구나. 나의 님'들'을 향한 다년간의 피켓팅 경험으로 얻은 깨달음이로소이다.

'그렇지. 주로 이용하는 인터펄 같은 사이트도 티켓 앱이 따로 있지. 귀찮을 거 뭐 있어. 최상의 전시 공연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이 별도의 티켓 어플을 새로 다운로드하고 로그인까지 하는 데는 고작 1~2분밖에 걸리지 않을 것을 알잖아?'

'YES24'야 평소 책을 사든 구경 하든 허구한 날 들락거리는 도서앱이며 또한 티켓팅이라면 남부끄럽지(!) 않은 덕질 역사의 소유자로서, 내겐 어떤 믿음이 있었다. (최소한) 예매 버튼을 누르기까지의 이 여정이 무탈하고 스무스할 것이라는, 자신에 대한 굳건한 신뢰 같은 거다.


뭐, 생각지 않은 티켓 어플 다운로드에 이렇게까지 -그간 단단해진 나를 느낀다는 둥, '역시 버릴 경험은 없다'는 진리를 다시금 아로새긴다는 둥- 할 일인가 싶지만, 이런 깊은 사색에 빠진 머리와 별개로 예매를 위한 자기 할 일에 충실하고 있는 손가락들의 멀티태스킹에 또한 새삼 놀라며 기특해지고 마는 것이다.

    

촌각을 다투는 싸움이니만큼 매 진행 상황마다 바로 위 시계를 확인하고 있다. 어플을 깔고 로그인하는 데는 예상대로 1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역시 대단하군.

'나훈아 '2024 고마웠습니다-라스트콘서트'라는 제목과 가격, 일시 등 상세내용이 적힌 화면에 진입했다. 맨 아래 줄에는 회색으로 '4월 23일 10시 예매 개시'라고 쓰여 있다. 10시 정각이 되면  줄은 빨간색으로, 글자는 '예매하기'로 바뀔 것이다.


9시 58분, 59분...

들숨인 채 호흡도 아껴야 하는 순간. 짧은 순간이 길게도 흐르고 있다.


앞뒤 숫자가 모두 바뀌며 10:00가 표시되는 찰나, 그와 동시에 바뀐 빨간색 줄의 '예매하기' 버튼을 눌렀다. 숨을 멈춘다. 화면이 다음으로 시원하게 넘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접속 대기 중입니다.'라는 창이 떴다. 아. 이것 역시 예상하던 바다.

'대기 인원 1,292명 이상'




나쁘지 않다. 심지어 희망적인 숫자라고도 본다.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 예매 때 첫 대기 인원수는 3만 대였다. 또한 내게 많은 광탈의 시련과 경험을 안겨준 BTS의 콘서트 예매 때는 매번 20만, 30만 명으로 시작하는 것이 기본값이다. 그러니 그간 봐온 대기 인원에 비한다면야 1,292명은 당연히 해볼 만한 숫자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해도 방심해선 안 된다. 마음이 나대게 두면 안된다. 이때 중요한 팁은 대기 인원 숫자에 좌절하지 말고 무조건 버텨야 한다는 것이다. 실망해 백스텝을 밟았다가는 오히려 멀리 돌아오기밖에 안 된다. 지름길은 없다. 그 와중에도 자칫 화면이 흔들렸다 오류라도 날 새라 휴대폰을 쥔 손마저도 경건해진다.


조금씩 줄어드는 대기인원수를 뚫어지게 보던 인내 끝에, 드디어! 화면이 넘어갔다. 날짜 선택 화면이 나타났을 때 그 환희란. 지져스!!

날짜를 클릭했다. 이번엔 시간 선택. 오후 3시와 저녁 7시 두 시간대 중 고민할 것도 없이 3시를 클릭했다. 어린이 공연 같은 아이 동반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녁 시간대를 선호한다. 경쟁이 덜 셀 것 같은 애매한 3시를 고르는 게 나름의 전략이다.

그다음은 좌석 선택 단계. 역시 같은 전략으로, 모두가 원할 무대 전방은 애초에 제외하고 그 외 구역을 노렸다. 이때부터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좋은 자리, 아닌 자리를 재고 있을 겨를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미 다 따가서 남은 포도(남은 좌석이 보라색으로 표시되는 것을 두고 우리 아미들은 '포도'라 불렀다)없고, 그나마 어쩌다 한 두 개 있는 것도 클릭하면 '다른 예매자가 결제 중인 좌석입니다'라고 안내가 뜨기 일쑤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구역마다 돌아가며 남은 자리를 클릭 클릭하고 다녔다. 그마저도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화면이 넘어갔다. 결제 화면이었다! 으악!!

드디어 수확에 성공했다. 소중한 포도알 하나.

주소 등 예매자 정보를 입력하고, 결제까지 완료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리 얻기가 어렵지 돈 쓰기는 쉽구나.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메인 화면으로 다시 들어가 보니 맨 위에 아까는 없던 안내 문구가 생겼다.

'2분 만에 전석 매진되었습니다.'

그 아래 카리스마 있는 무대 매너의 나훈아 아저씨 머리 위로 '2024 LAST CONCERT 고마웠습니다!'가 크게 쓰여 있었다. 아까 10시 예매가 열리기 전에 본 포스터 문구 그대로다. 은퇴를 발표하고 마지막으로 여는 공연이니, 당연히 팬들에게 평생 받은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말이리라.

그런데 불과 2분간의 긴장 타고 피 터지는 티켓팅, 일명 피케팅을 마친 후 돌아서서 다시 보는 그 문구는 왠지 묘하게 편집되어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2분 만에 전석 매진되어... 고마웠습니다.


감히 엄마의 숭고한 덕질을, 엄마의 오빠를 놀리다니 송구합니다.





그렇습니다.

'2분 만에 전석 매진.. 고마웠습니다'에 내가 영광스럽게 일조하게 된 사연은 엄마로부터 왔다.

엄마는 지지난 주 내게 그가 콘서트를 한다고, 예매를 부탁하셨다. 은퇴 발표 후 마지막 콘서트라나. 피케팅이 예상되었지만 어찌 놓칠 수 있으랴.


엄마의 노래 사랑, 좁혀서는 트롯 사랑, 더 좁혀서는 나훈아 오빠 사랑은 내가 어릴 때부터 익히 알던 바다. 시골에만 살아온 우리 엄마가 그 옛날에 가수와 노래를 좋아하는 방법은 티브이로 보고 라디오로 노래를 듣는 것밖에는 달리 없었다. 도시라 해도 그 세대에는 다 그렇지 않던가. 그래도 제한된 환경에서 엄마는 최대한으로 즐겼다. 우리 집에서는 예로부터 TV 채널 선택권이 엄마에게 중앙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 덕분에 (수많은 채널의 존재가 무색하게) 거의 늘 노래하는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고정되어 있다시피 했었으니.


그런 엄마를 생각하면, 내게 흐르는 덕질의 피가 대관절 어디서 왔을지 굳이 어렵게 찾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트로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일인이라 엄마의 그것과 장르는 완전히 다르지만 음악과 그 세계를 향한 사모와 열렬함은 결을 같이 하는 듯하다.


요즘은 덕질에 DNA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깊이 한다. 엄마에서 나로 이어진 이것이 딸아이에게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미를 보인 것은 3~4년 전쯤부터이다. 그때는 아이가 아직 아호열 살 쯤이었는데 어린 딸은 가 열광하는 BTS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며 '아미 꿈나무'를 자처했다. 다만 그때는, 사랑하는 엄마가 좋아하니 그 좋아하는 모습이 좋아서 엄마가 좋아하는 가수를 덩달아 좋아하는 것이라 여겼다. DNA라기보다는 덕질하는 엄마,라는 후천적 영향으로 말미암았지 않았나 싶었다. 그러던 아이는 BTS 이외에 차세대 아이돌 그룹들을 고루고루 섭렵하며 무럭무럭 자랐다.

이제 사춘기에 들어선 우리 십 대 소녀는 엄마와 궤를 달리하며 '그녀만의' 덕질로 독립한 것처럼 보인다.


지지난주 서울여행 중. K-POP 매장에서 정신 못차리는 엄마와 누나. 그녀들을 기다리는 두 동생.



아이의 방을 도배하기 시작한 아이돌 그룹의 사진에 남편은 기겁을 했지만, 그의 옆에 서서 같은 곳에 시선을 둔 나의 마음은 므흣하며 평화로웠다. 이래뵈도 그녀보다 몇 해나 이른 1학년 때 이미 남정 오빠의 브로마이드를 책상 위 책상에 붙여두고 수시로 올려다봤던, 다소 조숙한 아이였던,  엄마가 된 나다.

자고로 이미 겪은 것을 지켜보는 자는 여유롭다.

위로는 엄마의 티켓팅을 기꺼이 대신하고, 아래로는 아이의 덕질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그리하여 기껍다. 다행이다.

덕질이라는 것이 얼마나 심장을 뛰게 하고 노화를 막아주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지 알기에 삼대에 걸쳐 이어지는 이 유전자인지 문화인지를 겪는 시간들이 여간 즐겁지가 않다.


아이들 학원으로 하던 라이딩을, 이번엔 우리 엄마 공연을 위해 출동한다. 곱게 화장하고 볼 발그레할 그녀를 모시고, 나도 공연장 앞에 차 대고 기다리는 K-효녀 노릇하는 역사적인 날을 맞이하여 영광이다.


테스형, 아니 훈아 오빠 곧 만나러 갑니다. 칠순 울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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