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이야기는 아주 오만했던 나의 스무 살 그 무렵의 이야기다. 살면서 대부분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기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입장이었다. 스스로 그런 자신이 조금은 자랑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어리고 이기적이라는 말보다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다는 말에 가까웠던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그래서 그랬다고 변명하고 싶은 오만한 과거의 반성문이다.
대부분 나는 솔직한 조언이라는 명목하에 그 사람에 대해서 가감 없이 말했다. 예를 들면 대학에 떨어진 J의 아버지가 지방의 공장에 취업하라 압박을 준다며 고민을 얘기를 들을 때 나는 J에게 '너 스스로 하고 싶은 걸 찾아 아버지께 노력의 결과로 보여드린 게 단 하나도 없으니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거야.' 라며 아주 오만하게 J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 오만한 시절의 나와 친했던 H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나도 내가 문제라는 거 알고 있었어. 근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 정말 인정하기 싫더라. 그래서 부정했고 너와의 관계는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게 되더라고'
내겐 J도 H도 소중했기에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그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해 노력했다. 고민에 대한 원인과 내가 내린 해결방안을 이야기했고, 내가 말한 대로 행동했는지, 그 결과 문제가 조금은 해결되었는지가 듣고 싶어 집착했다. 결과는 누구에게도 좋지 않았다. 내가 조언이랍시고 내뱉은 지나침 솔직함은 상대에게 상처가 되었고 , 나는 해결하지 않을 문제에 대해 나에게 잔뜩 고민만 털어놓는 상대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 내 언행은 조언이라는 이름의 무례함이었고, 남을 위한다는 명목하게 오만하게 남들의 선을 넘어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나는 소중한 사람의 고민이야기를 들을 때면 심각하게 몰입했다. 마치 내 일인 양. 처음엔 공감 이후엔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했다. 고민을 토한 사람이 내게 도움을 요청한 것도, 그렇게 애써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몰입했다. 내 인생보다 남의 인생에 몰입해 ‘이렇게 행동해라, 이런 행동은 하지 마라’ 왈가왈부했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니 인생이나 잘 살아' 아마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꾸역꾸역 삼켰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누군가 내게 힘든 일을 얘기할 때면 적당한 공감과 위로, 가벼운 조언정도로 이야기를 끝낸다. 이제는 직접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할 때를 제외하곤 크게 나서지 않는다. 남의 이야기에 정도를 넘어 심각하게 몰입할 필요도 감정적으로 힘들어할 필요도 없다. 분명히 그것은 남의 인생이다.
영원한 관계라는 게 존재할까.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인간관계는 유한했다. 환경이 달라지고 삶의 패턴이 달라지며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잊혀가는 관계는 누구나 경험해 본 적 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걷는 길이 달라지며 멀어지는 것. 모든 관계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큼 자연스럽게 먼지가 쌓이고 낡아간다.
나는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다. 비슷한 기로에서 잠시 함께 걷는 동행일 뿐. 그들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나에게는 누군가를 움직일 수 있는 힘도, 그럴 권리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소중한 나의 사람에게 조언은 가볍게, 그러나 응원은 든든하게’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