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경훈 Oct 09. 2022

문경훈의 음주동행(音酒同行) 18

청하 in my life

  ‘There are places I'll remember (내가 앞으로도 기억할 장소들이 있어)’. 비틀즈의 명반 <Rubber soul> 수록곡 ‘in my life’의 첫 구절이다. ‘나’를 ‘나’라고 규정 지을 수 있는 본질은 무엇일까. 수리된 테세우스의 배와 마찬가지로 답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나름의 답을 해보자면, 지나온 시간과 공간, 사람에 대한 기억들이라고 답하고 싶다. 나와 세포 하나까지 똑같은 복제인간과 내 기억이 고스란히 이식된 인공지능로봇 중에 후자가 ‘나’라고 믿는다. 내 기억들이란 곧 나를 둘러싼 관계의 총체이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관계 맺음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어느새 쌀쌀해진 날씨 탓일까, 말은 제법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사실 요즘 들어 옛날이 그립다는 말이다. 물론 과거엔 추억 보정이 있음을 부정하진 않겠다. 하지만 까짓 거 보정 좀 들어가면 어떻단 말인가.


  나의 유년시절, 매일 저녁 동네 친구들과 소꿉놀이하던 골목길, 밥 짓는 시간이면 이 집 저 집에서 엄마는 자기 자식을 큰 소리로 불렀다. 헤어짐이 아쉬웠던 마음도 잠시, TV에서 해주던 만화영화에 눈을 뺏겨 밥도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밥도 다 먹고 만화도 끝나고, 숙제도 다 해서 심심할 즈음이면 다시 밖으로 나가 가로등 밑에서 친구들과 모여 놀곤 했다. 이제는 드라마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아름다운 기억이다. 그렇게 뛰놀던 나의 골목길은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헛되이 사라졌다.


  근 30년을 살던 동네와 이별하고 취직과 함께 첫 홀로 살이를 인천 검단에서 시작했다. 직장에서 혼자 살던 원룸이 지근거리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 다녔다. 일을 마치고 고단한 몸을 이끌며 동네 국밥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집까지 터덜터덜 언덕길을 올랐다. 괜시리 답답한 날엔 근처 공원을 걸었고 어느 비 오던 날엔 문득 비를 맞고 싶어 우산도 없이 동네를 서성거렸다. 처음 겪어보는 외로움 탓에 거의 매일을 술에 취해 비틀거렸지만 그 밤거리가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지금이 그때보다 더 힘들고 외로운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추억 보정일까.


  지금도 그렇지만 힘든 외지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건 결국은 사람이었다. 내가 만난 J가 그런 사람이었다. 술이란 놈은 건강을 앗아가는 대신에 언제나 사람을 보내주었다. J와 나는 술자리에서 만나 친해졌는데 알고 보니 서로 사는 집도 멀지 않았고 나만큼이나 술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중가요보다는 재즈를, 재즈보다는 클래식을 좋아했지만 그냥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중요했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의기투합한 우리는 거의 매일을 붙어 다녔다. 하루는 내가 술이 고파 J를 만났고 또 하루는 J가 술이 고파 나를 만났고, 또 어쩔 땐 제삼자와 다 같이 만나 술을 마셨다. 이 집, 저 집을 탐닉했고 술 마시기 좋은 동네를 찾아다녔다. J는 청하를 좋아했다, 아니 거의 청하만 마셨다. 어린 시절 다른 술들은 이미 많이 마셔 지금은 청하가 좋다고 했다. 지금도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김현경·장하련·송재은의 수필집 『취하지 않고서야』에는 청하만 마시는 친구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이 책을 J에게 선물했고 언젠가 내가 글을 쓴다면 청하는 J의 술일 것이다. 좋은 날에도 술을 마셨고, 슬픈 날에도 술을 마셨다. 잔을 따라주는 행위는 어색하다며 항상 J의 술과 내 술, 2병씩 주문했다. 나도 J를 따라서 청하를 마실 때도 혹은 소주를 시켜 따로 마실 때도 있었지만 결국 취하고 나서야 술자리가 끝났다는 점은 매번 똑같았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J는 청하를 마시지만 이젠 술자리에 있는 시간보다 자연 속에서 지내는 날들이 곱절은 많아졌다. 언뜻 봐도 10Kg는 훌쩍 넘어보일 배낭을 등에 지고 큰 개들과 함께 산과 강을 넘나드는 J는 며칠 전, 공중파 방송에서도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꽤 먼 곳으로 이사했고 여전히 술을 마시고 글을 쓰지만, 술을 마시는 빈도는 줄었고 대신에 술 자체를 탐닉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제는 1년에 네댓 번을 겨우 만나지만 반가움이 조금 더 커진 것 말고는 그때와 달라진 것은 없다. 나중에 늙으면 알콜 중독 치료로 같은 병원 같은 호실에 입원하자고 우스갯소리를 나누곤 했는데 그건 아니더라도 언젠간 인천에서처럼 가까운 곳에 지내면서 청하를 홀짝이게 될 것이다. J 한 병, 그리고 나 한병.


1965년 발매된 비틀즈의 <rubber soul>. <revolver>,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이른바 화이트 앨범 등과 함께 손꼽히는 비틀즈의 명반이다. 본문의 ‘in my life’는 물론 ‘michelle’, ‘Norwegian Wood’ 등은 지금 들어도 손꼽히는 명곡이다.     


이전 11화 문경훈의 음주동행(音酒同行) 2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