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by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1993년 계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4편을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한강이 틈틈이 쓰고 발표한 시들 중 60편을 추려 묶어 데뷔 20년 만에 펴낸 첫 시집이다. 한강은 인간 삶의 고독과 비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진실과 본질적인 정서들을 특유의 단단하고 시정 어린 문체로 침묵의 그림을 그린다.
서랍에 무언가를 넣어 둔다는 것은 특별하게 소중한 것을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한강은 그중 저녁을 서랍에 넣어 두었다. 저녁은 어둠이 시작하는 때이다. 어둠은 모든 존재의 지우고 침묵이 시작된다. 그 침묵은 내면의 소리를 듣게 하고 “희미해지려는 마음”(p.14)을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p.14) 않는다.
어둠이 번져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기억과 예감은 나침반이 내가 나라는 것”(p.19)을 가리킨다. 저녁은 어둠으로 존재를 검게 지우는 것이 아니다. 어둠은 마음을 텅 비게 하여 그 존재를 느끼게 한다. 그 존재는 소리가 되어 번져와 물결처럼 실핏줄이 되어 심장 속으로 들어와 스며든다. 스며들고 번진 피투성이가 밤을 머금고 떠오르는 것은 영혼의 피가 된다.
거대한 흐름과 시간과 성장은 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 집요하게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가슴에서 생명은 그렇게 다시 깨어나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p.73)이다. 지금 나는 “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 그 꿈을 기억”(p.99)한다.
어둠의 시간은 인생의 나침반의 바늘을 거울 저편의 나에게 돌려 나를 찌른다. 그 아픔은 가혹하게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슬픔은 물기 없이 단단”(p.87)해져서 흐르지 않고 멎는다. 그 순간 우리는 침묵의 공간에 갇힌다. 우리는 침묵의 공간에서 텅 빈 눈을 마주한다. 텅 빈 눈을 본 순간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의미도 없어.”라는 목소리를 듣는다. 텅 빈 눈을 적신 것을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도록”(p.60) 내버려 둔다.
어둠 속에 웅크린 나는 밤을 기다리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은 아침이다. 우리는 다시 볕 속을 걷는다. 우리에게 “인생에서 어떤 의미도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p.97)이다. 그 빛은 언어의 공이 되어 서로에게 던져진다. 이제 너에게 말한다. 울어도 괜찮아,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내버려 두어도 괜찮아. 괜찮아는 마음의 메아리가 되어 마주 볼 수 없는 죽음, 공포, 슬픔을 “똑바로 쏘아”(p.111) 보게 한다.
우리는 보이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눈으로 또 다른 나에게 말을 붙이고 조용히 끌어안는다.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내 존재를 느낀 적이 있다고 말하고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텅 빈 눈이 아닌 떨리는 두 손을 얹어 그 얼굴을 만질 때 “지워진 그늘과 빛(p.132)” 사이로 삶이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