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쭌스토리 Mar 19. 2019

005. 한밤중의 낯선 남자

러시아. 울란우데



기차는 연착을 했다. 



얼마 만에 흔들리지 않는 땅에서 자유인가. 

영화 설국 열차 같은 삶은 살아갈 수는 있는 걸까. 

아름다운 풍경을 몇 시간이나 같은 자리에서 넋 놓고 볼 수 있는 자유가 없는 삶은, 나는 살지 못할 거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잇는 시베리아 열차에서 울란우데라는 곳에 내린 이유는 육로로(버스로)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까지 갈 수 있어서였다. 한국을 떠나기 전 유일하게 준비한 것이 있다면 몽골 비자를 받는 것이었는데, 몽골을 다녀온 사람이 주위에 한 명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막의 별”이란 키워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던 터였다. 



러시아 전역을 사용할 수 있다는 유심카드는 열차를 타고 오면서 내내 불통이었다.

역내 긴 의자에 앉아 커다란 배낭을 두고 잠시 숨을 돌리니 부재중 전화 문자메시지가 왔다. 그로부터 였다.

나는 덜컥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예고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잃어버린 딸을 찾는 아버지 마냥 눈에 선한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괜찮아. 다만, 조금 아프고 불편했을 뿐이야. '



그에게 열차 여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하고 안심을 시켰다. 나는 너무나도 지쳤지만, 그대로 쓰러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역에서 가장 가까운 숙소를 찾아 1박을 예약을 했다. 바로 역 앞에 있는 호텔이었는데, 6개 침실이 있는 도미토리로 안내받았다. 다행히 방을 이용하는 사람은 나 혼자였고, 친절하게 방에는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보일러 장치까지 있어, 4일 만에 뜨거운 물에 피곤함과 고단함을 씻어 내려갔다. 제대로 된 (접지 않아도 되는) 매트리스에 몸을 누이자마자 잠에 곯아떨어졌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주위가 어두워지고, 방 안에도 어둠이 가득 차, 불을 켜야만 사물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나 오래 잠이 들어버렸나. ‘



일어나서 시장한 배를 채우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또 옆구리에 찌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열차를 타고 오며 내내 괴롭혔던 고통의 원인은 신장에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신장이라니.. 내가 왜.?' 수많은 의문을 뒤로하고, 일단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응급처치 같은 것을 검색해 나갔다. 



신장이 아플 때에는 결석이나 바이러스로 인한 염증이 있을 수 있어서 맥주를 마시면 좋다고 했다. 물도 많이 마셔야 한다고 했다. 상점에 들러 벽에 있는 맥주 탭들을 보았다. 생맥주 집에서나 볼 수 있는 탭들이 맥주 종류별로 7개나 있었다. 한잔을 주문을 하니, 탭에 있는 페트병에 맥주를 담아 잔에 따라주었다. 생맥주 한 잔을 생명수나 되듯이 조심스레 맛을 보고 들이켰다. 쌉쌀한 맛이 혀끝을 따라, 식도로, 어느새 알코올의 기운이 혈관을 따라 온 몸에 퍼져나가는게 느껴졌다. 


'젠장! 아픈데도 이렇게 맛있으면 어쩌라는거지.? 컨디션이 좋았으면 종류별로 다 마셔봤을텐데...'


이것도 저것도 맛을 보고 싶었으나, 마음과는 달리 몸이 버텨주지를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을 조금 더 신기해하고, 더 자세히 보고 싶어 하는 마음과는 달리 발은 숙소로 몸을 이끌고 있었다. 결국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일 아침에 먹을 과일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가는 길, 까만 밤, 숙소 앞 기차역만이 환하게 빛을 비추었다. 

'정말 이 기차를 3일 밤 하고 4일 낮을 타고 여기까지 온 것인가'



꿈처럼 느껴졌다. 

떠나와서 모든 하루하루가 현실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내가 겪어보지 못한 신.세.계 였기 때문일지라. 



*** 

숙소로 돌아와서, '힘든 순간에 감사함을 알게 된다'는 옛말처럼, 몸을 제대로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음이 어찌나 감사한지, 그동안 아픈 곳 없이 두 다리로 잘 걸어 다녔던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나는 열차를 타고나서, 그리고 아프고 나서야 그 진리를  뼛속까지 느끼게 되었다. 쌉쌀한 맥주 한 모금을 들이켠 뒤, 통증을 잊으려 다시 눈을 감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부스럭. 부스럭.



분명 혼자일 방에 나 외의 다른 생명체에 의한 소리들이 공간을 파고들고 있었다.

곤두세운 신경으로 그 소리를 쫓았다.



'헛… '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람이었다. 

남자였다.

순간적으로 긴장을 했다. 분명 이 방은 나 혼자 사용했는데, 남자라니...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자근자근 씹어댔다. 



아마도, 지난밤 내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 술에 얼큰하게 취한 러시아 청년이 들어왔나 보다. 

나뒹구는 신발들과 흐트러진 모습들에 잠시 불안했지만, 자세히 보니 그는 그저 쓰러져버린 고주망태일 뿐이었다. 추워질 러시아의 긴 밤들을 이 곳 젊음들은 이렇게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며 보내는가 싶기도 했고, 그가 어떤 불순한 목적도, 그 목적을 행할 정신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시금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을 해보니 여행을 떠나오고 나서 아직까지 한 번도 혼자만의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다 각오하고 떠난 여행이었으나, 자다가도 깜짝깜짝 놀랄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날까 라는 불안감도 생겼다. 그러나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지금 당장은 옆구리의 고통을 해결하는 게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여행이라고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군.'  


쓸쓸해진 입맛을 다시며, 다시 눈을 붙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004. 기차에서 만난 얼굴 그리고 보드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