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겐 네 명의 조카가 있다. 서영, 서윤, 찬영, 서준.
서윤이와 서준이는 첫째 누나 아이들인데 우리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산다. 누나와 매형이 맞벌이를 하다 보니 아침, 저녁으로 할머니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어릴 때부터 그 차이점이 확연히 눈에 띄는 건지는 모르고 있었다. 서영이와 서윤이는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고, 찬영이와 서준이는 아직 유치원에 다니는 남자아이다. 서영이와 서윤이는 다소 예민하고 경계심이 많다. 반면 찬영이와 서준이는 뭐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하려고 한다.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찬영이와 서준이를 볼 때면, 이 아이들의 눈에 다른 건 전혀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이 상태에선 불러도 입으로만 대답하고 만다.
지금은 찬영이와 서준이가 나랑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잘 놀아주지만(?) 사춘기가 됐을 때 찬영이와 서준이가 변할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섭섭해진다. "삼촌~" 하고 부르며 나를 따르던 강아지들이 자기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려 한다면 아이들이 컸다는 걸 실감하면서도 내가 그만큼 늙었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서글플 것 같다.
2.
서윤이는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닌다. 집에서 나와 학교까지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엄마가, 할머니가 서윤이를 데리러 간다.
그 모습을 볼 때면 기분이 묘해진다. 누나들과 나는 집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이때 엄마가 우리를 데려다준다던가, 데리러 온다던가 한 적이 없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랬다.
반면 서윤이는 코앞에 있는 학교에 다니면서도 여전히 엄마와 할머니의 손길이 필요하다. 요즘 아이들이 지나친 보살핌 속에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근데 서윤이 입장에서 봤을 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학교가 끝날 때쯤이면 학교 앞 횡단보도에 아이들을 데려가기 위해 모인 학부모들로 벅적벅적 하다.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데리러 왔는데, 서윤이만 데려갈 사람이 없다면 그때 느낄 외로움은 서윤이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서윤이의 마음을 물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아직도 엄마가, 할머니가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기를 바라는 건 그 이유에서 일지도 모른다.
3.
할머니 집 근처에 살고 있는 서윤이와 서준이가 부럽기도 하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조카들 편이다. 항상 자기편이 되어줄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다는 게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정서적 지지가 되어줄지 생각하게 된다.
크면서 때로는 엄마, 아빠에게 섭섭한 게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와 칭얼댈 수 있다. 아이들의 이야기에 항상 귀를 기울여줄 사람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4.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서윤이와 서준이가 밥을 먹고 있었다. 원래 누나네 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집으로 데려온 할머니였다.
아이들 밥을 먹이는 건 할머니 역할이다. 할머니는 항상 정성스럽게 아이들 밥을 준비한다. 서윤이는 얌전히 식탁 앞에서 밥을 먹는 반면, 서준이는 한 입 먹고 딴짓하러 간다. 그러면 할머니는 서준이를 불러 "한 입 먹고 가~" 한다. 매번 이러는 게 싫기도 하련만 할머니에게 서준이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자다. 무슨 짓을 해도 귀엽게만 보일 거다.
퇴근하고 돌아온 외삼촌은 쉬고 싶다. 아이들은 아무리 지치고 피곤해도 밥만 먹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쌩쌩해지지만 늙은 삼촌은 그럴 수 없다. 조카들이 아무리 반가워도 퇴근 후에 만난 조카들은 솔직히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5.
서윤이와 서준이는 남매지만 서로에게 좋은 친구이기도 하다. 밥을 먹고 나서 익숙하게 할머니 서랍에서 종이와 색연필을 꺼내 그림을 그린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끼리 잘 노니까, 오늘은 놀아달라고 하지 않겠네' 했다. 착각이었다.
"서준아, 우리 삼촌이랑 놀래?"
난데없이 서윤이가 삼촌을 언급했다.
"응."
사실 서준이에겐 선택권이 없다. 누나가 하자고 하면 하는 서준이니까. 내겐 서준이의 짧은 대답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로 들렸다.
"삼촌, 같이 놀자!"
"으, 응...... 그래, 뭐하고 놀까?"
뭐하고 놀지 물어보면 아이들이 항상 하는 대답은 '잡기 놀이'다.
얘들아, 너네는 밥만 먹어도 다시 충전되겠지만, 삼촌은 아니란다.
'잡기 놀이'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나는 뛰면 아랫집에 살고 있는 무서운 아저씨가 올라올 거라고 겁을 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살금살금' 걷겠다고 말한다. 나는 아이들의 확답을 얻어내고자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우리는 살금살금 걷기로 약속했다. 서윤이는 약속을 지키겠지만, 서준이가 끝까지 약속을 지킬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했다. 서른 넘은 아저씨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는 건 아무리 집안이라도 다소 민망하다. 내가 술래 할 차례가 왔을 때 "삼촌은 열까지 세고 찾을게"라고 대안을 제시했고, 아이들은 별로 거슬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무궁화 꽃을 찾은 후에야 다른 놀이를 할 수 있었다.
6.
서윤이가 이번에는 아이패드로 게임을 하고 싶다고 했다. 피곤한 삼촌 입장에서 무궁화 꽃을 찾는 것보다 아이패드 게임이 훨씬 더 좋은 선택이다. 나는 내심 기뻐하며 무슨 게임을 하고 싶냐고 물었고, 서윤이는 'ROBLOX'라는 게임을 하고 싶다고 했다. 듣기로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가 많은 게임이라고 한다. 무슨 게임인가 해서 봤더니 캐릭터가 장애물을 피해서 달리고 점프하는 게 전부다. 나도 게임을 좋아하지만 이런 부류의 게임은 별로다. 나는 입으로만 '재밌겠다, 잘한다'라고 거들면서 귤을 까먹었다.
서윤이와 서준이는 더욱더 게임에 몰입했다. 아이들이 잘하고 있나 봐주지 않아도 됐던 나는 침대 위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가끔 '사이좋게 해야지', '서준이도 한 번 시켜줘'할 뿐이었다.
7.
한참 즐겁게 게임을 하고 있는 서윤이에게 집에서도 아이패드 게임을 하냐고 물었다. 서윤이는 금요일, 토요일에만 게임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응? 그러면 지금 외삼촌 아이패드로 게임을 하고 있는 건...?
아이들에게 오늘 게임을 하는 게 괜찮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말이 없다. 어른 된 사람으로서 게임이나 하라고 내버려 두는 게 과연 좋은 건가 싶었다. 게다가 이건 부모가 만든 규칙에서 예외적인 경우를 만드는 거니까 아무래도 신경 쓰인다.
"그럼 오늘 아이패드로 게임한 건 비밀로 하자."
이 말을 할 당시에는 분명 좋은 동기에서 한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잘못 말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먼저 비밀로 하자고 함으로써 앞으로 할머니네 집에 오면 아이패드 게임을 할 수 있고, 서윤이네 엄마 아빠에게는 비밀로 한다는 꼴이 된다. 앞으로 아이들이 더 자주 놀러 올 텐데 과연 잘한 건지 모르겠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서윤이가 다급히 "서준아 아이패드 꺼!"라고 말했다. 아마 서윤이가 그렇게 말한 건 엄마가 자기를 데리러 온 거라 생각해서 한 말이었을 거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할아버지라는 걸 알자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글쎄,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