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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 느낌 그대로 Nov 13. 2023

나는 유재석이 싫다

나는 P가 싫다. 오래도록 P가 싫었다.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이 곧잘 표정으로 드러나서 P가 싫어도 싫어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껏 P를 싫어해도 괜찮다.


P에겐 내가 갖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다. 내게 그것이 필요하다 여겨 P를 멀리하고 싶으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이런 걸 보면 나도 확실히 나이를 먹긴 했나 보다. 어릴 적 나는 싫으면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름 머릿속의 계산기를 두드릴 줄 알게 되었다. 싫은 사람의 이용 가치를 수치화하여 더하고 빼본다. 이 사람을 근처에 두었을 때 이득이 되는 점과 손해가 되는 점을 계산해 본다. 이 결괏값이 양(陽)이면 곁에 두고 음(陰)이면 차단한다.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렇게 된 건 아니었다.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P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그랬었다. 'P가 싫다'는 문장을 여러 번 생각하다가 문득 '나는 유재석이 싫다.'는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유재석 씨에 대한 어떤 감정도 없다. 유재석 씨가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 다만 유재석 씨가 국민 MC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을 정도로 이미지가 좋다는 건 안다. 그런 유재석 씨를 내가 싫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필시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내가 P를 싫어하는 상황도 그러하다. 내가 P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P에 대한 이미지 때문에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P가 싫다'는 말을 해야겠다. 나는 P의 배면을 보았고 그 배면에 대해 폭로해야만 하겠다.


P를 싫어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나는 취업한 이후로 쭉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잘 쓰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쓴 글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계속해서 글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한 명의 창작자로서 직업 외의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창작자들에게 쓸데없어 보이는 고집 아닌 고집이 있다. 그건 내 창작물에 대해 의견을 말할 수는 있지만 창작물에 직접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 내가 쓴 글이 별로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내가 쓴 글을 수정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다름 아닌 P가 그런 무식하고 교양없는 짓을 했다. 예를 들어 내가 이런 글을 썼다고 해보자.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철수입니다."
"저는 영희입니다."

그런데 P는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아래와 같이 글을 고쳤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철수입니다." "저는 영희입니다."

나는 대단히 심각한 오류가 생긴 것 같아 P에게 직접 연락해 수정을 부탁했다. 그때 P가 한 말이 가관이었다.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바꿨다는 거였다. 아...... 믿었던 사람에게 발등 찍힌 기분이 바로 이런 걸까. 나는 그 메시지를 읽고 한동안 멍했다. 곧 화(火)가 나기 시작했는데, 화가 나면서도 이 화가 자연스러운 반응의 화인지 헷갈렸다. 난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한참 고민하다가 처음에 보낸 대로 고쳐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알겠다고 했지만 전혀 고치지 않았다. 내가 정색하고 재차 따지고 나서야 부탁한 바를 들어주었다. 내 글이 보잘 것 없더라도 타인이 그 글을 직접 수정해서는 안 된다. 그건 창작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물론 대화문을 길게 이어서 쓰는 경우도 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대화문을 한 단락 안에 길게 쓴 부분이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나도, P도 김승옥이 아니라는 것이다. 걸출한 문장가도 아닌 사람이 대가의 문장을 따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때부터였다. P를 싫어하게 된 건. P는 그 뒤로도 위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실수를 반복했다. 그가 저지른, 실수를 가장한 잘못에 대해 쓰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이만 줄이기로 한다.


P가 싫었지만 여전히 P가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그에게 주의력결핍 장애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약까지 타서 먹고 있다고 했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P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대개 그가 가진 질병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도 그가 저지른 잘못을 떠올릴 때면 화가 나는데, 정신이 아픈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게 맞는 건지 헷갈렸다. P가 싫으면서도 싫어할 수 없는 애매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병원에서 밥을 먹은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온갖 환자들을 다 만났다. 그중에는 당연히 정신과 환자도 포함된다. 정신과 진료를 두고서 여전히 비이성적인 편견이 남아 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듯이 마음이 아파도 당연히 병원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본다고 하면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편견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게 정신과 환자이다. 문제는 정신과 진료를 보는 게 아니라 진료를 받지 않는 것에 있다. 마음이 안 좋을 때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하고 약을 타 먹는다.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만이 중요하다.


P에게 무슨 정신적 장애가 있건 간에, 그건 나와 P 사이의 '공적인 일'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없다. P가 주의력결핍이 있든, 단기기억상실증이 있든 P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한 사람은 때가 되면 자립하여 스스로 먹고살 수 있어야 한다.

일.

일에 대한 정의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일은 곧 약속'이라 말하고 싶다. 정해진 규칙을 지키는 것, 정해진 시간을 지키는 것 등 우리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지켜야 하는 약속이 있다.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P와 함께 일하면서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에서 해방되려 이 글을 쓴다.


P는 자신에 대한 왜곡된 상을 갖고 있다. 스스로가 일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여태 살면서 별의별 사람을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일을 못하면서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기본적인 업무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일을 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그에게 장점 아닌 장점이 있다고 한다면, 곧잘 '죄송하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들은 '죄송합니다'만 해도 서른 번은 족히 넘는다. 나는 자존심이 상해서 죄송할 짓을 또 하지 않는다. 그는 나와 너무 다르다.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실수 혹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그 사실을 까먹어버리니 실수 혹은 잘못을 반복해서 하는 수밖에 없다. P는 내게 있어 연구 대상이다.



P.S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P가 망하길 바란다. 미시마 유키오가 쓴 소설 '금각사'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날 밤, 우이코의 고자질로 그녀의 엄마가 숙부 집에 찾아왔다. 평소에 온화하던 숙부는 나를 심하게 질책했다. 나는 우이코를 저주하며 죽기를 바랐는데, 수개월 후에 그 저주가 이루어졌다. 이후로 나는 남을 저주하는 일에 확신을 갖게 됐다.

나도 남을 저주하는 일에는 그 어떤 사람에도 뒤처지지 않는다. P가 스스로를 일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런 면이 있다. 그러나 P가 알아야 할 게 있다. 내 저주에는 분명한 실효성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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