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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 느낌 그대로 Dec 22. 2023

나는 짱이다.  그런데 김승옥보다는 덜 짱이다.

어느 산문집의 에필로그에서 작가가 '나는 존나 짱이다' 하고 쓴 구절을 기억한다. 너는 꽝이고 나는 짱이니까 이런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너네가 안타깝다는 이야기다. 이 글을 읽기 전에 나는,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하고 자주 생각했었다. 에필로그는 내게 생각의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늘 내 탓으로 돌리던 지난날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나는 존나 짱이다'라는 문장을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담아두기로 했다. 그런데 조금 변형시켜서. '나는 존나 짱이다'가 아니라 '우리는 모두 짱이다. 그런데 내가 너보다 더 짱이다'로.


내가 잘하고 싶은 분야는 글쓰기다. 그런데 글쓰기는 참 멋이 없다. 펜과 종이 혹은 컴퓨터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글쓰기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앉아서 종이에 끄적거리거나 자판만 두드리면 되는 글쓰기. 그러나 글쓰기를 시작한 이래로 위기는 자주 찾아왔다. 대체 무슨 수로 흰 바탕을 검은 글씨로 채워간단 말인가? 때론 뭐라도 쓰려고 컴퓨터를 켰다가,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컴퓨터를 꺼버리기도 했다.

또한 이런 질문도 자주 떠올라 나를 괴롭혔다. 지금 쓴 글을, 내일 보면 왜 우스운 걸까? 분명 열심히 썼으나 그 결과물을 다른 날 읽어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다. 오늘은 괜찮았다가 내일은 어이 없어지는 글쓰기를 곁에 두다 보니 이로 인한 조울증이 생겨버렸다. 오늘의 글쓰기와 내일의 글쓰기를 비교하는 건 그나마 괜찮다. 뭐가 됐든 내 탓을 하면 되니까. 내가 못 써서 그런 거다, 하면 된다. 문제는 나의 글쓰기와 너의 글쓰기를 비교할 때다. 나의 글은 아직 한 권의 책이 되지 못했는데, 너의 글은 한 권의 책이 되었구나. 혹은 나의 문장은 이러한데 너의 문장은 이러하구나 따위의 비교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비교들이지만 나의 글과 너의 글을 비교하려는 마음이 들 때만큼 나를 좌절케 하는 건 없었다. 그래서 이런 감정이 들 때면 나는 서둘러 내 마음 한구석에 간직해 둔 '그 문장'을 꺼낸다.

'우리는 모두 짱이다. 그런데 내가 너보다 더 짱이다.'

나는 글쓰기라는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는 문우들을 무시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다만 이름난, 아무리 천재적인 작가의 글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쓴 글보다는 못하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이 아무리 내 글을 비웃는다고 해도 내 글을 그 누구보다 사랑해 줄, 언제든 남아 있을 사람이 바로 '나'다. 한 책의 에필로그 덕분에 써지지 않는 글을 부여잡고서도 제정신을 갖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한 작가에게 눈을 뜨고 나서부터는 내 마음속 문장을 꺼내기가 머쓱해졌다.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평을 들으며 등장한 김승옥. 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 이 두 작품을 중고등학교 교과서와 참고서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앎은 문제 풀이를 위한 앎에서 그쳤다. 나는 문제를 풀기 위해 작품을 읽었을 뿐이지 그 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 몇 개월 전 소설 쓰기를 배우고 나서는 모든 게 달라졌다. 두 달 동안 소설을 공부하면서 배운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소설의 배경이 인물만큼이나 중요하다'라는 선생님의 가르침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한동안 멍했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건을 이끌어가는 인물 아닌가? 그런데 그 인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배경이라고? 그럴 수 있을까? 그리하여 한동안 소설 속 배경이 소설에 기여하는 바가 무엇인지 연구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그러자 소설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아, 배경은 인물만큼이나 중요하다. 정말 그렇다. 대표적인 예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다. 김승옥은 배경을 잘 활용한다. 서로 치대면서 살아가는 A라는 공간과 이상적인 B라는 공간의 대조가 잘 드러난다. '무진기행'의 '무진'은 작가가 창조해 낸 배경이다. 여기에 무진을 더욱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안개'라는 소재가 더해졌다.

아, 김승옥을 과연 나와 같은 사람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나는 김승옥의 단편·장편 소설을 두루 읽으며 스스로를 벌레 같다 여겼다. 내가 쓴 글은 김승옥의 글에 비하면 버러지, 쓰레기인 것이다. 김승옥의 문장을 읽을 때면, 문장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느꼈다. 그럴 때면 자연스레 내 마음속 문장이 고개를 쳐들었다.

'우리는 모두 짱이다. 그런데 내가 너보다 더 짱이다.'

글쎄...... 김승옥은 분명 짱이다...... 그러면 나도 김승옥처럼 짱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고민해 볼 필요도 없이 '아니다'. 그래, 그럼에도 나는 내 글이 좋다고 말해야 돼. 그럼, 내가 김승옥보다 짱인가......? 스스로 비참해지는 이 질문을 여러 번 반복한 후에야 내 마음속 문장에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짱이다. 그런데 김승옥보다는 덜 짱이다.'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진다. 그렇다. 나보다 한 수 위에 있는 자가 바로 김승옥이다.


물론 김승옥의 소설을 지적하라면 얼마든지 지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승옥의 소설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들이 있다. 서울, 서울대학교, 누나와 남동생, 하숙집, 기차, 약품 등. 나는 모름지기 작가라면 여러 가지의 삶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김승옥의 소설은 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승옥은 살아 움직이는 문장으로써 내가 단점이라 여기는 것들을 생각조차 나지 않게 한다.

소설을 공부해 가며 걸어가야 할 어두컴컴한 길을 환히 밝혀줄 등대 같은 스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누구를 믿고 소설 길을 걸으면 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의 길은 김승옥이다.

그리하여 내가 매일 해야 할 일 중에 하나로 '생명연습'을 넣었다. 김승옥의 등단작이다. 내가 김승옥의 소설을 공부하는 건 내게 있어서 '생명연습'이다. 김승옥을 통해 소설을 연습하며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짱이다. 그런데 김승옥보다는 덜 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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