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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음 느낌 그대로 Apr 01. 2024

소설에 재능이 있는지 알려면

두 번째 소설 강의가 끝났다. 이로써 습작생 배지를 6개월째 달고 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성장했나?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매일 소설을 생각하면서 살았다. 소설은 희로애락 자체다. 소설을 빼면 내 삶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매일 흔들리며 소설을 쓰고 있다.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이를테면 아침에는 아무래도 소설 쓰기를 때려치워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저녁에는 그동안 해온 게 얼마인데 혹은 이 정도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시시각각 변덕스럽게 달라지는 마음을 단속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요즘은 시간이 없다. 바쁜 게 아니라 시간이 없다는 게 정확한 내 마음이다. 바쁘다고 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독서와 습작, 이 두 가지만 하면서 산다. 습작이 끝나면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쓸 수는 없다. 하지만 때가 되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려야 한다. 습작을 하는 동안 책을 읽고 싶어서 미칠 때가 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나의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게 습작이다. 어쩔 수 없이 독서 시간을 줄여야 한다.


누군가 어제 뭐 했냐고 물으면 책을 읽었다고 말할 것이고, 그제는 뭘 했냐고 물으면 습작을 했다고 말할 것이며, 그그제는 뭐 했냐고 물으면 책을 읽고 습작을 했다고 말할 것이다. 참으로 단순한 삶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로 인해 나는 시간이 없다. 삶이 단조롭지만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이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결국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다.


요즘은 내가 쓴 글의 깊이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나의 글이 너무 피상적이어서 좌절스럽다. 이전에 남긴 마지막 글이 '깊이란 무엇인가'였다. 나는 '깊이란 세계다'라고 정의했다. 깊이가 뭔지 알지만 깊이를 표현할 줄 모른다는 게 내 문제다. 소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깊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 주제에 대해 아주 오래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그것의 밑바닥에 닿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여태 살면서 단 한 번도 하나의 주제에 대해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깊이란 무엇인지 알면서도 깊이를 표현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지난 6개월 동안 쓴 글들을 쭉 읽어본다. 쓸 때는 정말 열심히 썼다고 썼는데, 지금 읽어보니 형편없다. 죄다 깊이가 없다. 깊이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현재 시제로 쓴 문장을 찾으면 된다. 이야기의 진행은 과거 시제로, 작가의 사유는 현재 시제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지난 글들을 살펴보면 나는 과거 시제를 주로 썼다. 현재 시제로 쓴 문장이 별로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몇 주 전 소설 선생님께 아무래도 이 짓(?)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소설의 벽은 높기만 했다. 도저히 이 벽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당연히 어려운 과정을 겪고 있는 거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내게 그동안 습작을 몇 편이나 했는지 물었다. 수업 때 한 게 전부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아직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할 수 없다고 하셨다. 앞으로 10편을 더 써서 보여달라고 하셨다. 그러면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알려주겠단다. 소설 한 편은 A4용지 약 10장 분량이다. 습작 10편이라고? 무려 100장 이상 써야 한다. 사실 10편 쓰는 건 문제가 아니다. 나는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저 버틸 뿐이다. 그러니 10편이든 100편이든 그냥 쓰면 된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10편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선생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이번에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자가 10년 동안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고 한다. 절로 숙연해졌다. 고작 6개월 써놓고 대단한 소설을 쓸 수 있길 바랐다니. 이건 스스로를 기만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게 선생님의 상술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소설 강의료는 생각보다 비싸다. 2달 치를 미리 낸다. 나는 소비 성향이 크지 않은 편이다. 소설 강의료가 비싸지만 그렇다고 아주 부담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격월로 30 몇만 원씩 내기는 망설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걸까. 물론 돈 때문에 선생님과 만날 수 있고 선생님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안다. 그런데 대체 얼마나 더...?


만약 나의 성장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이런 종류의 망설임은 느끼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글이라는 게, 아무리 열심히, 빈틈없이 썼어도, 타인의 눈으로 보면 숭숭 뚫린 구멍이 훤히 잘 보이는 것이다. 그 구멍에 대해 듣기 위해 선생님을 만난다. 확신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길을 걸어가는 게 과연 맞는 것일까.


그럼에도 결국 이 자리로 돌아온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다. 주야장천 자판만 두들기다 보면 뭐라도 나오기 마련이다. 자판을 두드리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두드려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10년쯤? 그런데 그래야 할 것 같다. 버텨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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