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에 관하여
넷플릭스 TV시리즈 ‘그레이스 앤 프랭키’를 좋아한다. 시즌1의 1화를 시작으로 당시 나와 있던 모든 에피소드를 단숨에 봤다. 한 해를 꼬박 기다려 만난 시즌 4는 공개된 시점으로 24시간 만에 ‘원샷 원킬’로 끝냈을 정도다. 이 시리즈의 시작은 굉장히 파격적이다. 로펌을 함께 운영하는 두 남편이 동업자가 아닌 연인 관계로 발전하면서 두 아내에게 이혼을 통보한다. 70대의 나이에 40년 결혼 생활을 뒤로하고, 한 순간에 이혼당한 두 아내는 남은 삶을 함께 하며 우정을 키운다. 그레이스와 프랭키, 두 할머니의 노년을 통해 ‘나이 듦’ 혹은 ‘노화’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 이 시리즈가 좋았다. 또한, 노인뿐 아니라 동성애자, 여성 등 다양한 이들의 삶을 유쾌하고도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어 특히 좋았다. 어떻게 나이 들 것인지, 어떤 어른으로 늙을 것인지 고민할 기회가 되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렵다. 피부에 주름이 지고 신체적 기능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생리적 노화’는 두렵지 않다. 마음이 늙는 것, 열정을 잃는 것,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과 같은 ‘정신적 노화’가 두렵다. 내가 가진 두려움의 이유를 나는 막연하게나마 안다. 조부모와의 사이에서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했고, 존경할만한 노인을 아직은 직접 만나지 못했다. 아마 이 지점에서부터 ‘나이 듦’에 관한 공포가 시작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나의 조부모 같은 노인이 될까 봐, 내가 모르는 사이 주관이 아집이 되고 후대 사람들에게 폭력이 될까 봐, ‘늙음’의 본질이 그런 것이고 나 역시 그것을 피하지 못할까 봐 몹시 두렵다.
경상도의 시골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나의 조부모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보수적이고 꽉 막힌 사람들이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고 믿으며 어린 손녀에게 철저한 가부장적 사고를 주입시켰다. 아들을 낳지 않으면 자식으로 인정 않겠다며 나의 어머니를 닦달하고 어린 나와 내 동생에게는 ‘친가에서는 큰절, 외가에서는 작은 절’이 예법이라고 가르쳤다. 식사 때에는 매번 며느리와 손녀들이 먹는 상과 아들과 손자들이 먹는 상을 따로 차렸다. 이러한 조부모의 사상은 나와 나의 어머니에게 폭력 그 자체였다.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합격했을 무렵, 친가 친척이 함께 모여 조모의 생신을 축하했다. 그때 조모는 나에게 '계집이 대학을 잘 가서 지 부모에게는 효녀질 했지만 고종 사촌이 삼수를 하는 마당이므로' 고모 눈에 띄지 않도록 구석에 앉으라고 했다. 큰집의 사촌 동생이 그 이듬해에 재수를 했을 때에는 ‘네 년이 고마 한 번에 붙어서 부담이 된 사촌이 시험을 망쳤다’ 고도했다. 그런 폭언과 폭력을 견디며 속수무책 울기만 하던 나는 근래에 와서 조부모에게 완전히 발걸음을 끊었다. 그런 다음에야 나 자신이 조부모의 폭력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었다.
불행히도 조부모와의 관계를 단절한다고 해서 공포 또한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조부모와의 폭력적인 관계는 나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노화에 관한 공포를 온몸으로 느낀다. 주로 이러한 공포는 일주일 중에서도 목요일이나 금요일쯤, 시간적으로는 잠들기 직전에 극대화된다. 무심코 자려고 누웠다가 ‘벌써 내일만 출근하면 주말’이라는 사소한 생각이 들 때, 방심한 그 순간 공포가 찾아든다. 시간이 참 빠르니 그 속도만큼이나 나 또한 빨리 늙겠지. 일순간 노인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한다. 순간에 지나가고야 마는 이미지이지만, 그 생생함은 마치 현실 같아서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쿵쿵 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든 밤이면 같은 꿈을 꾼다. 조부모의 폭언 앞에서 쩔쩔매는 내 모습을 본다. 꿈속 나는 무언가 항변하려 하지만 목이 심하게 메어와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내내 꺽꺽대며 신음만 하다가 결국 꿈에서 깬다. 이러한 공포 앞에 자고 깨는 것 또한 그저 ‘하루 더 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는 존경받는 어른들이 많다. 자신의 조부모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손녀, 손자 또한 많다. 그렇기에 내가 느끼는 이러한 공포는 분명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다. 객관적으로 위험하거나 불안할 것 없는 상황에서도 극한의 불안을 경험하는 포비아. 이러한 실체 없는 공포로부터 나는 누구보다 벗어나고 싶다. 하루하루가 생(生)이 아닌 사(死)로의 과정이라 여길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짐스러운지 겪지 않은 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존경받는 어른의 모습을 수없이 상기하며 나 또한 그런 모습을 다짐하는 것이다. 책이나 영화, 사진전 등 노인들의 모습을 담은 예술 작품들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런 점에서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나에게 의미가 크다. 교양과 품위를 잃지 않으며 평생을 꼿꼿하게 살아가는 그레이스는 노년기의 삶에서도 결코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70대의 나이에도 히피 정신을 간직하며 입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프랭키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천진하다. 이 두 할머니가 함께 꾸려가는 노년의 삶 속에서 죽음이 아닌 생을 본다. 노화란 삶의 빛을 천천히 잃어가는 과정이 결코 아님을, 이 둘의 빛나는 모습을 통해 본다.
일본의 작가 무레 요코가 자신의 외조모를 바라보며 쓴 에세이 ‘모모요는 아직 아흔 살’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모모요 할머니의 호쾌한 모습을 보며 깔깔 웃을 수 있어 좋았다. 아흔 살의 나이에도 홀로 여행길에 나서고, 왕성한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도쿄를 흔든 모모요 할머니. 그의 모습에서 ‘마음만은 늙지 않는 삶’의 희망을 보았다. 오죽하면 ‘우리 외할머니처럼 늙고 싶다’는 말이 손녀의 입을 통해 타국에까지 전해졌을까. 천진하고 꼿꼿한 삶을 산 모모요에게, 글을 통해 모모요의 삶을 보여준 그의 손녀에게 감사하다. 더욱이 모모요의 삶이 드라마나 소설 속 허구가 아닌, 실제로 존재한 삶이라는 점이 더욱 귀하다.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기에 언젠가 나 역시 부디 좋은 어른, 좋은 노인으로 남기를 소망한다. 내가 되고자 하는 ‘어떤 어른’의 모습을 떠올리며 스스로 몇 가지 기준을 세워 본다.
첫째, 끊임없이 ‘나’이기를 욕망할 것.
타인에게 의존하기 시작할 때, 내 삶은 모두에게 짐이다.
둘째, 천진함을 유지할 것.
꾸밈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기를.
셋째, 불평하지 않을 것.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넷째, 변화하는 것들에 마음을 열 것.
변하지 않기만을 고집할 때, 관계는 단절되고 존재는 고립된다.
참 많이 고민한 것 같은데 아직은 네 가지밖에 찾지 못했다. 살다 보면 새로운 기준이 추가되기도 할 것이고, 우선순위가 바뀌기도 할 것이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폭력이나 상처로 남지 않기 위해 부단히 나 자신을 마주하며 고민해야겠지. 언젠가 ‘나이 듦’을 공포가 아닌 자연스러운 오늘의 일로 마주하게 되기를, 내가 꿈꾼 ‘어떤 어른’의 모습으로 성숙하기를, 나에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