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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 Apr 12. 2019

너의 퇴사를 축하해

우리들의 퇴사 파티

출근길 버스 안에서 윤의 메시지를 읽었다.

'얘들아'

단 세 글자.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눈치였다. 이내 메시지가 이어졌다.


'나 오늘 퇴사 이야기, 회사에 하려고.'


윤은 우리 중 가장 먼저 취업했다. 연봉이 높기로 유명한 대기업이었다. 윤은 대학 시절부터 대기업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마음먹은 일은 단번에 해내는 윤이었기에, 졸업도 하기 전에 큰 회사에 합격한 일이 참 윤답다고 생각했다. 윤은 만날 때마다 회사 생활의 힘듦보다는 그 속의 배움을 이야기했다. 열심이었던 윤을, 그 열정을 기억한다. 우리 넷이 모여 윤의 입사를 축하하던 때가 2년 전 1월이었으니, 윤은 딱 2년 만에 퇴사를 선언한 셈이다.


우리 넷은 ‘응?’ 혹은 ‘갑자기?’라는 식의 단말마를 뱉긴 했지만 아무도 ‘왜?’ 라고는 묻지 않았다. 우리 중에서 제일 먼저 정이 답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응원한다.' 연달아 내가 답했다. '얼마나 고민했을지 아니까 응원해.' 정의 '응원한다'와 나의 '응원해'가 동시에 만났다.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이렇게나 다정한 이들이 내 친구임에 감사했다. 윤이 했을 고민의 깊이가 가늠되는 만큼 윤의 결정을 지지했다.




계약 만료가 다가오자, 이전 직장 상사들은 하나둘씩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왔다. 답은 늘 같았고 뻔했다. 자기소개서를 쓰고, 시험을 보고, 면접엘 가겠지. 나를 받아줄 새로운 직장이 나타나기까지. 같은 대답을 반복할 내 머쓱한 심정을 알만도 하건대, 밥 먹었냐는 의례적인 인사만큼이나 사람들은 자주 물었다. 본인은 어쩌다 한, 두 번이지만 보는 사람마다 거들면 그 합이 오조오억 번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늦잠 좀 자구요, 여행도 좀 가구요. 슬슬 뭘 할지 생각해 봐야죠."


나는 늘 여유롭게 답했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라도 하면 일장연설이 시작될 것을 알았다. 뜻밖의 여유로움에 놀란 탓인지, 일장연설을 할 명분이 없어서인지 그럴 때면 상대는 잠시 주춤했다. 그러고는 대부분 제 갈 길을 간다. 한 번은 내 대답에 머쓱해진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쟤처럼 여유로운 애를 본 적이 없어. 허허."

일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나라는 사실에 나는 되려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당신들이 원하는 반응을 결코 보여주지 않을 거야. 청개구리 심보가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는 ‘퇴사’라는 단어와 ‘축하’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와 우리 회사의 비정규직들은 누군가의 계약 기간이 끝날 때마다 파티를 열어 퇴사를 축하했다. 퇴사하는 이의 사진을 넣어 종이로 된 테이블 매트를 만들고, 교육 회사답게 수료증도 만들어 수여했다. 비록 자의로 하는 퇴사는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슬픈 자기 위로가 아니라 진심 어린 축하를 주고받았다. 내가 이전 회사를 퇴사할 무렵에도 우리는 혜화동의 한 이자까야에서 밤이 늦도록 수다를 떨었다. 여자 일곱 명이 모이니 어딜 가도 우리가 제일 떠들썩했다. 우리만의 퇴사 파티는 그 누구도 이후의 삶에 관해 묻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지,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고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관한 물음 없이 순순한 마음으로 서로의 퇴사를 축하할 수 있었던 까닭은 끝이 곧 시작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전 직장을 떠난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시작을 겪었다. 누군가는 은행원으로 취업해 첫 출근을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교생 선생님으로 한 중학교의 칠판 앞에 섰다. 나 또한 면접관들 앞에 서서 새로운 기회를 얻고자 힘썼다. 우리의 퇴사는 끝이 아닌 과정이었다. 떠남 이후에는 새로운 만남이 있고, '마지막'의 다음은 '처음'이다. 마치 '9' 다음엔 '0'이 돌아오는 것처럼. 일요일 다음은 다시 월요일인 것처럼. 그러니, 누군가 끝을 말한다면 이렇게 말하길.


"너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그외의 군더더기는 생략해도 좋다.




윤의 소식을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고 연봉을 자랑하는 일류 대기업을 제 발로 차고 나온 윤은 아주 잠시 백수가 되었다. 윤은 집안 곳곳 밀린 집안일을 하고,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읽었다. 오전에는 카페에 나가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윤은 약간의 승리감을 느꼈다.


우리가 묻지 않으니, 윤이 먼저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서울 집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가려고. 부산에서 대학원을 다닐 생각이야."

윤은 곧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짐을 다. 그리고 서울보다 일찍이 꽃이 만개한 부산으로 돌아가 법 공부를 시작했다. 우리는 윤의 계획을 들으며 다시 하는 공부가 얼마나 힘들지 따위는 입에 담지 않았다. 새 학기에 새내기로 캠퍼스에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가슴 떨릴지, 공부를 마친 후 윤의 삶이 얼마나 멋질지 호들갑을 떨었다. 아마도 가장 힘든 순간에 윤은 우리의 기쁜 대화를 회상할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잠깐만 헤매다 다시 방향을 잡겠지.


윤의 끝과 시작을,

나의 끝과 시작을,

그리고 모두의 끝과 시작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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