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나 Apr 08. 2019

날마다 힘껏 산 시간

신발의 밑창이 다 닳을 만큼

'힘껏 살자.'


대학교를 졸업하던 날, 일기장에 작은 다짐을 적었다. 3년이라는 시간을 곧이 투자한 고시 공부를 접고 시간에 쫓기듯 한 졸업.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는 패배감과 20대 중반이 되고도 앞가림을 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대학 시절을 열심히 살지 않은 것도 아니었건만, 나는 또 최선을 다짐했다.


기업 채용 면접장에 들어 서면, 신입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다양한 경험을 지닌 지원자들이 넘쳐난다. 대기업과 공기업 인턴 경험은 물론, 이미 1년 이상 직장 근무 경험이 있는 중고 신입들까지 각자 저마다의 경험을 자랑한다. 반면 갓 졸업했을 당시 나에게 있어 경험이랄 것은 신림동 고시촌을 오가며 '쌔빠지게' 공부한 시간과 입학 때부터 쉬지 않고 해온 봉사활동이 고작 전부였다. 초라한 나의 '경험 성적표'가 부끄러워 면접장에 들어서면 어딘지 모르게 위축되었다. 욕심을 버리고 인턴에라도 지원할라 치면 그마저도 인턴 경험이 있는 인턴 지원자들에게 주눅이 들었다.


나만 빼고 다들 열심히 살았구나.

나는 죽을힘을 다해야 이들과 겨우 비슷해질 수 있겠다.

그래, 있는 힘껏 살아야지.

주눅이 드는 만큼 조바심이 커지고 어울리지 않는 오기마저 생겼다.




대학을 졸업한 지 딱 반년만에 한 외국계 기업에 합격했다. 뛸 듯이 기쁘면서도 두려웠다. 직장이라는 곳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기에 기본도 하지 못할까, 출근 전에는 내내 밤잠을 설쳤다. 첫 출근을 앞두고 회사에 입고 갈 옷도, 신고갈 신도 마땅치 않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그렇게 큰 마음먹고 출근용 구두 두 켤레를 장만했다. 부드러운 밤색 소가죽에 같은 색 스티치가 들어간 로퍼 한 켤레와 진주 장식이 있는 검은색 기본 단화. 특히 밤색 소가죽 로퍼는 격식이 있으면서도 발이 편해 출근 용으로 제격이다 싶었다. 구두 굽이 부드러운 탓에 하이힐을 신었을 때 또각또각하고 나는 발자국 소리가 없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겨울 지나 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과 봄이 돌아올 때까지, 한여름만 빼놓고서 밤색 로퍼를 닳도록 신었다. 그러는 동안, 처음 합격했던 외국계 기업 이후에도 몇 개월 짜리 계약직 일자리를 전전하며 두 곳의 회사를 더 옮겨 다녔다.


한 대형 출판사 최종 면접에 다녀왔다. 그때도 나는 신발 파우치에 밤색 로퍼를 챙겼다. 면접장에는 7cm 높이의 면접용 구두를 신고 들어가겠지만, 대중교통으로 오가는 이동 시간엔 발에 익은 신발이 편하겠다 싶어서였다. 면접이 끝나고 화장실에 들러 신발을 바꿔 신었다. 면접을 치르는 동안, 어느새 바깥에는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큰비가 오기 전에 버스를 타야 한다는 생각에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잰걸음을 뗄 때마다 조금씩 신발 안으로 빗물이 새어 들었다. 발가락 끝 스타킹이 조금씩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신발을 확인했다. 뜻밖에도 구입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신발 밑창이 다 닳아 있었다. 닳다 못해 100짜리 동전만 한 땜빵 자국이 휑하니 생기기까지 했다. 신발이 이 모양으로 닳을 때까지 까맣게 몰랐다니 헛웃음이 났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신발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나 그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나 봐. 1년 전에 산 로퍼 밑창이 벌써 다 닳은 거 있지?"


내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새 구두를 사주겠다고 했다.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오래 신어도 닳지 않을 좋은 신발을 마련하라고. 나는 그런 신발이 어딨냐며 웃었다. 아무리 좋은 신발도 결국엔 닳지 않느냐고.


"근데 나 진짜 열심히 살긴 했어, 엄마.

주중엔 회사 다녔지? 주말에는 틈나는 대로 자격증이다, 인적성이다 시험 치러 다녔지?

면접장엔 또 얼마나 뛰어다녔게.

나 진짜 힘껏 살았어. 있는 힘껏. 

난 내 삶이 자랑스러워, 엄마."


울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괜히 울컥 가슴이 뜨거워졌다. 눈물도 찔끔 났다. 내색하지 않으려는 나를 엄마는 이미 잘 알았다.


"엄마가 알지. 다 알지. 그래서 엄마는 우리 딸 걱정은 전혀 안 해.

알아서 잘하니까. 충분히 잘하고 있는 줄 다 아니까."




닳아 빠진 신발을 보며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려 대학교를 막 졸업한 1년 반 전의 나를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해서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야.'


동시에 스스로 자책하며 조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았던 그때의 나를 용서한다. 나는 늘 열심히 살았다. 단지 열매를 맺는 데 남들보다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이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에도 그 시간들은 분명 어디엔가 흔적을 남길 것이다. 어느새 닳아 버린 신발처럼.


날마다 힘껏 산 내 삶이 나는 무척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

.

.

.


더하는 말.
얼마 전, 저는 한 회사로부터 정규직 최종 합격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지, 마냥 멍하기만 한 기분이었습니다. 남들보다 긴 시간 진로를 찾아 헤매며 찾은 소중한 기회. 지금은 온 우주에게 감사하기만 한 마음입니다. 이제 비정규직의 설움은 당분간 안녕이겠지만, 쓰고자 계획해둔 글감들이 있어 이 주제를 한동안 더 이어갈 계획입니다. 시간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말이에요. 글을 통해 기쁨도 슬픔도 모두 함께 나눌 수 있어 좋습니다. 모두들 좋은 봄 마음껏 누리는 날들이기를 바랍니다.  By. 유나

매거진의 이전글 어떤 진심은 때로 폭력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