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나 Mar 18. 2019

어떤 진심은 때로 폭력이다

진심이라는 말로는 충분치 않은

사람들은 종종 '진심'이라는 말로 자신의 무례함을 포장한다. 필요 이상의 감정을 꾸역꾸역 쏟아내고는,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 자신의 진심을 떠민다. 내 주변에서는 그가 그랬다. 그는 주제넘은 참견을 일삼았고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나를 포함한 젊은 직원 다수가 그런 그에게 불편함을 느꼈다. 정작 그는 자신에 관한 아랫사람들의 진심 따위에 관심조차 없었으므로 이를 알 리 없었다.



"너니까 내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자신의 진정성을 드러내려는 듯 그가 미간을 좁혔다. 그의 눈썹이 유연한 팔자를 그리며 아래로 휘어졌다. 나는 그런 그의 속뜻을 짐작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진심을 신뢰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가 쉴 새 없이 떠드는 것을 느꼈지만 그 말을 귀담지 않았다. 그와 나는 애초에 진심을 운운할 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업무적인 말들을 주고받고, 어쩌다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를 나누면 그만인 사이. 6개월이면 다신 볼 일 없을 한시적인 상하관계. 그뿐이었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자주 생각했다.


'어떤 진심은 때로 폭력이다.'




그랬다. 그의 진심이 내게는 폭력과 같았다. 나는 그를 통해 주제넘은 오지랖으로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에 관해 생각했다. 많은 경우, 이들의 진심은 타인의 자존감을 '후려치는' 수단이 된다.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인데...'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본데....'

 '그건 내가 잘 아는데 말이야....'


이들은 세상의 중심에 자신을 둔다. 자신의 좁은 식견이나 얄팍한 경험을 기준 삼아 모든 사람의 삶과 경험을 단정 짓는다. 자신의 좁은 시야에 갇혀 관계의 거리 또한 정확하게 가늠하지 못한다. 관계 지각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참견을 해도 될 만한 관계인지, 주제넘은 참견을 삼가야 할 관계인지를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요즘 10대들 말로 '낄끼빠빠(낄 데 끼고 빠질 데 빠지는 것)'가 안 되는 셈이다. 사실 '진심'이라거나 '걱정'이라는 말은 서로 위하는 마음의 깊이가 자연히 가늠될 만큼 가까운 사이여야만 그 무게가 우습지 않다. 웬만큼 가까운 관계가 아니고서야 '진심'이라는 말은 깊이가 없는, 허울로 남는다.


그가 '진심'이라 말했던 충고를 내가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진심'이라는 이름의 달갑지 않은 말들이 그를 향할 때, 그가 발끈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누군가를 비판할 때 그랬다. 나에겐 그런 그가 '내로남불'형 인간의 대표 격이었다. '나 때는 말이야....'로 말문을 여는 상사를 신나게 비판하던 그 또한 내 앞에서는 '나 때는 말이야....'를 자주 입에 담았다.


"나 때는 말이야, 신입이 오면 '술잔 돌리기'라는 걸 했어. 부서 내 선배들에게 인사도 할 겸, 잔을 공유하면서 끈끈한 무언가를......"



상황이 이러하니 자연히 나는 '진심'이라는 말의 무게에 관해 되짚게 된다.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이 구태여 하지 않으면 더 좋을 말은 아닌지. '진심'이라는 말이 우습지 않을 만큼 그와 내가 가까운 관계인지. 혹은 관계가 가까운 그만큼, 내가 하는 말이 상대에겐 더 큰 상처로 더 오래 남지는 않을지.



모든 진심을 입 밖으로 꺼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진심은 말 그대로 마음으로만 남을 때 오히려 더 진가를 발휘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꼭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