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필요로 하는 곳과 내가 필요로 하는 곳
나는 기간제 계약직이다. 기한의 정함이 있다는 것은 때가 되면 곧 떠나야 한다는 것. 폭염주의보가 내린 한여름 어느 날 첫 출근을 했고,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새해에 마지막 출근을 했다. 떠나는 발걸음이 어떠했냐는 물음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가뿐하고 가벼웠다고, 기꺼이 솔직하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전 직장을 떠나며 시원섭섭한 마음이기보다 그저 시원하기만 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곳에서의 내가 나 보기에 썩 괜찮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종종 누군가 “이 연애, 이대로 괜찮을까?”라거나 “이런 관계를 계속 이어가도 좋을까?”라는 식의 고민을 터놓으면 “그와 있을 때, 그 관계 속 너의 모습이 너 보기에 썩 마음에 드니?”라는 질문으로 답을 대신하곤 한다. 좋은 관계는 나 자신을 더 나은 사람, 더 좋은 사람으로 느끼게 해 준다고 믿기에 “YES!”라는 대답이 시원치 않다면 그 관계는 다시 고민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사람과 사람의 관계뿐 아니라 사람과 직장의 관계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 회사에 있을 때 자신의 모습이 본인 보기에 괜찮은가요?”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면 회사와의 관계 맺음이 성공적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전 직장에 있을 때 스스로 자주 되물었다. 이곳에서의 내 모습, 나 보기에 괜찮은지. 대답은 늘 한숨 섞인 “아니요,” 물론 그곳에서 적어도 나는 ‘필요한 사람’으로 대우받았다. 어느 누구도 나를 쓸모없거나 월급만 축내는 문제적 직원으로 대한 일이 없었다. 다만 그곳에서의 나는 ‘필요하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닌 사람’, ‘언제라도 대체 가능한 사람’, 고작 그 정도였다. 이 지점에서 그곳에서의 나는 스스로 자랑스럽지 못했다.
내가 나 자신에게 느낀 떳떳하지 않음은 ‘일의 가치’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과장급의 한 상사는 내게 교육생 설문 조사 결과를 위조하도록 왕왕 지시했다. 검정, 빨강, 파랑…. 펜을 바꿔가며 존재하지 않은 교육생의 직급과 직종을 거짓으로 적게 했다. 퇴사 전 한 달 여 간은 매일 20부씩 작성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에게서는 부끄러움이나 민망한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당연한 ‘업무 지시’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내게는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이어서 정말이지 하고 싶지 않았다. 한 이틀쯤 하는 체 만 체 하다가 결국 할당량 10분의 1도 채우지 않고 조용히 퇴사했다. 계약된 내 업무도 아니었을뿐더러 무가치하고 비윤리적인 일이었기에,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은 느끼지 않았다.
나는 결코 모르지 않았다. 그 또한 별 다른 업무 없이 회사에서 개인적인 일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을. 그 일을 직접 할 여력이나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일이 무가치하고 비윤리적인 것을 알아서, 직접 하기 싫은 궂은일은 비정규직에게 떠맡기면 그만이어서. 내게 그 일을 지시한 이유를 너무도 잘 알았다. 이 회사에서 나는 궂은일을 미루기에 ‘필요한 존재’였으나 생산적인 일에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럴수록 나 또한 마찬가지로 이 회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음을 절실히 느꼈다. 마지막 근로를 마치고 회사 건물 밖으로 내디딘 한 발이 더없이 개운하고 설렐 수 있었던, 바로 그 이유다.
이전 회사에서 ‘기한의 정함이 있는 근로’를 이제 막 마쳤지만 나는 또 일할 곳이 필요했다. 당장 몇 개월 뒤의 생활비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새로운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퇴사 전 미리 몇몇 회사에 지원을 했고 퇴사 후 곧바로 면접을 보러 다녔다. 고맙게도 한 회사가 나에 관해 긍정적인 평가를 보여 주었다. 한 리서치 회사의 3개월 단기 RA(research assistant) 자리였다. 서류 과정에서 간단한 리서치 보고서 과제가 주어졌었는데 이전 회사에서 주워들은 견문으로 어설프게 흉내 내 작성한 것이 좋은 인상을 남겼다고 했다. 이전 직장에서의 경험이 또 한 번의 기회로 연결되는 것을 보며, 의미 없는 경험은 없음을 새삼 느꼈다.
회사에서 정규직 자리를 제안했다. 뜻밖의 제안에 어안이 벙벙했다. 잠깐 동안은 설레기도 하고 안도감도 느꼈다. 하지만 잠시였다. 이곳은 내가 필요하다는데, 나에게 필요한 직장 역시 이곳일까. 솔직히 나는 3개월 아르바이트 삼아 일하며 차차 정규직 일자리를 알아볼 작정으로 지원했다. 최근 출판업계 취업에 흥미를 느껴 진지하게 알아볼 참이었다. 지금 내게 들어온 제안은 시장 조사 연구원. 선뜻 마음이 내키지가 않았다. 3개월을 바라본 참이었는데, 대뜸 장기적인 제안이 들어오니 두려운 마음도 한 편 있었다.
고민 끝에 회사에 한 통의 이메일을 보냈다. 제안에는 감사하지만 장기적인 제안은 수락에 고민이 따른다고, 입사 포기 의사를 전했다. 알겠다는 간결한 답신이 올 것이라 예상했는데, 뜻밖의 다정한 답변이 돌아왔다.
- 제안이 갑작스러우셨다면, 원래 공고 상 단기 RA로 함께 일해 봅시다. 장기적인 논의는 추후 다시 논하는 것으로. 유나 님처럼 저희 회사에 꼭 필요한 분을 모시게 되어 기쁜 마음입니다.
참 고마웠다. ‘꼭 필요한 분.’ 정말로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나는 해당 제안을 수락했고 단기 RA로 근무를 시작했다. 정부 대상 사업의 리서치 업무와 보고서 등 문서 작업들을 주로 담당한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다시 생각해도 이곳에서 오래도록 함께할 생각은 없다. 내 꿈에 비추어 내가 원하던 일, 내가 필요로 한 직장은 아닌 것 같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과 내가 필요로 하는 곳의 합(合)이 맞기가 이토록 어렵다니. 고마운 한편, 씁쓸한 일이다. 다만, 몇 개월 뒤 기한의 정함이 다한 후 찾아올 또 한 번의 이별 앞에 마냥 시원하고 개운할 것 같지만은 않다. 이번에는 조금은 서운한 이별이 될 것 같다. 꼭 필요한 사람으로 대해진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그 가슴 뛰는 기분을 알게 해 준 고마운 곳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