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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 Jan 18. 2019

'여아'로 길러져 '여성'으로 산다

특정 성별로 산다는 것은

회사 화장실에서 뜨악한 대화를 들었다.


직원 1: 요새도 딸이 편한 옷만 입어?

직원 2: 아니, 완전히 바뀌었어. 예전에는 통 넓은 바지만 고집했었는데 이제는 레깅스마저 치마가 달려야만 입어. 아님 원피스. 그것 때문에 이 겨울에 원피스만 사잰다니까. (만족하는 웃음소리호호호-)

직원 1: 딸이 몇 살 이랬지?

직원 2: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해 바뀌어서 일곱 살. 신랑이 참 좋아해일곱 살 되더니 사람 다 됐다고.


화장실 칸막이 밖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실망했고, 슬펐다. 2000년 이후에 태어난 어린 꿈나무들도 여전히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길러지는구나. 원피스나 치마를 고집하는 여아를 보며 ‘사람 됐다’고 말하는 양육. 그런 일들이 귀여운 일화로 여기지는 사회. 정상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정 성별로 사는 것'에 관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만들어진 취향


‘여성은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단순히 동의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온 마음을 다해 공감한다. 정말로 분홍색을 좋아하는 여아(女兒)와, 파란색을 좋아하는 남아(男兒)의 차이는 본질적인 것일까. 어느 여아가 ‘공주풍’ 취향을 고집할 때, 그 취향은 백 퍼센트 자발적으로 형성된 취향이고 선호일까. 보부아르는 자신의 저서 ‘제2의 성’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자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부터, 또 때로는 유년기부터 이미 성적으로 우리들 눈에 별개의 것으로 비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본능이 여자 아이를 태어날 때부터 수동성, 교태, 모성애에 어울리게 해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의 생활에 타인의 개입이 거의 당초부터 존재하며, 아이는 처음부터 강제적으로 그 인생의 직분을 떠맡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제2의 성, 시몬 드 보부아르


원피스를 입는 자신의 일곱 살 딸에게 ‘사람 됐다’고 말하는 모부(母父)를 보고 있자니 보부아르의 말이 단박에 이해된다. 저 아이가 저대로 자라 20대 어느 여성이 되었을 때, 자신의 취향은 지극히 ‘자발적인’ 것이고 자신의 여성성은 ‘타고난’ 것이라고 믿게 되겠지. 그 자신이 인지하지도 못할 시절부터, 그의 성장 배경에는 ‘여성성’을 만들기 위한 무수한 시도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모른 채. 

나 역시 그러한 여성 중 한 사람이다. 분홍색과 레이스라면 끔벅 죽고, ‘여성스럽다’는 말이 칭찬이라고 믿었다. 크고 작은 성차별에 분개하면서도 때로 ‘이건 내 취향이니까, 적어도 내 인생에서는 누구도 강요한 사람이 없으니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의 꼬마에 관해 이야기하며 우리 엄마가 말했다.

“쟤는 좀 특이하대. 여자애가 파란색을 좋아하고, 선물을 고르라면 인형이 아니라 자동차를 고른대.”

머릿속에서 번쩍,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우리 엄마의 눈에는 파란색과 자동차를 좋아하는 여자 아이는 ‘특이한 아이’구나. 20년 이상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취향조차 어쩌면 온전한 내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처음으로 지각했다.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


여아는 자라 여성이 된다. 성인 여성으로 사회에 막 발을 디뎠던 20대 초반 시절, 나는 원인 모를 불편함에 자주 시달렸다. 왜 불편하냐고 물으면 설명할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오빠야’라는 단어를 강요할 때가 그랬다. 주로 한 학번 위의 남자 선배들, 혹은 재수나 삼수쯤을 한 남자 동기들이 20살 나에게 이 단어를 요구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평면 그대로의 단어가 아니었다. 간드러지게 오르내리는 ‘오→ 빠↗야↘.’ 유난히 집요한 이가 있었다. 그는 싫다고 하는 나를 ‘까칠한 대구 가스나’라거나 ‘역시 톡 쏜다’는 식으로 놀렸다. 사투리를 어설프게 따라 하는 그의 음성이 불쾌했다. 눅진하고 진득거리는 그의 표정에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결국 폭발한 나는 두 번 다시는 그 단어를 요구하지 말라고,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도 말라고 소리쳤다. 돌아온 그의 대답은, 여자애가 이렇게나 기가 세서 누가 데려가겠냐.


상처였다. 그의 말이 내 ‘여성성’에 관한 공격으로 느껴졌다. (‘여자애’라거나 ‘누가 데려가겠냐’는 식의 워딩을 선택한 걸 보면 실제로 그 또한 이를 의도했다고 생각한다.) 그때까지 내가 배우고 익힌 ‘여성성’에 ‘기가 셈’은 없었다. 오히려 ‘드센 여자는 팔자도 드세다’는 말을 들으며 기가 세 보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럴수록 마음에 멍 자국이 늘었다. 이후로도 몇몇 사건을 겪으면서 20대 초반의 나는 자꾸만 나를 검열했다. 이성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기가 세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이성인 친구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여자 친구들을 보며, 나는 왜 저러지 못하나 자책했다. 과한 농담에도 그저 웃고만 말걸, 후회했다. 그 후로도 몇 년이 더 지난 지금, 여전히 그러하냐고 물으면 물론 아니다.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나를 향한 공격에 순응하지 않으며 ‘기가 세다’는 말을 칭찬으로 듣는다. 페미니즘이니 여성학이니 하는 것들을 접하면서 시작된 변화였다. 지금 나는 오히려 세상의 여성들이 더 드세어지고 기가 세지길 바란다. 



특정 성별을 규정하는 교육


20대 초반의 나를 돌아보며, 당시 내가 겪었던 내적·외적 갈등의 원인이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원피스를 거부하지 않게 된 여아에게 ‘사람 됐다’고 말하는 식의 젠더 관념. 아이를 그저 아이로 보지 않고 ‘여자’ 아이로 보는 것. 이 지점에서부터 젠더 갈등은 뿌리를 내린다. 이쯤 되면, 누군가가 발끈할지 모르겠다. 남성 또한 ‘남아’로 자라 ‘남성’으로 산다고. 역차별을 호소하고 가장의 무게를 말하고 싶을지 모르겠다. 분명히 하건대, 결코 그들의 고통이나 애환이 나의 그것보다 덜 중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 어깨 위의 무게를 인정한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특정 성별에게 지워진 짐을 오롯이 견디는 것만이 답이냐는 말이다. 그 짐은 얼마든지 벗어던질 수 있다. 부조리하고 부당한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것. 성평등을 지향하는 것. 단순 명쾌한 해답이 여기 있다. 


여성으로 사는 나의 미래가 매일 조금씩 달라지길 소원한다. 나 다음 세대의 여성들은 나보다 더 잘 살기를 바란다. 우리 회사 어느 직원분의 딸이 '여성성'이라 지칭되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자라길 바란다. 타인의 성별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이다. 아이는 그저 아이인 대로, 사람은 그저 사람인 대로 충분하다. 세상의 아이들이 그저 ‘아이’로 자라 ‘사람’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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