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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in May 20. 2020

거의 완전한 슈퍼히어로 통사 2. 1/4

2. 빅뱅과 골든에이지 (1/4)

- 제리 시걸과 조 슈스터     


  1932년, 클리브랜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두 친구가 있었다. 제리 시걸은 영화, 펄프 픽션, 코믹 스트립, SF의 팬이었고, 취미를 공유하는 조 슈스터라는 동창이 있었다. 졸업 후 시걸은 작가를 지망했고 자비출판으로 SF 잡지를 만들어 자신의 소설을 실었다. 슈스터는 친구의 소설에 삽화를 그려주며 일러스트레이터로 성장했다.


  1933년, 제리 시걸은 자신의 잡지인 “Science Fiction: The Advance Guard of Future Civilization” - 번역하면 “과학 소설: 미래 문명의 사전 경고” - 에 자신이 쓴 단편을 하나 실었다. 그 제목은 ‘초인의 통치 The Reign of the Superman’ 였다. 빌 던 Bill Dunn 이라는 과학자가 모종의 약물을 만들어내, 스스로에게 사용하여 독심술과 정신 조종과 예지 능력을 얻어서 악용한다는 이야기였다. 슈스터가 그린 삽화에는 빌 던이 민머리로 등장한다. 그래서 후일 슈퍼맨의 주요 인물인 렉스 루터 Lex Luther 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제리 시걸이 필명으로 발표한 단편 소설 The Reign of the Superman


  시걸과 슈스터 듀오의 바람과는 달리, 싸구려 동인지에 가까운 잡지는 주류 시장에 끼지 못했다. 그래서 둘은 신문의 코믹 스트립 시장으로 진출해보려 자신들의 아이디어 스케치와 원고를 들고 사람들을 찾아갔다. 출판 만화 시장이 막 시작되어 코믹 스트립 조합들이 신문과 출판 시장의 유통 권력을 얻고 있던 시점이었으니, 조합에 가서 편집자들을 만나는 식이었다. 시걸이 준비한 장르는 모험물과 코미디물이었고, 반응은 좋지 않았다. 시걸의 회상에 따르면, 자신들이 가져간 코믹 스트립은 기존의 경향과는 약간 다른 방향이었고 그래서 편집자들은 ‘스펙타클한 요소가 없어서 별로 흥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부정적 평을 했다고 한다. 이에 속이 뒤틀린 시걸은 제대로 스펙타클한 캐릭터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시걸의 아버지는 시걸이 17세일 때 강도로 인해 사망했다. 시걸은 그 시절의 기억에서, 누구나 구원할 수 있는 강력한 영웅 캐릭터를 구상했다. 초월적인 완력과 방탄 피부를 가지고 빌 던 계열의 악당 과학자 캐릭터에 맞서 싸우는 영웅 캐릭터였다. 이름은 니체의 철학에서 가져온 것으로 강하게 추정된다.


  니체의 세계관에서, 인간은 위버멘쉬 Übermensch 라는 존재의 경지로 진보해가는 존재다. 위버멘쉬의 개념은 ‘완성된 인간’으로, 삶을 긍정하고 세계의 부조리를 뛰어넘어 더 나은 단계를 지향하는 인간상이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초인(超人)으로 번역해왔지만, 이럴 경우엔 니체가 부정하고 싶어했던 초월성이 강조되어 개념의 오해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최근 제시된 새 번역어는 극복인(克服人)이다. 영어에서도 위버멘쉬는 초인이라는 의미가 강조된 Superman, 혹은 극복인의 의미가 조금 들어갔지만 여전히 ‘어떤 경지를 넘어간 사람’의 의미가 강한 Overman으로 번역되곤 했다. 이런 오역의 자장 아래에 있었을 제리 시걸은, 새로운 컨셉의 영웅 캐릭터의 이름으로 수퍼맨을 골랐다. 신체적 측면에서는 초월적이고, 윤리적 측면에서는 완성된 초인이었다. 비록 오독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 명명(命名)이었지만, 후세의 작가들이 수퍼맨을 니체의 위버멘쉬에 가깝게 묘사해가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이렇게 수퍼맨의 프로토타입이 구상되었다. 하지만 아직 코스튬은 디자인되지 않았고, 프로토타입 수퍼맨은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얼마 후의 버전에서는 망토를 두르긴 했지만, 여전히 이 프로토타입은 여전히 시장에 데뷔하지 못했다.



- 고난의 행군     


  1933년 4월, 신문 지면을 포기한 두 사람은 직접 출판사들에 접촉했다. 그들의 프로토타입 수퍼맨 원고를 처음 받아준 출판사는 시카고에 위치한 한 출판사였다. 이 출판사는 탐정 댄: 비밀 작전 번호 48 Detective Dan: Secret Operative No. 48 이라는 코믹 스트립의 단행본을 출판한 참이었다. 코믹스로의 이행 직전이었기에 표지에는 카툰이라고 적혀있었고, 구성 또한 코믹스 직전의 단계인 코믹 스트립의 타블로이드판 형태였다. Famous Funnies 의 성공 이전이었기에 출판사 입장에서는 모험이었다. 탐정 댄의 첫 단행본은 초기에는 꽤 팔려나갔고, 그래서 두 사람은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탐정 댄과 유사한 스타일로 수퍼맨 원고를 만들었다. 하지만 갑자기 탐정 댄의 판매량이 급감해버리자 출판사는 수퍼맨의 출판 계획을 취소해버렸다. 제리 시걸은 큰 상처를 받았다.


1933년, 출판이 취소된 버전의 수퍼맨 표지


  시걸은 실패의 원인을 자신들이 어린 무명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고, 유명한 작가가 참여한다면 출판사는 몰라도 조합은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슈스터 몰래 다른 유명 그림작가들과의 접촉을 시작했다.


  처음 시걸에게 회신을 준 코믹 스트립 작가는 레오 오밀리아 Leo O’Mealia 였다. 아시아계 악당 캐릭터의 원형을 보여준 푸 만추 Fu Manchu 시리즈에 참여한 바 있는 이 유명 작가는 시걸의 글 원고를 받아 그림 원고를 만들었다. 이 버전의 수퍼맨은 멸망 직전의 지구에서 과거로 탈출한 초능력자였다. 오밀리아는 신문 조합에 연재 신청을 했지만 신청은 반려되었고, 오밀리아는 쿨하게 포기했다. 얼마나 쿨했냐면, 완성된 원고를 시걸에게 보여주지도 않았다. 파기했거나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1934년 6월에는 시카고에 사는 러셀 키튼 Russel Keaton 이 회신을 보내왔다. 벅 로저스 Buck Rogers 라는 전설적인 코믹 스트립에 참여했던 이 그림작가도 시걸의 글 원고로 한 편을 그려냈다. 이 버전의 수퍼맨은 성인이 아닌 아이 상태에서 과거의 지구로 왔고, 그래서 그를 입양한 가족으로부터 클라크 켄트 Clark Kent 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스토리가 추가되었다. 키튼의 원고는 11월에 완성되었고, 역시 신문 조합에 연재 신청을 넣었지만 반려되었고, 키튼 또한 쿨하게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키튼 버전의 원고 역시 현재는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자기 유명세와 커리어가 있는 이 작가들은 시걸과 달리 수퍼맨 캐릭터에 절박함이 없었다. 시걸은 자신과 똑같이 절박한 그림작가는 친구인 슈스터임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슈스터도 친구의 외도(?)를 알아버렸다. 슈스터는 그동안 둘이서 함께 만들었던 수퍼맨의 설정 원고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리는 것으로 분노를 표현했다. 그래서 이 프로토타입 원고들은 현재 표지 정도만 남았고, 그 내용도 두 사람의 회고로만 알 수 있다.


  1934년 말에 재결합한 듀오는 수퍼맨의 설정을 구체화시켰다. 이제 클라크 켄트 – 수퍼맨은 가슴에 S자가 그려진 스판덱스 코스튬을 입게 되었다. 출신은 멸망한 미래 지구가 아닌 멸망한 외계 행성 크립톤 Krypton 으로 바뀌었다. 위장 신분용으로 기자 직업도 생겼고, 자신이 수퍼맨임을 모르지만 수퍼맨의 활동을 지지하는 동료 기자인 로이스 레인 Lois Lane 도 얻었다. 현재의 수퍼맨 설정의 대부분이 1934~35년 동안 만들어졌다. 조합에는 정나미가 떨어진 시걸과 슈스터가 이 설정을 들고 다른 출판사를 찾아가 이런 식으로 말했다.


저희는 코믹 스트립을 만들고 싶어하는 작가들입니다.
 요즘은 코믹스라고 부른다면서요?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관심 좀 있으신가요?


  코믹스라는 신생 시장에 막 발을 내디딘 신생 출판사, 내셔널 얼라이드 퍼블리케이션즈는 관심이 있었다.



- 내셔널 얼라이드 퍼블리케이션즈     


  말콤 휠러-니콜슨 Malcolm Wheeler-Nicholson 이라는 퇴역 군인이 있었다. 1890년에 태어나 육군 기병대에서 복무한 휠러-니콜슨은 당시 최연소 소령 진급 등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천성이 낙천적인 사고뭉치였던 것 같다. 그의 군 커리어는 상관과의 갈등, 그 상관과의 법적 공방, 필화 사건에 의한 군사법정 회부, 암살 시도에 의한 피격, 민사 소송 패소 등으로 얼룩져있고, 1923년에 33세의 나이로 사실상 불명예제대 했다. 낙천적인 휠러-니콜슨은 호구지책을 위해 작가로 빠르게 전업했다. 주된 소재는 군 경험을 활용한 군사 소설과 모험 소설이었다. 그의 작가 커리어는 성공은 아니었지만 망할 정도는 아니었고, 그래서 본인 소유의 작은 출판사를 차리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1933년, Famous Funnies 를 필두로 한 출판 만화 시장의 등장과 성장을 보게 되었다.


DC 코믹스의 전신인 내셔널 얼라이드 퍼블리케이션즈의 창립자, 말콤 휠러-니콜슨의 군시절


  코믹스의 시대를 예감했는지 휠러-니콜슨은 다음 해인 1934년, 내셔널 얼라이드 퍼블리케이션즈라는 코믹스 전문 출판사를 창업해 New Fun: The Big Comic Magazine 이라는 잡지를 1935년 2월부터 발간했다. 이 잡지는 이전의 코믹스 잡지의 이슈와는 달리 기존에 존재하던 코믹 스트립 작품을 코믹스화하지 않았다. New Fun 에 실린 코믹스는 이 잡지에서 첫 선을 보이는 오리지널 컨텐츠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New Comics 라는 새 잡지도 추가로 런칭했다. 따라서 내셔널 얼라이드는 작가들이 필요한 참이었다. 그래서 원고를 들고 찾아온 시걸과 슈스터는 일자리를 얻었고, New Fun 과 New Comics 에 만화를 연재할 수 있었지만, 아직 수퍼맨 원고는 빛을 보지 못했다.


  둘은 일단 다른 캐릭터부터 데뷔시켰다. 이 당시 만들었던 캐릭터 중 닥터 오컬트 Doctor Occult 라는 초자연 현상 탐정 캐릭터는 지금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DC코믹스에서 조연급으로 사용하는 캐릭터로 남아 있다. 수퍼맨이 뒷전으로 갔던 이유는 간단하다. 사장과 회사를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모험심 넘치는 휠러-니콜슨의 경영은 지나치게 공격적이었고, 험난했다. 기존에 유명한 컨텐츠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조합에 가입한 회사도 아니니, 안정적인 가판대 유통망을 잡기엔 힘이 부쳤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간신히 헤쳐나가는 생활을 40대에 맞은 퇴역 소령 작가는 아무래도 사업가 체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작가들에 대한 급여가 밀리기 시작하다가 미지급 단계로 넘어가는 일이 늘어났다. 하지만 사고뭉치 휠러-니콜슨 사장은 또 일을 벌이려 했다.


  세 번째로 창간한 디텍티브 코믹스 Detective Comics 는 1937년 3월에 창간했는데, 더 이상은 여유자금이 없었다. 시장에 대한 노하우와 투자자가 필요했다. 마침 둘 다 갖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해리 도넨펠드 Harry Donenfeld 와 잭 리보위츠 Jack Liebowitz 가 그들이다. 루마니아계 이민자인 도넨펠드는 잡지와 펄프 픽션 업계에서 커리어를 쌓았고, 우크라이나계 이민자인 리보위츠는 도넨펠드의 오랜 고객의 아들로 도넨펠드의 회계사로 들어가 파트너 지위까지 올라온 젊은 유망주 사업가였다. 두 사람에겐 돈과 인맥과 경영 노하우가 있었다. 휠러-니콜슨은 도넨펠드와 리보위츠를 동업자로 해서 잡지의 명칭에서 이름을 따온 회사 디텍티브 코믹스 INC. Detective Comics, INC., 라는 회사를 따로 만들어 디텍티브 코믹스를 창간하는 데 성공했다.


해리 도넨펠드(좌)와 잭 리보위츠(우), DC 코믹스를 있게 한 경영진


  하지만 창간만 성공이었다. 내셔널 얼라이드와 DC의 경영 상태는 여전히 나빴다. 결국 동업자들은 휠러-니콜슨을 이대로 경영자 자리에 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못한다 못한다 말만 들었지’의 20세기 초 미국 만화 시장 버전이다.


  휠러-니콜슨은 디텍티브 코믹스의 창간을 밀어붙였지만 현금 유동성과 파산의 위기가 끊이지 않자, 1938년 초 아내와 함께 쿠바로 재충전 휴가를 떠났다. 그가 휴가에서 돌아왔을 땐 잠긴 사무실과 경영권 포기 소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송을 담당한 판사는 하필 도넨펠드의 친구였다. 사실 냉혹한 사업가 도넨펠드는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10여 년 전쯤에도 형들이 운영하던 출판사에 들어가서 끝내는 두 형을 내쫓고 회사를 장악했던 경험이 있다. 결국 휠러-니콜슨은 이제는 제호명을 More Fun Comics 로 바꾼 New Fun 의 지분만을 인정받고 경영권을 넘겨야 했다. 사업가로서 은퇴를 당한 말콤 휠러-니콜슨은 가끔 글을 쓰는 작가로 지내다가 1965년에 뉴욕 롱 아일랜드에서 사망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산한 내셔널 얼라이드를 DC가 인수해 자회사로 삼으면서 도넨펠드와 리보위츠의 반란은 최종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1938년의 DC는 아직 어려운 상태였고, 두 경영자는 휠러-니콜슨이 남겨준 난장판을 수습해나갔다. 도넨펠드는 잡지사 시절의 인맥을 풀가동하면서 유통망을 개척했고, 리보위츠는 회사 내부를 교통정리하면서 컨텐츠를 발굴하는 편집장 역할을 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시걸과 슈스터는 프로 데뷔까지 했는데도 절망에 빠져 있었다.



- 모두에게 기회가 온다     


  시걸과 슈스터는 입사하던 1935년 6월에 이미 수퍼맨의 설정 원고를 휠러-니콜슨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휠러-니콜슨은 수퍼맨 원고의 출판을 승낙하긴 했지만 계속 뒤로 미뤘다. 결국 10월의 시걸과 슈스터는 이미 휠러-니콜슨의 경영 능력에 의문을 품은 뒤였다. New Fun #6 에 제공한 원고에 대한 급여가 지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휠러-니콜슨을 무시하고 조합 쪽을 뚫어보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래서 Famous Funnies 의 라이센스를 갖고 있는 조합 중 하나인 맥클루어 신문 조합 McClure Newspaper Syndicate 에 원고를 제출했다.


  한편 리보위츠는 1937년 12월, 시걸과의 면담 자리에서 액션 코믹스라는 이름의 새 잡지를 창간할 계획을 말했다. 휠러-니콜슨을 내쫓을 생각을 아직 흉중에 품은 상태였을 것이다. 시걸은 새 잡지에 실을 만한 설정 원고들을 내보여줬고, 리보위츠는 매우 만족했다. 하지만 시걸이 보여준 원고 중에 수퍼맨 원고는 없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938년 1월, 맥클루어 조합에서 일하는 맥스 게인즈 Max Gaines 라는 직원이 시걸과 리보위츠에게 3자 통화를 걸어왔다. 세 사람의 대화를 재구성해보면 이런 식이 될 것이다.



  게인즈 : 시걸 씨, 조합에서 출판을 거부했습니다.
  시걸 : 아... 또 실패야...
  리보위츠 : 무슨 원고인데?
  게인즈 : 거부는 거부인데... 제가 Famous Funnies 출판 때도 참여해본 사람이라서 보는 눈이 좀 있어서 드리는 말입니다. 우리 조합의 결정이 틀린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엔 이 원고 팔릴 거 같거든요?
  시걸 : 위로는 감사합니다...
  게인즈 : 위로가 아닙니...
  리보위츠 : 지금 무슨 원고를 얘기하는 거지?
  시걸 : 수퍼맨이라는 거에요...
  리보위츠 : 그게 뭔데? 나한테 가져와봐. (수퍼맨 설정 원고를 읽은 후) 야, 시걸! 이거 대박이잖아!
  시걸 : ...예?
  리보위츠 : 야, 액션 코믹스에 넣자고 보여준 원고도 괜찮았지만, 이건 그 이상이잖아! 이런 걸 왜 조합에 가져가냐? 너 우리 회사 작가 아니야? 나한테 먼저 보여줬어야지!
  시걸 : 헐? 진심이세요? 저기, 그 원고는 사장님에게 먼저 보여드린 적이 있어요. 사장님이 오케이하긴 했지만... 사장님이 워낙, 워어낙 믿음직해야죠...
  리보위츠 : 하아, 말콤 이 인간 좀 진짜 어떻게 해야겠군. 시걸. 이번엔 계약서도 제대로 쓰고 급여도 제대로 지급할 거야. 그리고 게인즈 씨?
  게인즈 : 예?
  리보위츠 : 당신 말마따나 보는 눈 좀 있으신 거 같은데, 저랑 제 동료 도넨펠드랑 같이 좀 보십시다.
  게인즈 : 오, 스카우트인가요?
  리보위츠 : 그건 만나서 얘기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시걸? 자네는 빨리 슈스터와 원고 작업 해와. 설정 다듬을 시간 얼마 못 준다.


  게인즈는 그 해 도넨펠드와 리보위츠를 만나 스카우트 이상의 제안을 받게 된다. 독립할 기회였다. 게인즈는 도넨펠드의 자금 지원을 받아, 내셔널 얼라이드의 새 협력사인 올 아메리칸 퍼블리케이션즈 All-American Publications 를 창업했다. 후일 이 회사에서 런칭하게 될 캐릭터 중에는 원더우먼, 그린랜턴, 플래시 등 DC 코믹스의 메인 캐릭터들이 있다. 그리고 내셔널 얼라이드 퍼블리케이션즈, 디텍티브 코믹스 INC., 올 아메리칸 퍼블리케이션즈의 연결된 세 회사는 21세기 현재의 DC 코믹스의 전신이 된다.


  도넨펠드와 리보위츠의 입장에서도 이는 기회였다. 게인즈의 출판업 경력은 출판 만화를 시작하기 직전의 이스턴 컬러에서 시작했다. 이스턴 컬러에서 시작해 맥클루어 조합까지 온 사람이니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코믹 스트립이 출판 유통의 영역으로 오면서 코믹스가 되어가는 초기 역사의 중심에서 Famous Funnies 를 출판했던 실무 당사자 중 하나였다. 그런 사람답게, 게인즈는 가판대 유통망에 대해 도넨펠드만큼 잘 알고 있었다. 게인즈는 올 아메리칸의 설립 외에도 자신의 유통 라인 일부를 가져와 회사의 유통망 문제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는 동안 시걸과 슈스터는 신이 나서 원고 작업을 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맥스 게인즈(좌), 해리 도넨펠드(중), 잭 리보위츠(우), DC 코믹스의 전신인 세 회사를 일궈낸 세 명


- 빅뱅액션 코믹스 #1     


  당대의 다른 코믹스 이슈와 비슷하게, 액션 코믹스 또한 여러 작품이 함께 실리는 앤솔로지 형식으로 기획되었다. 그래서 최초의 수퍼맨 출판 이슈는 총 13페이지 분량이었다. 이 13페이지 원고에 대한 급여는 130달러로 책정됐다. 두 작가는 이에 만족했고, 시장의 관습에 따라 저작권과 판권을 DC에 넘기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두 사람이 연재했던 다른 작품의 캐릭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후일 법적 분쟁의 씨앗이 된다.


  어쨌든, 액션 코믹스의 첫 이슈가 내셔널 얼라이드에서 발간되었다. 커버 날짜는 1938년 6월. 실제 판매는 5월부터 시작됐다. 판매 날짜와 커버 날짜가 다른 이유는 유통 때문이다. 출판 인쇄를 한 후에 판매처로 배송하는 시간을 감안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엔 며칠이면 전국 배송이 완료되지만, 미국과 같이 넓은 나라에서는 최소 2~3주가 걸린다. 비행기로 배송한다 쳐도, 항공 배송이 가능한 목적지는 각 주의 거점 도시들뿐이며 가격도 비싸다. 육상 배송을 이용해야 거점 도시 외에도 배송이 가능하며 가격도 훨씬 싸다. 과거 출판 잡지가 많았던 시절의 한국에서도, 2월 말이 되면 3월호가 입고되는 등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액션 코믹스 #1의 판매는 1938년 5월에 시작되었지만, 내셔널 얼라이드와 디텍티브 코믹스의 유통망이 닿는 가판대 모두에서 접할 수 있었던 날짜는 6월, 아마도 중순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해졌다. 액션 코믹스 #1은 폭발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1의 인쇄 부수는 20만 부였는데, 금방 매진되었다. 2달 후의 #3은 100만 부의 판매를 기록했다. 수퍼맨 캐릭터가 단시간 내에 흥행성을 증명하자, 내셔널 얼라이드는 수퍼맨만의 시리즈를 하나 더 만들기로 결정했다. 64페이지 풀컬러의 계간지로 기획된 수퍼맨 #1은 캐릭터의 데뷔 1주년인 1939년 6월에 판매가 개시되었다. 수퍼맨 #1은 코믹스 역사에서 처음으로 캐릭터 하나만을 다루는 이슈가 되었다.


최초의 솔로 코믹스 이슈인 수퍼맨 #1의 표지


  수퍼맨의 초능력은 이름 그대로였다. 무한에 가까운 근력, 빛에 가까운 빠르기, 중력을 무시하는 비행 능력, 강력한 정신력과 감각, 엑스레이 시력, 전 지구를 뒤덮는 청력 범위, 방탄과 내화성의 강철 피부, 진공에서도 호흡이 가능한 생존력, 명석한 두뇌, 강력한 레이저를 발산할 수 있는 안구, 저온으로 발산 가능한 입김 등등. 여기에 윤리도덕을 지키며 그 이상을 추구하는 면모까지 하면 가히 니체의 위버멘쉬 이상의 인간상이다.


  이를 좀 더 분석해본다면,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수퍼맨이 적절하게 채워줬다고 할 수 있다.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불황, 공권력 시스템의 낙후로 인한 범죄 문제, 2차대전이 벌어져 뒤숭숭한 세계 분위기 등으로 인해 혼란한 미국인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강인한 아이콘으로서 수퍼맨이 제시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수퍼맨은 선(善)의 표상인 동시에 강력한 징벌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구원으로 묘사된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나 다름없는데, 그 신이 스펙타클한 재미를 갖추고 있다. 수퍼맨의 히트는 그만큼 미국인들이 당대의 환경에 크게 지쳐있었음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퍼맨은 새로운 유형의 영웅 캐릭터였다. 기존의 영웅 캐릭터는 고난을 극복하는 것으로 영웅성을 보였다. 수퍼맨은 고난 극복만이 아니라 타인을 구원하는 것으로도 영웅성을 증명했다. 아킬레스와 수퍼맨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인간 평균보다 한참 위에 존재하기에 천상의 신과 같지만, 인간 사이에 존재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을 도우려 한다는 점에서는 예수나 부처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2013년에 발매된 DC 캐릭터들의 격투 게임 인저스티스 Injustice 의 부제는 우리 사이의 신, Gods Among Us 다.



  수퍼맨으로 인해 시작된 캐릭터 유형인 수퍼히어로는, 그래서 초능력을 가진 것이 전부가 아니다. 캐릭터가 자신의 능력을 통해 자신이 속한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려 하는 유형이 수퍼히어로이고, 방향을 반대로 돌린 것이 수퍼빌런이다. 따라서 수퍼히어로 캐릭터는 당대의 사회적 필요나 사회적 환경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당대를 가장 빠르게 반영하게 되어 있는 캐릭터 유형이다. 첫 번째 수퍼히어로인 수퍼맨부터가 그러한 역할로 시작했다. 수퍼맨은 작품 내에서는 세계를 구했고, 작품 밖에서는 회사와 작가를 구했으며, 더 나아가 미국인들에게 필요한 위안을 제공했다. 문학의 치유 기능이다.



- 설정 정립     


  행복은 행복이고 문제는 아직 있었다. 1914년생인 시걸과 슈스터가 아직 혈기방장한 20대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더 자극적인 소재를 쓰고 싶어했다. 성적 표현, 강렬한 범죄 내용, 사회적 이슈의 반영 등등. 하지만 회사의 생각은 달랐다. 1939년은 대공황의 말기였지만 그 시대를 사는 당대인의 입장에선 나아지기만 하지 끝나지 않는 불황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터져서 뒤숭숭한 시기였다. 회사의 경영진들이 보기에, 수퍼맨은 이런 시대 상황 하의 미국인들에게 위안을 파는 정도면 사회적 역할을 차고 넘치게 수행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 기능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어두운 요소를 최소화해야 했다. 따라서 작가들을 통제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 답은 편집자였다.


  1940년, 휘트니 엘스워스 Whitney Ellsworth 라는 작가가 수퍼맨의 담당 편집자로 발령 받았다. 엘스워스는 수퍼맨의 주요 타겟 독자층을 어린 독자로 잡았다. 그래서 수퍼맨은 작중에서 살인을 금지 당했고, 성적 요소가 배제되었다. 엘스워스의 결정은 살인을 절대 기피하는 절대선의 인물로서 수퍼맨의 방향성을 결정했다. 인간 사이의 신으로서 기능하는 수퍼맨의 특성을 잘 파악했다고 볼 수도 있다.


  후임 편집자들도 제각각의 자취를 수퍼맨에 남겼다. 그중에서 가장 큰 공헌을 한 편집자는 모티머 와이징어 Mortimor Weisinger 이다. 와이징어는 작가들과 1살 차이의 동년배였고, 역시 SF 팬보이였다. 와이징어는 수퍼맨의 기원 스토리와 초능력의 원리 등의 설정을 세세하게 매만졌다. 수퍼맨의 남극 기지인 고독의 요새 Fortress of Solitude , 크립톤 행성의 범죄자들이 수감된 틈새 차원 감옥인 팬텀 존 Phantom Zone , 수퍼맨을 비롯한 크립톤인들을 약하게 만드는 약점이자 현재는 미국식 영어의 구어 표현에 당당히 등재된 크립토나이트 Kryptonite 등의 설정이 와이징어의 흔적이다.


지구의 태양은 크립톤의 붉은 태양과 달리 노란 태양이었기에, 크립톤인인 수퍼맨에게는 초능력을 부여했다는 설정은 모티머 와이징어가 부여했다.


  새로운 캐릭터 유형의 선두주자로서, 수퍼맨은 점점 다듬어지면서 시장에서 가치를 증명해나갔다. 이 메가 히트를 본 다른 작가들 중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나도 저런 캐릭터 잘 만들어볼 수 있겠다.’


  그 사람들은 밥 케인 Bob Kane , 빌 에버렛 Bill Everett , 칼 버르고스 Carl Burgos , 빌 파커 Bill Parker 등의 작가들이었다. 회사도 있었다. 타임리 코믹스는 아예 이 새로운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사였다.



- 배트맨망토 쓴 탐정 자경단     


  1939년, 후일 DC 코믹스로 하나가 될 세 회사의 상황을 보자. 내셔널 얼라이드 퍼블리케이션즈, DC 코믹스 INC., 올 아메리칸 퍼블리케이션즈는 수퍼맨의 성공으로 인해 성장세였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 많은 작가와 더 많은 캐릭터가 필요해졌다. 수퍼히어로라는 새 유형의 영웅 캐릭터가 시장에서 위력을 보였기에, 새로운 수퍼히어로 캐릭터를 만들어달라고 작가들에게 요청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유효한 제안은 밥 케인에게서 왔다.


  밥 케인에게는 2살 차이 나는 고등학교 친구인 윌 아이즈너 Will Eisner 가 있었다. 케인과 아이즈너는 1936년에 함께 Wow, What a Magazine! 이라는 이름의 만화 잡지에 21세와 19세의 나이로 참여하면서 데뷔했다. 아이즈너는 이때 만난 만화가 겸 편집자 제리 아이거 Jerry Iger 와 함께 만화 창작 스튜디오를 차렸다. 윌 아이즈너는 훗날 자신의 이름을 딴 아이즈너 상이 생길 정도의 거물로 성장하게 되는 만화가다. 케인은 훗날 자신보다 위대해질 친구의 스튜디오에서 같이 일을 하다가, 1939년에는 독립해서 자기 스튜디오를 차린 상태였다. 그러다가 수퍼맨의 히트를 보게 되었다. 이 히트에 영감을 받은 케인은 자신도 수퍼맨과 같은 캐릭터를 만들어 팔아 유행에 합류하고자 했다. 케인은 캐릭터 스케치를 만든 후에 스튜디오 직원 한 명을 불러 의견을 구했다. 그 직원의 이름은 빌 핑거 Bill Finger 였다.


  핑거는 케인과 같은 유대계였고,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고, 케인보다 1살 많았지만 케인의 스튜디오에 취직해 케인의 고스트라이터로 글을 쓰고 있었다. 케인은 자신이 디자인한 수퍼히어로 캐릭터, 배트-맨 the Bat-Man 을 보여주었다. 얼굴에는 눈만 가리는 도미노 마스크를 썼고, 등에는 망토가 박쥐 날개 모양으로 치솟아 있었으며, 두꺼운 장갑을 꼈고, 코스튬은 붉은 색이었다. 핑거가 보기엔 모방의 냄새가 너무 짙었다.


밥 케인이 처음 디자인한 배트맨의 초기 형태


  핑거는 케인에게 디자인 수정을 건의했고 케인은 받아들였다. 그리고 핑거는 컨셉 하나만 남기고 디자인을 싹 들어엎었다. 도미노 마스크를 벗기고 입과 턱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덮는 복면을 씌웠다. 박쥐 컨셉을 살리기 위해 귀 부분은 뾰족하게 처리했다. 색조는 원색을 배제하고 검은색과 회색을 썼다. 장갑은 없애고 대신 큰 부츠와 늘어뜨린 망토를 입혔다. 이름은 하이픈을 빼고 배트맨 Batman 으로 정했고 가슴에는 박쥐 모양의 로고를 넣었다.


  케인이 설정한 배트맨의 본명은 스코틀랜드 왕의 이름에서 따온 로버트 브루스 Robert Bruce 였다. 핑거가 느끼기엔 왠지 모르게 식민지 시절이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정반대의 맥락을 지닌, 미국 독립전쟁 시기의 장군의 이름과 섞어서 브루스 웨인 Bruce Wayne 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핑거는 스토리 작가답게 브루스 웨인 – 배트맨의 설정도 매만졌다. 핑거는 기존의 탐정 장르에서 힌트를 얻어, 배트맨을 자경단 탐정 활동을 하는 수퍼히어로로 디자인했다. 브루스 웨인은 탐정으로서 거의 완벽한 수준의 수사 능력을 습득했는데,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거대한 부와 자신의 열정 덕분이었고, 초인적인 격투와 수사 능력이 초능력을 대신했다. 그가 이런 능력을 연마하고 자경단 활동에 나선 이유는 부모가 범죄에 희생된 유년기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범죄자들에게 공포가 될 상징이 필요했고, 어둠 속의 박쥐로 그 상징을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핑거가 영향을 받은 선배 탐정, 선배 자경단 캐릭터들은 섀도우를 비롯하여 조로 Zorro , 딕 트레이시 Dick Tracy , 셜록 홈즈 Sherlock Holmes 등 소설과 코믹 스트립의 캐릭터들이었다.


  케인은 핑거가 쓴 스크립트 원고를 가지고 2회분의 연재용 원고를 만들었다. 케인은 탐정 캐릭터니까 디텍티브 코믹스에 연재된다면 컨셉이 잘 맞겠다는 판단을 하고 DC INC.로 원고를 가져갔다. 제안은 통과되었고 케인은 연재 계약을 했다. 이 계약에 핑거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핑거는 케인의 직원이었고, 이름을 밝히면 안 되는 고스트라이터였기 때문이다.


배트맨의 데뷔 이슈, 디텍티브 코믹스 #27


  배트맨 캐릭터는 1939년 3월에 발매된 액션 코믹스 #12에 처음 광고되었고, 같은 시기에 발매된 디텍티브 코믹스 #27에서 첫 데뷔를 했다. 데뷔는 성공이었다. 배트맨은 수퍼맨과 함께 회사 매출의 근간을 책임지는 듀오가 되었다. 그래서 배트맨 역시 이듬해인 1940년에 수퍼맨과 마찬가지로 독립 타이틀을 얻었다. 41년에는 두 캐릭터를 크로스오버시킨 월즈 파이니스트 코믹스 World’s Finest Comics , 번역하면 ‘세계 최고 만화’도 발매를 시작했다. 밥 케인은 성공을 발판 삼아 스튜디오를 확장했고, 빌 핑거도 독립할 수 있었다. 핑거는 올 아메리칸과 계약을 하고 스토리 작가로서 정식 데뷔를 했다.



- 성공과 안정화     


  한편 배트맨의 구체적인 설정 완성은 1940~41년에 진행되었다. 배트맨이 전투용 도구와 수사용 도구를 수납해두는 공간, 유틸리티 벨트가 처음 설정된 것이 디텍티브 코믹스 #29였다. 이어서 배트맨의 투척 무기인 배타랑 Batarang 과 박쥐 컨셉의 탈것과 비행기 등도 등장했다. 수퍼맨의 불살주의를 설정했던 편집자, 엘스워스는 배트맨에게도 같은 설정을 부여했다. 핑거가 설정해두었던 배경 스토리 – 부모의 죽음과 그 트라우마가 공개된 후엔 배트맨과 비슷한 유년기 경험을 한 사이드킥 로빈 Robin 도 등장했다.


  빌 핑거의 생각으로는, 배트맨이 셜록 홈즈라면 배트맨에게도 왓슨이 필요했고, 그래서 마련한 캐릭터가 본명을 딕 그레이슨 Dick Grayson 이라고 하는 로빈이었다. 로빈의 첫 등장은 1940년 4월의 디텍티브 코믹스 #38이다. 로빈은 시작부터 보이 원더 the Boy Wonder 라는 별명을 갖고 시작했다. 번역하면 ‘경이로운 소년’ 정도인데, 이 단어의 어감을 한국어로 원만하게 번역할 길이 애매한 탓에 지금까지는 그대로 음역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천재 소년’ 정도로 번역하고 있다. 딕 그레이슨은 서커스단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아크로바트 묘기에 능숙해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는 설정이다. 그레이슨은 부모가 서커스 묘기를 공연하던 중 피살당한 후 브루스 웨인의 눈에 뜨이게 되고, 그 피보호자가 된 후 배트맨의 사이드킥인 로빈이 된다. 그리고 보이 원더 로빈이 디텍티브 코믹스의 판매량을 기존의 2배 가까이 끌어올렸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로 로빈의 마케팅은 성공했다. 청소년과 아동을 대상으로 기획한 의도가 적중한 것이다.


보이 원더, 로빈의 첫 등장. 디텍티브 코믹스 #38


  정립되어가는 설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은 제리 로빈슨 Jerry Robinson 과 딕 스프랭 Dick Sprang 등의 초기 배트맨을 맡은 그림 작가들이 주로 수행했다. 밥 케인이 슬슬 직접 그림을 그리는 일이 적어졌고, 또 생산해야 하는 원고가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리 로빈슨의 경우엔 케인, 핑거와 함께 로빈을 창조한 작가이기도 하다. 이들은 대부분 케인에게 고용되어 스튜디오 소속으로 일했다. 특히 스토리 부분은 다수의 고스트라이터, 즉 빌 핑거의 후배격 되는 사람들이 맡아 케인의 지휘 하에 일했다. 이들의 이름은 대부분 알 수 없지만 몇 명은 알려져 있다. 후일 저스티스 리그를 집필하게 되는 스토리 작가 가드너 폭스 Gardner Fox 가 이 고스트라이터 필진 중에 하나였고, 이 사람이 ‘배트’가 앞에 붙는, 배타랑, 배트모빌, 배트케이브 등의 설정을 디자인한 사람이다.


  이때부터 케인은 그림에 있어서는 펜슬러 역할만 하면서 사실상 편집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방향성과 기초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콘티를 그리는 것까지가 케인의 업무였고, 아이디어를 구체적 설정으로 만드는 스토리 라이팅 업무와 콘티를 펜화로 그려내는 잉커의 업무는 휘하의 스튜디오 소속 작가들이 맡게 되는 시스템이었다. 아직 20대인 케인이 건실한 스튜디오 하나를 소유하고는 많은 판매고를 올리는 회사와 계약을 맺고서 히트작을 만들어냈으니, 굉장히 큰 성공을 한 것이다.



- 렉스 루터와 조커숙적 탄생     


  그런 작업을 하고 있던 1940년이었다. 새해가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밥 케인과 빌 핑거와 제리 로빈슨이 한자리에 모였다. 회의 자리였고, 회의의 주제는 새로운 빌런 캐릭터의 아이디어였다. 세 사람의 복안은 이러했다. ‘배트맨의 숙적, 배트맨의 반대항이 될 빌런 캐릭터를 만들 것.’ 그리고 이 자리에서 불세출의 캐릭터, 조커 Joker 가 만들어진다.


  케인과 핑거는 빌런으로 휴고 스트레인지 Hugo Strange 라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를 만든 적이 있다. 하지만 스트레인지는 후일 ‘자체적으로 조사하여 배트맨의 진짜 정체를 알아낸다’ 라는 스토리 라인을 부여받기 전까지는 평범한 매드 사이언티스트 계열의 빌런이었고, 큰 임팩트를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작가들은 배트맨에게 강한 매력이 있는 빌런, 즉 평생의 숙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마침 제리 시걸과 조 슈스터도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시걸과 슈스터는 초기 수퍼맨 원고, 그것도 가장 초기의 소설에서 빌 던 캐릭터를 끄집어내 설정을 고쳐서 렉스 루터를 만들어냈다. 루터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계열이지만, 같은 계열의 다른 캐릭터들보다 지적 천재성이 더욱 강조된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었다. 후일 이 천재성이 과학 기술 분야는 물론 사업 경영과 사회적 영향력의 측면까지 포함하게 되면서, 렉스 루터는 점차 수퍼맨과는 다른 방식으로 ‘완전한 인간’의 성격을 얻게 된다. 초기의 루터는 풍성한 머리를 자랑했지만 천재성 컨셉이 구체화되면서 원형 캐릭터인 빌 던처럼 대머리가 되었다. 그렇게 렉스 루터의 캐릭터 컨셉이 정리되어 갔다.


“나는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지적 영역의 끝까지 갔다. 나는 사회적 영향력도 막강하다. 나는 완벽한 인간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진정한 존경과 문명이 바치는 찬사는 내가 아닌 수퍼맨에게 간다. 인간이 아닌 외계인에게. 가짜 신에게. 참을 수 없다!”


  수퍼맨만큼이나 완벽한 인간이지만, 윤리적 측면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렉스 루터를 요약하는 감정은 수퍼맨에 대한 열등감이다. 이것이 렉스 루터를 수퍼맨의 반대항으로 만드는 요소다. 물론 40년대의 시점에서 렉스 루터는 약간 차별화된 악마적 천재 내지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였을 뿐이었지만, 따라서 시걸과 슈스터의 씨앗은 심어졌다. 반면 케인, 핑거, 로빈슨은 아예 다른 방향을 잡고 있었다. 곧 발매될 배트맨의 계간 솔로 이슈에 완성도 높은 설정으로 데뷔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사람의 회의는 영화 라쇼몽의 줄거리처럼 전해진다.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세 명 각자의 증언이 약간씩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의 증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밥 케인 : “조커를 만든 사람은 나와 빌 핑거다. 제리 로빈슨이 조커 카드를 갖고 왔고, 핑거가 그걸 보고 영감을 얻어, 관련 자료를 보여주고 조커의 초기 설정을 냈다. 로빈슨은 카드를 가져온 것 외엔 아무 것도 안 했다.”
제리 로빈슨 : “난 조커의 최초 스케치를 그렸다. 카드를 이용한 아이디어였다. 그걸 보고 빌 핑거가 영감을 받았고, 어디서 책을 찾아와서는 참고 자료라고 보여줬다. 핑거가 처음 조커라는 이름과 간단한 설정을 잡았다. 우리 셋 각자가 역할이 나뉘어 있었다.”
빌 핑거 : “밥 케인이 불러서 회의에 갔다. 케인은 트럼프 카드를 보여주면서 새 빌런을 만들 거라고 했다. 로빈슨인지 케인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둘 중 하나가 조커 카드를 보고 아이디어가 생겼다고 했다. 케인이 러프 스케치를 그렸는데 조커 같지는 않고 광대에 더 가까웠다. 난 그 스케치를 보고 떠오른 영감이 있었고, 자료를 찾아 그 영감을 설명했다. 케인이 내 아이디어에 따라 다시 스케치를 그렸고, 조커가 탄생했다.”


  카드를 가져온 사람이 정확히 누군지, 카드 중에서 조커 카드에 처음 주목한 사람이 누군지, 최초 스케치와 최종 스케치를 그린 사람은 누구인지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조커 캐릭터의 기초를 잡은 영감은 빌 핑거에게 왔다는 점이다. 현재 조커 창조의 크레딧은 핑거와 케인에게 있다.


  핑거가 조커 카드를 보고 받은 영감은 배우 콘라드 바이트 Conrad Veidt 가 1928년에 주연했던 소설 원작의 영화 ‘웃는 남자’ The Man Who Laughs 였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은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이다. 이 이야기에는 그윈플렌 Gwynplaine 이라는 이동 서커스의 괴물 쇼 출연자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작중에서 그윈플렌은 어린 시절 유괴당해 입을 찢겼고, 이로 인해 웃음이 매우 기괴했지만 내면은 선한 사람이라는 설정이다. 1928년 영화에서 그윈플렌을 연기한 콘라드 바이트는 소설에 언급된 ‘매우 기괴한 웃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핑거는 조커 카드, 그리고 바이트가 연기한 그윈플렌의 웃음을 광기와 연결한 이미지를 생각해냈다.


콘라드 바이트가 연기한 ‘웃는 남자’의 그윈플렌. 조커의 원형이다.

훗날 조커가 주인공인 코믹스 하나의 제목도 ‘웃는 남자’로 지어지고,

웃음과 상처의 기괴한 대비 또한 조커 캐릭터에게 계승된다.


  조커를 구성하는 요소 - 기괴한 외모, 웃음에 대한 집착, 이상한 범죄 활동, 확실치 않은 기원 스토리 등은 핑거가 만든 것이 거의 확실하다. 누구의 공인지 확실치 않은 최종 스케치에는 하얀 얼굴, 빨간 입술, 녹색 머리카락이 있다. 조커가 완성되었다.


  조커는 1940년 3월 25일을 발매날짜로 하는 계간지 배트맨 #1에서 데뷔했다. 한편 렉스 루터는 같은 달, 액션 코믹스 #23에서 데뷔했다. 비록 시작할 때의 위상이 다르긴 했지만, 훗날 DC 코믹스의 빌런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두 거물이 같은 달에 태어났다는 점은 재미있는 우연이다.



- 인정받지 못한 자빌 핑거     


  이후 핑거는 다양한 배트맨 캐릭터들에 참여했으며 대부분 밥 케인과의 협업이었다. 배트맨 #1에서 데뷔한 캐릭터는 조커만이 아니었다. 캣우먼 Catwoman 또한 같은 책에서 데뷔했다. 이때는 코스튬도 없었고, 이름은 그냥 더 캣 The Cat 이었지만, 캣우먼의 캐릭터를 구성하는 요소는 이때 이미 제시되었다. 고양이 컨셉, 남성보다 우위에 있는 느낌의 섹스어필, 배트맨과 밀당을 주고받으면서 애태우는 로맨스 관계 등. 케인에 의하면 당대의 섹스심볼이었던 배우 진 할로우 Jean Harlow 와 본인의 사촌 루스 스틸 Ruth Steel 의 이미지를 섞었다고 한다. 밥 케인이 새 캐릭터의 설정을 맡길 가장 믿음직한 스토리 작가는, 역시나 자기 고스트라이터로 출발한 빌 핑거였다. 핑거는 케인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이 캐릭터의 성격을 ‘여성이 봐도 섹스어필을 느낄 수 있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게 선정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설정했다.


  사고로 인해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초능력을 얻은 배우 출신의 범죄자 클레이페이스 Clayface 는 1940년 6월에 디텍티브 코믹스 #40에서 데뷔했다. 역시 케인과 핑거의 합작이었다. 누구로든 변할 수 있는데 하필이면 전직이 배우여서 그 위장을 알아낼 수 없다는 으스스한 설정은, 호러 장르의 괴물 캐릭터를 탐정물인 배트맨 브랜드에 도입한 시도였다.


  1941년의 밥 케인은 여러 아이디어를 떠올려 핑거에게 주었다. 허수아비를 컨셉으로 한 빌런 스케어크로우 Scarecrow 도 그 중 하나다. 이 역시 호러 장르의 요소를 활용한 것이다. 또한 케인은 당시 담배 쿨 Kool 의 마스코트인, 큰 실크해트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펭귄을 보고 다른 아이디어를 얻었다. 케인은 펭귄을 닮아서 펭귄이라 불리는 캐릭터를 구상했다. 핑거는 이 캐릭터의 성격을, 귀족적이고 권위적이지만 외모와 그로 인한 별명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잔인해진 갱 두목으로 설정했다. 그해 11월에 스케어크로우가 제리 로빈슨의 그림과 빌 핑거의 스토리로 월즈 파이니스트 코믹스의 가을호인 #3에서 데뷔했고, 12월에는 펭귄이 밥 케인의 그림으로 디텍티브 코믹스 #58에서 데뷔했다. 스케어크로우는 한동안 쓰이지 않다가 후일 재발굴되어 부활했고, 펭귄은 현재까지도 배트맨의 대표적 빌런 중 하나로 계속 등장하고 있다.


  배트맨의 빌런 중에서 얼굴 반쪽이 타버린 것으로 유명한 투페이스 Two-Face 는 42년 디텍티브 코믹스 #66에서 데뷔했다. 최초 설정에선 성이 켄트였지만, 수퍼맨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후에 이름이 하비 덴트 Harvey Dent 로 바뀐다. 신체의 반이 타있고 동전 던지기의 확률을 통해 행동 선택지를 결정한다는 핵심 요소는 이때부터 존재했다. 케인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1931년 영화판에서 영감을 얻어 스케치를 만들었고, 설정을 다듬은 사람도 빌 핑거였다. 역시 현재까지 장수하는 빌런이다.


  핑거가 케인의 영향 없이 만든 캐릭터도 있었다. 수수께끼와 퍼즐에 집착하고 녹색 물음표를 트레이드 마크로 하는 리들러 Riddler 는 핑거가 독자적으로 만든 캐릭터였다. 1948년 10월에 디텍티브 코믹스 #140에서 딕 스프랭의 그림으로 데뷔한 리들러는 현재까지도 배트맨의 메인 빌런 중 하나로 이용되고 있다. 핑거의 기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기념일마다 그와 관련한 범죄를 저지르는 캘린더맨 Calendar Man 은 비록 마이너한 2군급 빌런이지만, 1958년에 디텍티브 코믹스 #259에서 셸든 몰도프 Sheldon Moldoff 의 그림으로 첫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몰도프 역시 핑거와 같은 케인의 고스트라이터 출신이다. 1대 클레이페이스보다 마이너한 캐릭터지만 2대 클레이페이스 또한 핑거와 몰도프의 합작으로 1961년 12월의 디텍티브 코믹스 #298에서 데뷔했다.


  하지만 이 모든 크레딧을, 빌 핑거는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다. 밥 케인이 배트맨 브랜드와 그 캐릭터들의 저작권을 회사에 완전히 넘기는 계약을 할 때도, 핑거의 이름은 계약서에 없었다. 다른 참여 작가들과는 달리 핑거는 케인과 함께 캐릭터들을 창조하고 초반 스토리를 썼던 원작자인데도 말이다. 올 아메리칸 퍼블리케이션즈, 타임리 코믹스 등 다른 회사에서 맡았던 스토리 업무와 수퍼맨의 첫사랑인 라나 랭 Lana Lang 을 창작한 업무 등의 크레딧은 인정받았다. 하지만 가장 많은 노력과 아이디어를 쏟아부은 배트맨 업무에 대해서는 아무 크레딧도 인정받지 못했다. 오죽하면 꽤 오랫동안 리들러의 창조자 이름에는 담당 편집자였던 줄리어스 슈워츠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을 정도였다.


  역사가들은 이것이 케인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본다. 고스트라이터와 그 고용주로서 관계를 시작했고, 이 상하관계가 지속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배트맨과 빌 핑거의 사이에는 늘 중간에 밥 케인이 존재했고, 그래서 계약의 주체도 핑거가 아닌 케인이었다. 배트맨 브랜드에 있어서 핑거는 케인의 휘하 직원, 혹은 하청업자였을 뿐이다. 때문에 핑거는 케인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계약에서만 정당한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명백히 불합리했지만 시대는 그 불합리를 교정하지 않았다.


  빌 핑거가 받아야 하는 크레딧을 비공식적으로나마 챙긴 컨텐츠는 60년대의 배트맨 TV 드라마가 유일했다. 핑거의 크레딧이 명백하게 남은 캐릭터가 있었으니, 이 드라마에 처음 등장한 빌런인 클락킹 Clock King 이다. 드라마 오리지널 캐릭터였고 클락킹이 등장하는 에피소드의 각본 작업에도 핑거가 참여했기에 이 크레딧은 최초이자 20세기의 유일한 핑거의 공식 배트맨 크레딧으로 남았다.


  보도자료 등의 비공식적 루트가 아닌 배트맨 컨텐츠의 정식 크레딧에 빌 핑거의 이름이 포함된 것은 시대가 한참 지난 후인 2015년이다. 그마저도 and가 아닌 with를 써서 밥 케인의 크레딧이 좀 더 우위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말년의 케인은 핑거의 공로를 인정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발언을 남겼는데, 이때는 이미 핑거가 작고한 후였다.


2016년에 공개된, 드라마 ‘고담’의 2시즌과 영화 ‘배트맨 v 수퍼맨’은 DC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빌 핑거의 이름을 크레딧에 넣은 첫 영상물이었다.


  빌 핑거는 1974년에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함께 60년대 배트맨 드라마에 참여했던 친구 작가가 핑거의 자택에 방문했다가 사망한 고인을 발견했다. 핑거는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하여 독거 생활 중이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유일한 아들이 빌 핑거의 유해를 화장했고, 재는 오레곤의 한 해변에 배트맨 심볼 모양으로 뿌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핑거의 사후, 뒤늦게나마 그의 공로를 인정하는 다양한 상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현재 남은 유족은 빌 핑거의 손녀와 그녀의 아들인데, 이들이 빌 핑거의 크레딧을 되찾아온 공로자들이다. 현재 빌 핑거와 밥 케인이 아이디어 회의에 가기 위해 늘 지나다녔던 브롱크스의 거리 중 하나의 이름은 ‘Bill Finger Way’ 가 되었다.



- 다크 히어로배트맨     


  핑거와 케인이 배트맨을 비롯해 배트맨 브랜드에 창작해 넣은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병적인 구석이 있다. 배트맨 자신은 유년기의 트라우마에 시달린 나머지 사이드킥인 로빈 또한 자신과 똑같이 어려서 부모를 범죄에 의해 잃은 사람으로 골랐다. 조커를 비롯한 대부분의 빌런들은 제각각의 집착과 강박을 갖고 있다. 스케어크로우는 공포 개념에 대한 집착, 투페이스는 이분법 확률에 대한 집착, 리들러는 수수께끼와 퍼즐에 대한 강박, 캘린더맨은 기념일에 대한 강박 등등.


  배트맨 브랜드는 배트맨 캐릭터 자체의 배경 스토리와 배트맨의 디자인에 묻어나는 어두운 색조가 확장되고 정착한 세계다. 수퍼맨이 강철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처럼, 배트맨은 망토 쓴 십자군 The Caped Crusade 과 어둠의 기사 Dark Knight 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이 별명의 의미 또한 배트맨 브랜드의 기본 색채를 반영하고 있다. 배트맨이 수퍼히어로 활동을 하는 이유는 십자군과 비슷한 종류의 사명감 내지는 내면의 압박 때문이다. 그리고 그 활동의 종류는 어둠에서 행하는 응징이다. 캐릭터 분류로는 다크 히어로의 활동이다.


  다크 히어로라는 용어는 동아시아에서 주로 사용하는 분류다. 영웅 캐릭터는 본래 인간 평균을 뛰어넘는 업적을 세우는 인물로 그려진다. 수퍼맨은 여기에 초능력을 넣고 정체성을 드러내는 코스튬을 입어 수퍼히어로 장르의 원형을 만들어냈다. 그 직후에 나온 배트맨은 정반대의 변주를 취했다. 철저히 인간이라는 점, 초능력이 없다는 점은 사실 덜 중요한 부분이다.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수퍼맨과 달리 영웅적 활동의 동기가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수퍼맨이 재난에서 사람을 구출한다면 배트맨은 범죄를 응징하고 범죄자에게 복수하고 공포를 심어준다. 어두운 내면에서 비롯된 동기로 인해 어두운 공간에서 활동하는 영웅이기에 다크 히어로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다.


  수퍼맨을 제시한 제리 시걸이 반영한 시대의 필요는, 급변하고 희망 없는 시대에 무게추 역할을 해줄 아이콘이었다. 배트맨을 제시한 빌 핑거가 반영한 시대의 필요는, 사람들이 시대에 대해 갖고 있는 원초적인 분노였다. 국가의 사법 시스템과 행정 시스템은 늘어가는 이민자와 실업률, 이 둘이 합쳐져서 탄생하는 갱들의 범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아예 그 갱들이 정치적 의사를 대변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인데, 정치 시스템 또한 이민자들에 대해 폐쇄적이고 방어적이었다. 이러면 과격한 접근 방식을 택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배트맨과 같은 다크 히어로 캐릭터들은 과격함을 기꺼이 택한다. 사소한 도덕적 딜레마는, 사소할 뿐이다. 현실은 그만큼 시궁창이니까. 그래서 배트맨이 살고 있는 도시 고담 Gotham 은 동부 해안의 대도시, 특히 뉴욕시를 모델로 삼았는데, 정치-행정-사법이 다 망가진 도시로 묘사된다.


  그리고 다크 히어로는 선악 이분법의 특징이자 약점인, 구도의 단순함을 보완해주는 효과가 있다. 즉, 이야기의 구도를 좀 더 풍부하게 한다. 영웅 캐릭터는 전통적으로 정의로운 동기를 갖고 있거나 정의를 목표로 삼는다. 전통적 영웅은 동기를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에서도 최대한 도덕적 선택을 하려 한다. 그래야 타인의 귀감으로서 작동하는 영웅 캐릭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크 히어로는 그런 고민이 사치인 세계에 존재하기에, 더 통쾌하고 더 비장하며 선악의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영어권에서는 이런 캐릭터를 안티 히어로라고 분류해왔다. 영웅의 속성과는 반대인데 영웅이 위치하는 선역 자리에 있고 영웅의 기준을 흔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전통적 영웅과는 달리 안티 히어로는 정의 이외의 동기나 목표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완전한 악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안티 히어로의 번역어로 제시된 용어 중에는 반영웅(反英雄)이 있었다. 영웅과 반영웅의 두 가지 분류법만 갖고 있는 영어권에서는 배트맨을 안티 히어로로 분류하곤 한다. 여기서는 다크 히어로를 선악 이분법 구도에서 볼 때 선에 속하는 분류로, 안티 히어로를 그 사이의 회색지대에 존재하는 분류로 보도록 하자. 그렇다면 배트맨은 다크 히어로에 속한다.


  이 분류를 쉽게 판별할 수 있는 질문이 여기 있다.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범죄를 막기 위해 극단적 폭력을 동원해야 한다면 정당한가? 범죄와 전쟁은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으며,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윤리적 경계라는 건 존재할까? ‘절대로 정당하지 않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명확히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 인물은 수퍼맨과 같은 전통적 영웅이다. 배트맨과 같은 다크 히어로라면 고담의 현실을 가리켜 보이면서 ‘넘으면 안 될 선이야 있지만,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안티 히어로라면 ‘그런 고민을 하는 걸 보니 현실을 모르는구나?’라고 빈정댈 것이다.


  이 영웅 캐릭터의 스펙트럼은 역사를 살펴보면 시간에 따라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전통적 영웅상이 제일 처음의 주류다. 일반적 선악 이분법에 기댄 이런 구도가 매너리즘에 빠질 때쯤이면, 다크 히어로와 안티 히어로가 등장해 구도를 다양화한다. 수퍼히어로 장르에서는 이런 장르 발전 단계가 매우 빠르게 관찰되었다. 수퍼맨이 등장한 직후에 배트맨이라는 반대 방향의 변주가 등장했다. 시대 반영의 속도가 빠른 만큼, 장르를 변주하고 장르의 다양성이 증가하는 속도도 매우 빨랐다. 이것이 수퍼히어로 장르가 태동부터 갖고 있던 특성이다.


  하지만 배트맨이 가진 다크 히어로로서의 색채는 점차 옅어져 갔다. 2차대전 후인 40년대 중후반부터, 편집부는 배트맨의 탐정물과 추리물의 요소를 약화시키고 수퍼맨과 같은 방식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전후에 필요한 영웅상은 어두운 쪽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밝고 컬러풀한’ 배트맨의 방향성은 1986년이 될 때까지 지배적이었다. 만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하지만 시대의 요구는 배트맨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배트맨이 처음 등장한 직후에 그보다 더 과격한 설정의 캐릭터가 등장했다. 다크 히어로보다는 안티 히어로 개념에 더 잘 들어맞는, 네이머 Namor 가 그 캐릭터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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