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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in Jun 11. 2022

거의 완전한 슈퍼히어로 통사 3. 2/4

냉전과 실버에이지 (2/4)


스탠 리 잭 커비     


  그리하여 스탠 리는 자신의 심정적 은퇴작을 기획했다. 마침 회사명도 마블 코믹스로 바뀌었다. 여러 모로 특별한 이벤트이니 그림을 맡을 특별한 작가가 필요했다. 회사를 둘러봤다. 잭 커비가 보였다.


  61년의 잭 커비는 일이 맘처럼 잘 안 풀리던 참이었다. 캡틴 아메리카 이후 파트너 조 사이먼과 함께 타임리를 떠나 유목 생활을 하던 중 2차대전이 터졌다. 유럽 전선에서 복무가 끝나 제대하고서는 다시 조 사이먼과 파트너가 되어 이 회사 저 회사를 떠돌았다가, 끝내 사이먼과 동업하여 자기 회사도 세워봤다. 하지만 이 회사는 고작 4개의 시리즈만 내고 폐업해야 했다. 과거에 두 사람이 그렸던 로맨스 만화 히트작을 자기들 회사에서 이어서 출판하려고 했지만, 그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를 견인할 타이틀로 점찍었던 프로젝트가 실패해 회사가 망하자, 조 사이먼은 광고업계로 이적해버렸다. 커비는 홀로 남겨진 유목민이 되어 다시 타임리 – 이제는 이름이 아틀라스로 바뀌었다가 또 마블 코믹스가 된 회사로 돌아와 있었다.


  커비는 이미 스탠 리와 합을 맞춰본 적이 있었다. 바로 작년인 1960년에 여러 편의 괴수물과 전쟁물에서 협업을 한 적이 있는데, 이때 창작한 캐릭터 중 하나가 그루트(Groot)이다. 그루트라는 단어는 네덜란드어로 ‘크다, 위대하다’라는 뜻인데, 그리하여 거대화가 능력으로 설정되었다. 괴수물에서 시작해, 21세기가 되어서는 수퍼히어로 장르로 편입해 영화에서 볼 수 있게 된 그 친구다.


  여러 장르를 경험했고 자신과 호흡도 맞춰봤던 베테랑 커비의 그림을, 스탠 리는 자신의 심정적 은퇴작의 그림으로 삼기로 했다. 그렇게 1961년 11월호로 판타스틱 4 #1 (Fantastic Four #1) 이슈가 발매되었다.

 

  그리고 스탠의 은퇴는 몇십 년 후로 밀려났다. 판타스틱 포의 히트는 엄청났다. 실버 에이지 만화의 성공은 판매량 외에도 독자의 팬 레터라는 지표가 있었다. 판타스틱 포 발매 직후 마블 편집부로 밀려든 팬 레터는 홍수에 비유되었다.


  판타스틱 포는 4명의 수퍼히어로 팀이다. 이 넷은 실제 가족 내지는 유사가족의 관계로 묶인다. 리드 리처드(Reed Richard)와 수 스톰(Sue Storm)은 부부다. 자니 스톰(Johnny Storm)은 수의 남동생이다. 벤 그림(Ben Grimm)은 세 사람, 특히 리드와 오랜 친구다. 이 네 사람은 우주 탐사 임무를 수행하던 중 특수한 방사선에 노출되어 제각각의 초능력을 갖게 되었다.


     

첫 이슈에는 수퍼히어로 장르답지 않게 코스튬도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스탠 리가 여타의 수퍼히어로와는 좀 다른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미스터 판타스틱(Mr. Fantastic)이라 불리게 된 리드 리처드는 신체를 늘일 수 있게 되었는데, 단번에 알 수 있듯 플라스틱 맨의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몽키 D. 루피의 중간 조상이 되었다. 그의 아내 수 스톰은 투명화 능력이 있는데, 얼마 후엔 이 능력의 기전이 투명한 역장(force-field)을 형성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역장은 총알 등의 물리력을 막는 방어막으로도 사용하지만, 빛을 굴절/반사시켜서 투명화 효과를 만들 수 있어 인비저블 우먼(Invisibe Woman)이다. 처음에는 우먼이 아닌 걸을 썼고, 명백히 고전 SF인 ‘투명인간’의 차용이다. 자니 스톰은 신체를 불꽃으로 감싸는 화염 조종과 방염 능력을 얻은 동시에 비행이 가능해 휴먼 토치(Human Torch) 이름을 얻었다. 이 능력과 이름은 명백히 칼 버르고스의 휴먼 토치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버르고스는 이에 반발해 소송까지 준비했으나 회사가 그를 달래고 합의를 봤다. 그리하여 칼 버르고스의 골든 에이지 휴먼 토치는 1대, 스탠 리의 판타스틱 포 휴먼 토치는 2대로 정리되었다. 벤 그림은 건장한 신체 전체가 암석질로 변했고 그래서 엄청난 내구력과 괴력을 가지게 되었다. 히어로 네임은 공포물에서 괴물을 지칭할 때 흔히 쓰는 구어 형태를 따라 씽(Thing)으로 정해졌다.

 

  SF, 공포, 그리고 골든에이지 시절의 수퍼히어로 요소를 적당히 섞어놓은 설정이었다. 그리고 스탠 리는 이 넷의 성격을 입체적으로 또한 정석의 조합으로 설정했다. 천재적 발상을 내놓지만 가끔 자기 천재성에 함몰되어 현실 감각을 잊는 과학자인 리드 리처드, 그런 남편을 현실에 발 딛게 끌어내리지만 가끔 고지식해지는 수 스톰, 쾌활하지만 가끔 지나쳐서 경박해지곤 하는 자니 스톰, 진중하지만 일상생활이 힘든 자신의 능력을 저주하기도 하면서 융통성이 좀 모자란 벤 그림. 네 명의 성격은 서로서로 맞물려야만 시너지 효과가 나고, 홀로 있다면 그 약점이 드러나고 마는 조합이다.


  팬 레터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스탠 리가 파악한 판타스틱 포의 히트 요인은 캐릭터의 입체성에 있었다. 성격의 어떤 요소가 초능력과 결합해 이들을 초월적인 영웅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그 성격 요소의 반대편 모습은 이들을 약하게 만들어버린다. 현실을 사는 사람들과 같은,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라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이후 스탠 리 작업의 기본 원칙이 된다.


  물론 성공의 요인을 스탠 리의 작업에만 돌리는 것은 잭 커비를 무시하는 처사다. 아무리 설정과 스토리텔링이 좋아도 만화의 외피는 그림이다. 그림작가의 디자인 또한 중요한 성공 요소다.


  잭 커비는 커리어 초기인 40년대의 캡틴 아메리카 시절부터, 디자인의 트렌드를 잘 읽으면서도 만화만의 그림 특징을 고민해왔던 작가다. 그가 그렸던 캡틴 아메리카 #1의 표지에는 만화 역사상 처음으로 효과선 기법이 쓰였다. 탄환이 날아가는 궤적을 표현한 직선, 물체가 부딪힐 때의 충격파를 표현한 방사형 선 등이다. 이 효과선 기법을 최초로 전면 활용한 작가가 잭 커비이며 그로부터 시작된 기법 발전의 역사에서 컷 분할의 다양한 형태, 집중선 등이 등장하며, 커비는 이 만화기법 발전사 초기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또한 수퍼히어로 캐릭터에게는 정체성 그 자체이기도 한 코스튬의 디자인, 그들이 활약할 공간인 배경의 건물 디자인 등에서도 잭 커비는 당대 기준으로 매우 세련되었다. 커비가 연구했던 디자인 사조는 미래주의다.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 ‘속도: 운동의 진로 + 연속적 움직임(Swifts: Paths of Movement + Dynamic Sequences)’, 1913

미래주의 사조가 천착한 요소들 - 장엄한 크기, 기계의 질감, 역동성 등을 잘 보여준다.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미래주의는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가 신문에 광고를 내며 시작한 프로젝트성 사조다. 이 사조의 주된 분위기는 ‘미래’라고 하는 이상화된 시점을 상정하고 미래를 성취하기 위한 요소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금속의 질감 강조, 당시로는 약간 비현실적이었던 대형 건축, 과장된 역동성 표현 등을 좋아했다. 그래서 크고 아름다운 기념비적 건물 세우기를 좋아했던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의 미적 정책에도 한 삽을 거들었다. 2차대전이 발발한 후 파시즘 정부에서 전쟁에 동원되기 싫었던 이탈리아 미래주의 미술가 일부가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미국에서도 미래주의 미술 사조가 시작되었는데, 특히나 역동적으로 사회가 변화하던 당시의 미국은 미래주의자들에게는 미래로의 표상 그 자체이기도 했다.     


  미래주의자들은 당시에 이미 초고층 건물, 와이어로 가득찬 방, 거대한 금속 기계의 집합 같은 것들을 상상했는데, 커비는 이 질감과 역동성 표현에 매료된 것 같다. 미래주의의 결과물들을 검토한 커비는 자신의 디자인과 표현 기법에 이를 반영시켰고, 이는 당대 젊은 독자들에게 굉장한 세련됨으로 다가갔다. 게다가 수퍼히어로 장르와 미래주의 화풍은 의외로 궁합이 잘 맞았다. 미래주의는 그 특성상 기술 숭배의 경향이 있는데, 수퍼히어로는 태생부터 SF의 상상력을 중요한 일부로 갖고 있었다.


이 무리지은 점들은 커비 크래클(kirby krackle)이라고 부른다.

커비가 우주 공간이나 에너지 흐름 등을 표현하기 위해 미래주의에서 힌트를 얻어 고안한 자신만의 시그니처 기법이다.


블랙 팬서가 데뷔한 판타스틱 4 #52의 일부.

역동성을 표현하는 효과선과 그에 맞는 포즈, 다양한 기계로 가득찬 공간이라는 상상력, 집중선의 활용 등이 눈에 띈다.


  스탠 리의 공감이 가는 설정과 스토리, 잭 커비의 역동적이고 세련된 디자인과 그림, 인기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성공의 기본 요소를 분석했다. 그럼 이제 이 조합으로 좀 더 작업을 해보면 된다.



+커비 라이징     


  스탠 리는 판타스틱 포의 성공 이후부터 폭발하다시피 작품 활동에 나섰다. 그 대부분이 현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 질주를 따라가보자.


  1961년 1월, 잭 커비와 함께 판타스틱 포를 만들었다. 이후 전설적인 빌런 캐릭터로 발전하는 닥터 둠(Dr. Doom) 역시 판타스틱 포 #5에서 데뷔했다.


  1962년 5월, 잭 커비와 함께 헐크(Hulk)를 만들었다.


  같은 달에 발행된 판타스틱 포 #4 이슈에서는 골든 에이지 이후 묻혀져 있었던 네이머를 재발굴하여 등장시켰다.


  같은 해 8월, 잭 커비와 함께 토르(Thor)를 만들었다.


  같은 달에는, 잭 커비와의 협업 시스템을 스티브 딧코(Steve Ditko)라는 작가와도 시작해 스파이더맨(Spider-man)을 만들었다.


  다음 달인 1962년 9월, 잭 커비와 또 함께 앤트맨(Ant-man)을 만들었다.


  1963년 3월, 잭 커비와 함께 아이언맨(Iron Man)을 만들었다.


  같은 달, 잭 커비와 함께 군인 겸 스파이로서 전설적인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닉 퓨리(Nick Fury)였다. 이 시점의 닉 퓨리는 수퍼히어로 장르와는 좀 거리가 있는, 전쟁물의 주인공이었다. 닉 퓨리의 부대 이름은 하울링 코만도스(Howling Commandos)로, 이후 수퍼히어로 장르에 편입한 후에는 캡틴 아메리카와도 연관이 된다.


  동년 6월, 앤트맨의 파트너인 와스프(Wasp)를 잭 커비와 함께 만들었다.


  동년 7월, 스티브 딧코가 가져온 원안을 보고 편집장으로서 지원을 해준 것이 닥터 스트레인지(Dr. Strange)이다.


  동년 9월, 또 잭 커비를 괴롭혀 히어로 팀을 하나 만들었으니 그것이 엑스맨(X-Men)이다.


  같은 달, 잭 커비는 계속 바빴다. DC코믹스의 저스티스 리그를 모방해 어벤져스(Avengers)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블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기점이었다. 타임리 시절에 시도했다가 사실상 실패하고 사장되었던 올위너스 스쿼드의 기본 컨셉이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1964년 3월, 잭 커비가 만들긴 했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쓰이지 않던 캡틴 아메리카를 부활시켜 어벤져스 #4에 등장시켰다. 이 시점부터 캡틴 아메리카는 애국심 캐릭터에서 이상적 선인 캐릭터로 발전해갔다.


  1964년 4월, 네이머의 창조자인 빌 에버렛과 함께 데어데블(Daredevil)을 만들었다.


  다음 달인 5월, 블랙 위도우(Black Widow)라는 여성 스파이 캐릭터를 돈 리코(Don Rico), 돈 헥(Don Heck)의 두 작가와 함께 만들었다.


  같은 해 11월에 호크아이(Hawkeye)를 돈 헥과 함께 만들었다.


  1965년 12월, 판타스틱 4 #45 이슈에 인휴먼즈(Inhumans)라는 초능력 인간 종족을 데뷔시켰다. 엑스맨과 거의 같은 설정이었고, 비슷한 상징과 맥락으로 사용했고, 엑스맨과 똑같이 잭 커비와의 합작이었다.


  1966년 7월, 잭 커비와 함께 최초의 흑인 수퍼히어로인 블랙팬서(Black Panther)를 만들어 판타스틱 포의 조연으로 데뷔시켰다.


  1967년 11월, 골든에이지 시절의 빌리 뱃슨과는 이름이 같지만 다른 캐릭터인 캡틴 마블을 진 콜란과 함께 만들었다.


  1969년 11월에는 진 콜란과 함께 팔콘(Falcon)이라는 최초의 아프리칸 아메리칸 수퍼히어로를 만들었다.


  현재에도 마블의 주력인 캐릭터들이 60년대 스탠 리에게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주력급 외에도 64년의 원더맨(Wonder Man)과 같이 큰 히트를 치지 못해 인지도는 낮지만 계속 등장하는 군소 히어로 다수도 스탠 리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리고 이 모든 캐릭터들은 스탠 리가 생각하는 실버 에이지 수퍼히어로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나마 약간의 예외는 스탠 리가 조언자 정도의 위치였던 닥터 스트레인지 정도이지만, 약간일 뿐이다. 판타스틱 포에서 보여줬던 특성이 이 대부분의 캐릭터에서도 발견 된다. 대부분의 히어로는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초인적 행위를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약점과 불완전성 때문에 고통받고 실패하고 고뇌한다.


스탠 리가 실버 에이지 시절에 창조했거나 창조에 관여한 캐릭터들(중 일부).



스탠 리의 스페셜 레시피


  판타스틱 포에서부터 시간 순서대로 살펴 보자. 수 스톰과 자니 스톰 남매는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부모가 외진 곳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아버지가 부상이 심각한 아내를 살리려다 실패한 것이다. 이로 인해 아버지 프랭클린 스톰 박사는 절망에 빠지고, 아내에 대해 부적절한 의료 행위를 했다는 과실치사 살인 혐의를 받아 기소되자 죄책감으로 인해 변호를 하지 않고 수감된다. 그래서 수는 어려서부터 동생을 어머니처럼 돌봐야 했고 현실적이고 포용력이 넓으면서도 독립심이 강한 성격을 얻었다. 반면 그런 누나의 슬하에서 잘 자란 자니는 앞뒤 없이 밝은 성격에 사고뭉치다. 이런 남매가 반쯤은 몽상가인 리드 리처드, 도시 최하층 빈민에서 우주비행사까지 된 자수성가 진지남 벤 그림과 만나게 된다. 수와 리드는 상호보완 하는 부부가 되고 조니와 벤은 상극이라 늘 티격태격하는 친구가 된다. 그러면서도 어려서 부모와 형을 잃어본 벤의 과거는 스톰 남매에게 익숙한 이야기이다. 이들 넷이 함께 우주 방사선을 맞아 초능력을 얻고 평범한 삶에서 유리되었다. 넷의 가족적 유대는 필연적이다.


  팀의 리더 역할인 리드-수 부부의 초능력이 강력하지 않다는 지적 혹은 불평은 발매 전부터 제기되었다. 미스터 판타스틱의 몸이 늘어나는 능력은 플라스틱 맨이 원조인데, 그는 사실상 개그 캐릭터였다. 인비저블 우먼의 투명화 능력은 전혀 공격적이지 않다. 이에 대한 스탠 리의 반응은 ‘주먹질하는 여성 히어로면 그냥 원더우먼이잖아?’였다. 그의 의도가 처음부터 강점과 약점을 모두 가진 인간들의 케미스트리였다는 점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인비저블 우먼의 능력이 너무 단순하고 약하지 않냐는 지적이 이어지자, 스탠 리는 64년의 판타스틱 포 #22 이슈에서 투명화 능력이 역장 전개 능력의 응용 중 하나였던 것으로 설정을 확장해버린다. 단순히 조언과 지원 역할에만 머무는 보조적 여성 캐릭터를 의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원래 인비저블 걸이었던 수 스톰은, 존 번(John Byrne)과 같은 후임 작가들에 의해 능동적 성격을 유지하게 되면서 1985년 11월의 판타스틱 포 #284 이슈에서는 아예 이름을 인비저블 우먼으로 고치게 된다.


  본명이 브루스 배너(Bruce Banner)이니 두문자 법칙이 적용된 경우인 헐크의 모티브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섞은 것이었다. 감마 방사선의 영향으로 인해 분노하면 신체가 녹색으로 변해 거대화하고 이성이 날아가며 괴력이 생긴다. 괴력의 수준이 너무 막강하여 심하면 행성도 파괴할 지경이다. 높은 지성을 가진 과학자가 이성이라곤 한 조각도 없는 녹색 덩치 괴물이 된다는 설정은 ‘자기 자아와의 투쟁’ 테마 혹은 이중인격 테마다.


헐크의 데뷔인 인크레더블 헐크 #1의 표지.


  그렇다면 무조건 때려부수기만 하는 파괴적인 헐크는 어떻게 영웅 캐릭터가 되는가? 그것이 배너가 헐크를 제어하려 애쓰고, 헐크의 인격이 세상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표현된다. 헐크는 브루스 배너라는 영웅적 인간의 영웅성인 동시에 약점이다. 처음에는 이 설정이 독자들에게 좀 난해했는지 데뷔 시리즈인 인크레더블 헐크(Incredible Hulk)가 6회만에 캔슬되었지만, 1년 반 후인 64년 10월에 테일즈 투 어스토니시(Tales To Astonish) 시리즈의 #60 이슈에서 연재가 재개되면서 인기가 상승하고 자리를 잡아갔다.


  저니 인투 미스터리(Journey into Mystery) #83에서 데뷔한 토르는 북유럽 신화의 부활 및 현대 공간에서의 리라이팅 프로젝트였다. 실제 신화 속의 토르를 도입한 것인데, 죄를 짓고 아버지 오딘(Odin)에 의해 천상계 아스가르드에서 추방 당하고 지구의 절름발이 의대생 도널드 블레이크(Donald Blake)의 육신에 봉인된다. 토르로서의 기억을 모두 잃고 살던 도널드 블레이크는 우연히 자신의 망치 묠니르(Mjolnir)를 되찾고서 기억을 회복한다. 알고 보니 아버지 오딘의 목적은 토르가 인간성을 배우고 겸허해지는 것이었다.


 

도널드 블레이크가 묠니르를 찾아 토르로 각성하는 첫 장면.


  불멸자인 신이 필멸자의 속성을 알게 된다는 것이 토르의 기본 캐릭터성이었다. 묠니르를 들어 토르로 변신을 하면 번개를 부르고 하늘을 날고 무엇이든 부숴버릴 수 있는 전능한 천둥신이지만 도널드 블레이크일 때는 잘 걷지 못하는 부분 장애를 안고 있는 초보 의사다. 토르는 양쪽의 삶을 모두 영위하면서 필멸자의 세계를 배워간다. 북유럽 신을 그대로 가져온다는 최초 신화적 컨셉은 이미 잭 커비가 DC 코믹스의 테일즈 오브 언익스펙티드(Tales of Unexpected)의 1957년 #16 이슈에서 시도해본 적이 있지만, 필멸자의 운명과 섞는 특징은 스탠 리의 아이디어였다. 여기서도 판타스틱 포와 똑같이 약점과 불완전성의 활용이 보인다. 캐릭터의 한계를 명확히 정하고 초월적 면모와 대비시키는 것이다.


  이런 특성은 리-커비 콤비의 세 번째 히트작이자 마블 사상 최고의 히트작인 스파이더맨에서 완성되었다. 어메이징 판타지(Amazing Fantasy) #15에서 데뷔한 스파이더맨은 어린 노동자 계급 히어로라는 컨셉이었다. 스티브 딧코가 일단 크레딧을 갖고 있긴 하지만, 초안은 스탠 리와 잭 커비 듀오가 잡았다. 잭 커비의 원안이 ‘너무 영웅적’이라는 이유로 반려되고 딧코가 마무리와 그림을 맡았다. 방사능 돌연변이 거미에게 물린 후 거미줄 쏘기, 강한 단위 근력, 위험을 감지하는 스파이더센스(spider sence), 벽 타기 등의 거미 능력을 얻은 이 캐릭터의 본명은 피터 파커(Peter Parker)이니 두문자 법칙에 포함된다. 얼핏 생각하면 혐오 동물에 속하는 거미에서 따왔으니 인기가 없을 것 같았지만, 마블 전체를 대표하는 최고 히트작 자리에 단숨에 등극해버렸다.


  피터 파커의 삶은 불우하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삼촌 부부의 양육을 받았다. 하지만 삼촌마저도 어려서 여의고, 피터는 직접 혈연 관계가 없는 백모와 단둘이 대도시 뉴욕에서 살아간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으니 피터는 어려서부터 알바를 전전하는 등 고생하며 성인이 된다. 그 와중에 학교에서 자기를 괴롭히는 운동부 일진 학생과도 부딪히고, 첫사랑도 겪고, 인생의 파트너를 만나 결혼도 하고, 간신히 취업도 했다가 창업도 해보는 등의 인생사를 겪는다. 그럼에도 쾌활하고 유머를 좋아하는 성격은 잃지 않아서 상황이 어떻든 일단 말을 많이 하고 본다. 그래서 재난이나 전투 상황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월세 걱정, 백모 병원비 걱정, 학교 과제 걱정, 데이트 약속 늦을 걱정 등을 하는 정겨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우리의 좋은 이웃 스파이더맨’이다.


  노동을 쉬지 않아야 먹고 살 수 있는 도시 빈민 노동자이니 수퍼히어로 활동을 할 시간에 직업 하나를 더 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신세 한탄을 할지언정 시간을 최대한 쪼개 타인을 돕는 쪽을 택한다. 가장 큰 이유는 삼촌의 사망으로 인한 트라우마다. 자기 행동의 나비 효과로 인해 삼촌이 사망하면서 물려받은 한 문장이 그를 움직인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스탠 리는 성경의 누가복음, 영국의 윌리엄 램 의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등의 문장을 보고 대충 만들었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그렇게 믿지 않는 이 문장은, 데뷔 회차인 어메이징 판타지 #15 이슈에서부터 등장한 유서 깊은 문장이며, 스파이더맨을 요약하는 문장이자, 미국 문학의 역사에 남은 문장이다.



  시대가 프랑스의 68혁명으로 달려가던 분위기의 1965년, 에스콰이어 지는 미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의 아이콘’을 묻는 설문 조사를 했다. 체 게바라, 밥 딜런 등이 꼽히는 가운데 정체성의 고민을 맹렬히 하는 헐크와 스파이더맨이 랭크에 올라왔다. 이 답변 중 하나가 대중들이 스파이더맨을 보고 느낀 공감을 설명해준다. “고난을 겪고, 가난하고, 정체성 고민에, 짧게 줄이면 우리 자신입니다.”


  앤트맨의 경우엔 간단한 SF 단편이 수퍼히어로로 변형되었다. 행크 핌(Hank Pym)은 테일즈 오브 어스토니시의 #27에서 데뷔했고, 수퍼히어로 앤트맨으로서는 #35에서 데뷔했다. 처음에는 핌 입자라는 신물질을 개발해 작아지는 데 성공한 과학자로 나온다. 본래의 크기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개미와 벌에 쫓기다가 간신히 되돌아와, 핌 입자를 그 위험성 때문에 파기하는 SF 이야기였다. 이 설정이 이내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을 활용하는 수퍼히어로로 바뀐 것이다. 행크 핌의 인간적 약점은 자신의 정신 건강이었다.

 

  다른 어벤져스 멤버들의 초능력에 비하면 작아지는 능력이 초라하다 여기며 열등감을 느낀 탓에, 반대로 커질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자이언트맨(Giant-man)이라는 이름을 만들었고, 이후로도 골리앗(Goliath), 옐로재킷(Yellowjacket) 등의 다른 정체성을 만들곤 했다. 테일즈 오브 어스토니시 #44에서 와스프로 데뷔한 파트너 자넷 밴 다인(Janet van Dyne)에 대해 다른 어벤져스 동료들이 이성으로서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도 행크 핌의 정신 건강에 좋지 못했다.


  이 낮은 자존감은 행크 핌을 끊임없이 괴롭혀 집착, 편집증, 가벼운 망상 증세까지 부추겼다. 옐로재킷은 잘못 흡입한 화학물질 때문에 낮은 자존감이 극대화되면서, 별도의 빌런 인격이 만들어진 스토리이다. 68년 출판된 어벤져스(The Avengers)의 #54와 #55 이슈에서, 행크 핌이 열등감을 이겨내기 위해 만들어낸 인공지능은 울트론(Ultron)이라는 이름으로 어벤져스의 적이 된다. (다만 울트론은 스탠 리의 창조물이 아니다.)


옐로재킷이 된 행크 핌과 그를 달래보려는 자넷 밴 다인.

테일즈 오브 어스토니시 #59의 일부.     


  이후로도 자존감 문제에 시달리곤 하는 행크 핌과, 그런 그에게 안정을 주려 노력하는 자넷 밴 다인 부부는 앤트맨과 와스프의 기본 구도가 되었다. 이런 인정 욕구가 독자들에겐 처연해 보였는지 앤트맨은 탑셀링(top-selling) 상품까지는 되지 못하고 어벤져스의 조연에 머물렀다. 심지어 앤트맨과 와스프가 어벤져스라는 팀을 소집하는 창립 멤버로 기능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편 아이언맨은 스파이더맨과 반대되는 자본가 계급이다. 공학 재능이 출중하고, 물려받은 사업도 잘 꾸려서 세계적 부호이니 딱히 구김살이 없을 것 같아 보이는 토니 스타크(Tony Stark)이다. 자신의 첨단 공학 기술이 들어간 철갑옷으로 온몸을 두르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빔을 쏘는, 가장 SF스러운 수퍼히어로였다. 토니 스타크는 그 재능을 통해 무기개발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정작 실제 베트남전이라는 전쟁터를 겪은 후엔 큰 죄책감을 느끼고 반전주의자가 되어 전쟁 억제에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최초의 토니 스타크는 미국 발명가를 모델로 해서 출발했다. 토마스 에디슨, 니콜라 테슬라, 하워드 휴즈, 알렉산더 그라함 벨 등 당대의 미국 문명에 큰 공헌을 한 발명가들 말이다. 시대는 냉전과 베트남전의 시기, 기술입국을 강조하던 시대였고 문명의 첨단에 있는 발명가들은 냉전에서 유리해질 사회적 자산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냉전의 첩보물 요소를 뼈대 삼고, 베트남전의 우울한 전쟁물 요소와 SF의 기술적 요소가 외연을 이루는 갑옷이 되고, 그 안에 부드러운 자아가 들어가는 모순적 구성 – 냉전의 좋은 도구이자 반전을 원하지만 싸움을 계속 해야하는 입체성이 완성되었다. 이 테마는 이후 작가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자기가 만든 무기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그로 인해 수퍼히어로가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피해,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얻은 PTSD 등으로 인해 토니 스타크가 알콜 중독자가 되는 스토리로 연결된 것이다. 이 고뇌와 고통 또한 독자들의 공감을 강하게 얻었다. 당대의 증언에 따르면 특히나 여성 독자들에게서.


1979년의 인빈서블 아이언맨(the Invincible Iron Man) #128의 표지.

이후 9회 동안 진행된 ‘병 속의 악마(Demon in a Bottle)’ 스토리는 발전해온 아이언맨의 캐릭터성을 요약하는 명작 스토리다.     


  설정에 있어 스탠 리가 간접적 영향만 끼친 닥터 스트레인지를 넘어서면 그 다음에 창조한 것은 엑스맨이다. 진화론의 진화 메커니즘인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해 등장한 새로운 인류 종족이 각 개체마다 초능력을 갖고 있다는 설정이다. 작가 입장에서는 ‘돌연변이다’라는 설명으로 캐릭터의 기원 스토리를 갈음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스탠 리는 처음엔 판타스틱 포와 같은 분위기로 엑스맨을 만들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성소수자 운동과 흑인 민권 운동의 발전을 보고서는 소수자 집단의 상징으로 바꿨다. 따라서 엑스맨의 멤버들뿐만 아니라 돌연변이 전부가 인류의 소수 종족으로서 차별이나 박해를 받는 것이 기본 구도가 되었다. 이 테마는 이후 인휴먼스의 설정에도 적용되었다.


  다음으로 만든 수퍼히어로는 스탠 리의 관심이 사회적 차별로 옮겨갔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데어데블로, 아예 장애인 주인공이다. 본명이 맷 머독(Matt Murdock)이어서 두문자 법칙에 들어가는 데어데블은 장님이다. 어려서 치명적인 화학 물질에 노출되는 사고를 겪어 시각을 잃은 대신 청각을 비롯한 다른 감각을 고도로 훈련해서 되돌아오는 음파를 통해 시각을 대체하는 반향정위(反響定位, echolocation)를 익혔다. 주변을 ‘소나(sonar) 레이더처럼’ 인지하며 격투로 싸우는 맷 머독은,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와 같은 도시 빈민 계급이다. 직업은 동네 변호사인데, 당연히 변호사 사무소를 경영하기도 빠듯하면서도 자경단 역할을 수행하는 이중고를 갖고 있는 것이 스토리의 배경이 된다.


데어데블 #1의 표지. 저 노랑-빨강-검정의 코스튬은 곧 빨강-검정으로 바뀌게 된다.     


  블랙 위도우와 호크아이는 당대의 냉전 질서에서 파생된 장르인 첩보물의 영향을 받았다. 테일즈 오브 서스펜스(Tales of Suspense)의 #52에 처음 등장한 나타샤 로마노프(Natasha Romanov)는 소련의 스파이로 아이언맨의 빌런이었다. 호크아이 클린트 바튼(Clint Barton)은 테일즈 오브 서스펜스 #57에서 데뷔했는데, 역시 처음엔 빌런 혹은 반동인물로서 등장했다. 이 둘은 별도의 초능력이 없는데, 비초능력 계열 수퍼히어로는 대부분 재력이나 기술력이 있는 반면 이 두 캐릭터에게는 오직 수완과 전투 능력만 있었다.


  블랙 위도우는 최초에는 코스튬이 없는 스파이로서 등장했지만 66년의 어벤져스 #29에서는 소련 정부가 만들어준 하이테크 코스튬을 얻은 후 미국으로 전향했다. 현재의 검은 코스튬으로 정착한 것은 1970년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86에서이다. 호크아이는 명궁이니 명백히 DC의 그린 애로우를 모방한 아류작이다. 테마색은 보라색이며, 초기 코스튬은 현재 기준으로 매우 촌스럽다. 아무튼 이 둘은 곧 어벤져스에 합류하고, 블랙 위도우는 스파이로서의 캐릭터성에, 호크아이는 궁수와 비초능력자로서의 캐릭터성에 집중하게 된다.


처음에는 적대 관계로 등장했다는 점이 블랙 위도우와 호크아이의 역사에서 특이한 점이다.


  본명 트찰라(T‘Chala)인 블랙팬서의 검은 코스튬과 배경 공간 와칸다(Wakanda)의 디자인은 커비의 미래주의 계열 디자인의 결정판인 동시에, 당대의 흑인 민권운동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던 스탠 리의 사회 반영이 결합한 경우다. 신비한 허브를 먹고 캡틴 아메리카 급의 초인적 육체 능력을 얻는다는 설정은 다소 오리엔탈리즘이나 신비주의의 영향이 느껴지지만, 아프리카 대륙에 선진적 기술 문명 국가인 와칸다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설정은 흑인 독자들의 열광을 끌어내기 충분했다. 캡틴 아메리카와 동일하게, 정치적 목적이 컨셉에서부터 적용된 경우였다.


  같은 발상은 팔콘에도 적용되었다. 블랙팬서가 최초의 아프리칸 수퍼히어로라면, 팔콘은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수퍼히어로다. 본명이 샘 윌슨(Sam Wilson)인 이 인물은 날개가 달린 하이테크 수트를 입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조류와의 교감이 가능한 캐릭터였다. 첫 등장 이후 캡틴 아메리카의 사이드킥이 되어 버키의 자리를 메웠다.


  이 두 캐릭터의 특이점은 그 인종에 있다. 블랙팬서의 이름은 그 자체로 흑인민권운동의 상징 중 하나인 흑표범당/흑표당의 이름이다. 정당은 1966년 10월에 설립되었는데 명칭을 실제로 논의한 것은 그 전일 것이니, 66년 7월에 데뷔 이슈가 출판된 블랙팬서와 시기가 겹친다. 일단 스탠 리 자신이 2005년에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냥 우연의 일치라고 한다. 그리고 초기 스토리는 트찰라가 전제군주임에도 흑인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싸움을 강조한다. KKK와의 싸움 같은 인종차별과의 대립 말이다.



  팔콘의 경우엔 인종차별을 반영한 스토리가 블랙팬서보다 적은 편이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미국의 상징 그 자체인 캡틴 아메리카와 함께 있는 모습 자체가 상징적이다. 또한 본명인 샘 윌슨은, 미국을 의인화시켜 부를 때 사용하는 이름인 ‘엉클 샘’을 떠오르게 한다. 엉클 샘 캐릭터의 실제 모델인 뉴욕 주 정육업자의 이름이 새뮤얼 윌슨이었기 때문이다. 의도를 짐작할 수 있는 작명으로, ‘미국을 상징하는 자리에 흑인이 들어가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도발적 질문이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팔콘을 제약하고, 팔콘이 대항하는 대상 또한 결국 인종적 편견인 셈이다.



현실성의 닻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듯, 스탠 리의 수퍼히어로들은 신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가족애라거나 정서적 약점이라거나 하는 인간적 불완전성을 반드시 갖고 있다.


  이건 수퍼맨의 크립토나이트, 신적 존재의 유일한 카운터 펀치와는 다르다. 엑스맨에게 소수자성을 부여한 것처럼, 그들의 초능력-초월적 요소가 곧 그들의 고통의 근원이 되는 것에 가깝다. 스탠 리는 비현실적 캐릭터의 일정 부분을 현실에 묶어두는 요소를 만들어두었다. 초능력 자체 혹은 초능력과 긴밀하게 연결된 요소 때문에 신적이어야 할 영웅이 현실적 주제를 붙들고 고뇌하는 테마다. 영웅 서사에 반드시 들어가는 고난 파트, 그 원인이 영웅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에서도 기인해야 한다는 발상이었다.


  이를 나는 ‘현실성의 닻’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이 특성이 DC와 마블의 차이다.


  DC의 수퍼히어로 묘사는 초월성에 초점을 맞췄고, 그래서 신적인 존재로서의 위상이 강조된다. 영웅담 장르의 고전적 테마다. 수퍼맨은 난민 외계인이지만 완전무결한 초능력과 고결한 성품이 강조되며 태양에서 힘을 얻는 태양신의 면모도 갖고 있다. 원더우먼은 설정 자체로 반신이며 초기 설정에는 있었던 능력상의 약점도 사라졌다. 배트맨은 자신의 노력과 재력으로 범죄 수사에 있어 완전무결한 탐정이 되었으니, 신이 된 인간으로 볼 수 있다.


  DC의 선한 수퍼히어로들이 신, 즉 선신(善神)이라면 그에 대항하는 악신(惡神)이 있어야 한다. 이념적으로 반대쪽에 존재하는 주적을 아치에너미(Arch-Enemy)라고 부른다. 태양신 수퍼맨에 대한 열등감과 분노를 대표하는 렉스 루터, 질서를 지향하는 배트맨에 반대항인 혼돈의 조커가 대표적이다. 원더우먼에게도 신화 속의 아레스(Ares)나 마녀 키르케(Circe) 등이 존재한다. 바다 전체의 왕인 아쿠아맨에게는 그에게 불가해한 증오를 내뿜는 블랙 만타(Black Manta)라는 아치에너미가 존재한다. 플래시에겐 능력은 같지만 지향점이 반대인 리버스 플래시(Reverse Flash)가 있다. 용기와 의지에서 힘을 얻는 그린 랜턴 군단에게는 공포에 의한 지배를 추구하는 시네스트로(Sinestro)와 그 수하들이 아치에너미다. 이 1대1의 선악 대립 구도에서 벗어난 그린 애로우 같은 캐릭터들은 대부분 조연이다. 즉 저스티스 리그가 만신전이라면, 렉스 루터, 키르케, 조커, 블랙 만타, 리버스 플래시, 시네스트로 등은 만마전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DC 수퍼히어로의 고뇌와 갈등은 히어로 대 빌런, 이념 대 이념, 가치 대 가치, 개인 대 세상의 상호작용 속에서 전개된다.

 

2013년의 게임, 인저스티스의 부제가 ‘우리 중의 신’인 것인 우연이 아니다.


  스탠 리가 정립한 마블의 방식은 다르다. 마블의 히어로들에게는 빌런이 있긴 있지만 아치에너미라고 부를 수 있는 정도의 빌런은 없다. 판타스틱 4에게 닥터 둠이 그나마 네메시스 개념에 어느 정도 부합하지만, 어벤져스 시리즈 이후로는 독자적인 캐릭터성을 발전시켜 빌런 겸 다크 히어로의 면모를 갖게 된다. 이런 극소수의 예를 제외하면, 배트맨-조커의 관계처럼 수퍼히어로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반대항의 빌런이 마블에는 없다. 실제로 스탠 리는 편집장으로서 자신의 캐릭터 작법을 마블 코믹스의 후배 작가들에게 교육했고, 마블 코믹스의 스타일 내지는 전통으로 굳어졌다. 그리하여 마블 수퍼히어로의 고뇌와 갈등은 인물의 내면에서부터 기원한다.


  스탠 리의 작법에 의해 현실성의 닻이 캐릭터 내에 있기 위해선, 즉 독자가 캐릭터에 쉽게 이입하기 위해선 그 현실성 요소가 당대에서 온 것이어야 한다. 애초에 수퍼히어로 장르는 시작부터 대중문화였으며, 당연히 대중 일반의 기호에 호소해야 하기 때문에 당대성을 가지게 된다. 이런 이중의 성격 덕에 미국의 수퍼히어로 장르는 빛의 속도로, 아니 플래시만큼 빠른 속도로 당대의 트렌드를 반영하고 선도하는 장르가 되었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63년에 아이언맨에 반영이 되고, 흑표범당/흑표당이 창당한 그 해에 블랙팬서가 데뷔한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실버 에이지의 결말이자 성과다. DC가 캐릭터 리뉴얼을 통해 심판의 날 이후 시장에서 수퍼히어로 장르를 되살려냈고, 신적 초월성을 강조해 캐릭터의 깊이를 더해갔다. 그리고 마블의 천재 스탠 리는 현실성의 닻을 적용해 다양한 현실의 트렌드를 곧바로 반영해내는 시스템과 경향성을 만들어냈다. 이런 시도가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수퍼히어로 장르는 다시는 망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한 기반을 갖춘 장르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다른 장르의 코믹스에 비해 훨씬 양질의 작가들이 공급되었다.


  이 시기에 업계에 들어온 세대 중에서 마블에 자리잡은 작가들은 1970년에 잭 커비가 작가로서의 크레딧과 보수에 대한 불만을 갖고 DC로 이적한 후에도 그 자리를 훌륭히 메웠다. 스탠 리 또한 60년대 중반부터는 작가로서의 창작보다는 편집자로서의 창작 – 플롯만 만드는 창작의 비중이 늘어갔고 72년 8월에는 아예 일선에서 물러났다. 스티브 딧코와 같은 1.5~2세대 작가들이 현장의 중심이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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