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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핏 Dec 28. 2020

남이 먼저 쓴 나의 글

반복되는 문학의 주제들-정신의 가계도

내가 누군가의 이명 (異名) 일지도 모른다는 

오래된 상상력 혹은 그럴듯한 거짓말

폴 발레리
나 자신에 대한 연구, 그러한 관심 자체에 대한 이해, 그리고 나 자신의 존재의 특성을 스스로 분명하게 추적하고 싶은 욕망, 이런 생각들은 거의 한시도 나로부터 떠난 적이 없었다. 이러한 남모를 병은 사실상 그 근원은 문학 때문이었는데도 나를 문학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폴 발레리 <기억의 단편들> 중에서 


문학에는, 글에는 

어쩌면 글들의 가계도가 따로 있는지도 모른다.


가끔씩 어떤 글을 보면, 너무 공감이 간 나머지 그 글을 내가 쓴 것이 아닌가 착각하고는 한다.

위의 글이 그렇다.

필사 삼아 노트에 베껴놓은 글을 내가 쓴 문장인가 싶어 할 때도 있고, 

내가 쓴 글을 남이 쓴 글의 필사로 착각할 때도 있다. 

이쯤 되면 의심이 싹튼다. 과연 글에게 주인이 있을까. 

글은 어떤 공동의 영혼이나 어떤 정신이 저자의 몸에 깃들어 글을 쓰게 하고 

그 글이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주인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글이 글을 낳는 글 가문의 가계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조상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혈연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누구든 남의 글을 읽고 나도 이 생각해봤어,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폴 발레리에게서 카프카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면, 이상한 일일까? 


 문학이 타임머신일 수 있는 이유는 시대가 바뀌는 중에도 

인간의 내면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의 자세- 즉 문학의 자세만큼은 변치 않기 때문 아닐까 싶다.

그것이 바로 문학의 본질일 것이다.


멕시코 출신의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작품에도 이런 부분이 등장한다.



“이 세상에 아비 없는 책, 고아인 책이 있는가? 어떤 책의 후손이 아닌 책이? 인류의 문학적 상상력이 이룬 거대한 가계도에서 벗어난 단 한 페이지라도 있는가? 전통이 없는 창조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지만 거꾸로 말해 재생, 새로운 창조, 즉 끝없는 이야기 속에서도 새로 돋는 푸른 잎사귀 없이 전통이 생존할 수 있겠는가?”

해당 구절이 등장하는 책 아우라

말하자면

수없이 태어나고 죽는 인간들의 역사 속에서

명맥이 끊기지 않는 문화적, 정신적 환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피가 통하지 않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다 죽은 인간들의 정신적 가계도에 의해서

나 역시 어떤 명맥을 잇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내가 하는 상상은 아직 본 적 없는 누군가의 정신적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생각하고 쓰고 주장하는 문장들의 어머니, 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어떤 책 속에서 내가 읽어주기를 희망하며 세월을 죽이고 있다는,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터무니없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었다. 


페르난두 페소아


그러고 몇 년 전에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 말한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를 알게 됐다.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고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 늘 나보다 앞서 무언가를 했으니까. 내가 먼저라고 우기려는 것은 아니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실제로 120가지가 넘는 이명(異名)으로 활동했던 미스터리 한 작가다.

어쩌면 그는 한 명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나 역시 

새로 태어난 그의 이명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여러 사실을 종합해보았을 때 
나는 부정할 수 없이 누군가의 정신적 자손이며, 
엄청난 대작가의 무수한 예명들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대작가의 환생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글쓰기에 임해야 한다.
또 다른 누군가가 내 글을 보고 기시감을 느낄 날을 기대하면서
남의 생각을 내가 먼저 글로 옮기는 일 말이다.

다 말장난이긴 하지만
세상에 환생을 거듭하는 정신이 있다는 말은
이제까지 내가 타인의 저작을 읽고
기시감과 함께 내 것인가 하는 착각을 했던 원인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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