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hl Dec 31. 2020

늦게 배운 덕질이 무섭다

생애 처음으로 연달아 두 번 본 드라마 <상견니>를 세 번째 보며...

*. 본 콘텐츠에는 드라마 <상견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언젠가부터 티브이 정규방송을 시간대에 맞춰 보는 것보다 후에 다시 보기로 주말에 몰아보는 게 편해졌고, 나중엔 그마저도 귀찮고 수고로워 유튜브로 재밌는 부분만 골라보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일상의 메인이 되는 매체는 유튜브가 되었고, 채널을 돌리듯 유랑하다 우연히 본 유투버에 의해 넷플릭스 인생 드라마를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상견니(想見你)>.

원할 , 볼 , 너 , 즉 '너를 보고 싶어'라는 제목의 대만 드라마다.


원래 드라마를 잘 안 보는 데다 끝까지 다 본 드라마가 드물고, 완주하더라도 다시 본 드라마는 하나도 없었는데. 며칠 전에 보기 시작한 드라마 <상견니>는 벌써 두 번 정주행 했고, 이제 세 번째 정주행을 시작하려는 참인 것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남편은 물론이고 장본인인 나조차도 신기한 이 상황의 원인은 뭘까.



로맨스에도 알파가 필요해


요즘 재택근무를 하느라 남편과 점심, 저녁을 꼭 함께하는데 때마다 넷플릭스로 반주처럼 곁들일 콘텐츠를 찾아 튼다. 가장 최근에 본 건 드라마 <스타트업>이었는데 지인의 강력 추천에도 불구하고 여주와 남주가 한창 잘 돼갈 즈음 서로 꽁냥 거리는 모습이 오글거려 더 보길 포기했다. 다른 드라마도 마찬가지였다.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도, <사이코지만 괜찮아>도 어느 순간부터 지루하고 뻔해졌다.


웬일인지 <상견니>에선 "선배가 더 이상 남자 친구를 안 사귀면 나는 평생 여자 친구가 없잖아."라는 느끼한 대사도 감동적이다. 여자를 꾀려는 사탕발림이 아니라, 몇 년의 기다림 끝에야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옛 연인과 다시 만나게 될 가능성이 1% 높아진 데 대한 기쁜 투정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지금 네 앞에 있는 나는 네가 너무 필요해."란 뻔한 말도 절절하게 들린다. 마음보다 몸이 웃자란 고등학생이지만, 자신만이 알아본 특별한 사람을 지치지 않고 지켜본 남자의 입에서 삐져나온 진심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 배경엔 타임 슬립이라는 판타지 요소와 디데이가 정해진 죽음이라는 스릴러적 모먼트가 자리하고 있다. 덕분에 지루할 줄 알았던 두 번째 정주행 땐 황위쉬안(여자 주인공)을 두고 왕취안성(남자 주인공)이 스르르 사라지는 첫 장면만 보고도 눈물이 났다. 둘에게 닥칠 시련에 마음이 앞선 것이다.



잠시 두 눈을 감아봐


과거와 현재를 잇는 추억이자 타임 슬립을 가능케 하는 음악인 우바이(Wu Bai)의 <Last dance>도 몰입도를 배로 높인다. 처음엔 '잠시 두 눈을 감아봐'라는 가사에 맞춰 엄지와 검지를 붙여 눈을 가리는 모습이 유치해 보였는데, 얼마 안 있어 그 음악만 나오면 덩달아 두 손으로 눈을 가리는 나를 볼 수 있었다. 흑흑 흐느끼면서.


이어지는 가사도 어쩜 그렇게 상황에 잘 맞아떨어지는지. 잠시 두 눈을 감는 순간 타임슬립이 시작되는 것도 그렇지만, 가지 말라고 매달리는 왕취안성을 뒤로하고 황위쉬안이 떠나는 장면에 깔리는 가사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

네가 준 사랑
막막한 기다림
정말 나 혼자 가야 하니
네가 날 붙잡아주면 좋겠어


상형문자와 빙하기를 들먹이며 수만 개의 타임라인을 지나서라도 함께 하겠다는 <Miss you 3000> (그나저나 왜 1000이나 10000이 아니라 3000일까?)과 그날(one day) 은하수에서 만나자고 속삭이는 <Someday or One day>(드라마의 영어 제목과도 같다.)도 미스터리하면서 애잔한 드라마 전반의 분위기를 잘 드러낸다. 얼마나 좋은지, 음악이 나올 때마다 따라 부르고 싶어 이참에 대만어를 배워야 하나 살짝 고민하기도 했다.  



봐도 또 보고 싶어


주인공 둘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는 걸 따라가느라 정신없던 1회 차와 달리 2회 차엔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왕취안성과 리쯔웨이가 공항에서 만나 대화를 하는 장면이 있다. 처음엔 의아했다. 으잉?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이 드라마의 허점이다! 하지만 두 번을 보고 알게 되었다. 교통사고가 난 후 식물인간이 된 리쯔웨이의 영혼이 왕취안성의 몸에 들어갔고, 비행기 사고가 나 왕취안성이 죽게 되자 리쯔웨이의 영혼이 다시 원래의 몸(이자 과거)으로 돌아가 깨어나게 된 것이다. 결국 이것은 황위쉬안과 리쯔웨이의 러브스토리라는 것.


또 하나는 설정상 같아야 할 천윈루와 황위쉬안의 다른 외모다. 드라마에는 부각되지 않지만(원래 26화로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땐 나왔으려나?) 천윈루와 달리 황위쉬안은 왼쪽  밑에 점이 있다. 길을 잃어 왕취안성에게 도움을 청하는 꼬마 황위쉬안도 마찬가지다. (여담으로 황위쉬안을 연기한 배우 가가연도 실제 왼쪽 눈 밑에 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타임슬립을 할 수 있는 조건도 명확하게 나오질 않는데, 잘 보면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카세트테이프라는 걸 알 수 있다. (황위쉬안이 모쥔제에게 테이프를 건네며 태우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카세트 플레이어나 이어폰이 없어도, 누워서도 앉아서도 타임 슬립은 작동한다. 그리고 눈을 꼭 감고 혼자 들어야 하며, 나를 닮은 누군가가 (살아)있어야 한다. (왕취안성이 죽은 후 리쯔웨이가 타임슬립을 할 수 없었던 이유이자, 셰즈치가 타임슬립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또 뭐가 있더라. 황위쉬안과 왕취안성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깃집은 다름 아닌 '청담동 포차'. 실제로 있는 가게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글이 그대로 붙어있는 간판에 옷에도 '포차'라는 한국어가 쓰여있는 게 퍽 신기하다. 등장인물이 죄다 삼성 핸드폰을 쓰는 것도 흥미로웠는데, 후에 협찬사 리스트에서 로고를 발견하고 살짝 김이 빠지기도 했다. 아, 리쯔웨이가  차고 다니는 전자시계를 보고 천윈루가 애도 아니고 뭐냐고 타박을 하는데, 대학생인 왕취안성도 모델은 다르지만 비슷한 전자시계를 차고 다닌다. 그리고 또...

 

늦게 배운 덕질이 무섭다더니, 그렇게 2020년의 마지막에 시작한 드라마가 인생 드라마가 되었다.




*. 표지 사진 : https://medium.com/@angela12190824/review-taiwanese-drama-someday-or-one-day-6240278277bf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